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9
#48화
“네, 네가 왜 거기 있어?”
“그러게요. 내가 왜 여기 있을까.”
“그럼 혹시……?”
“혹시는 무슨. 역시지.”
김상식의 안색이 똥독 오른 사람처럼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니 10년 묵은 숙변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아아, 이것이 바로 똥르가즘.
“그건 그렇고, 뒤로 좀 갑시다. 여기 혼자만 있는 거 아니잖아요?”
내가 한 걸음 내딛자 김상식이 힘없이 뒷걸음질 친다.
다른 스카우터들이 명함을 들고 나를 둘러쌌다.
“상동 길드입니다. 최고 대우를 약속드립니다.”
“이럴 게 아니라 따로 자리를 옮겨서 말씀을…….”
사방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빗발친다. 잠깐 사이에 내 손에는 수십 장의 명함이 들려 있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신기하면서도 묘한 기분이다. 7년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고작 반나절 만에 나를 둘러싼 세상이 변했다.
아니.
‘내가 변한 거겠지.’
이 바닥에서는 C급 헌터부터가 진짜라는 말이 있다. 뛰어난 능력에 고액 연봉, 사회가 인정하는 중급 헌터.
비로소 그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시스템의 힘이라면 나는 계속해서 성장해 나갈 수 있다.
그렇게, 어떤 헌터보다 빠르게 새로운 길로 접어들 것이다.
“각성자님, 원하는 조건이 있으시면 무조건 맞춰 드리겠습니다.”
“아, 네.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정말이죠? 기다리겠습니다!”
아냐. 기다리지 마. 연락 안 할 거니까.
“자자, 이제 다들 진정하세요.”
끈질기게 달라붙는 스카우터들을 협회 경비원들이 막아섰다.
사실 C급 헌터를 상대로 저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없는데, 내가 워낙 흔치 않은 케이스라 이목이 많이 쏠리는 모양이었다.
‘하긴, 재각성 한 번으로 껑충 뛰었으니.’
이런 기분도 나쁘진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협회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따라붙은 한 사람이 있었다.
“진태경! 아니, 태경 씨!”
“허.”
나는 김상식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불과 30분 전만 해도 새끼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는 무려 ‘태경 씨’다.
“왜요?”
“아까, 아까는 내가 미안했어요. 예전에 서운했던 일도 전부 다.”
김상식은 횡설수설하며 과거 자신이 내게 저지른 잘못들을 쏟아 냈다. 때아닌 고해성사를 끝낸 그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다 잊고 비즈니스로 생각합시다.”
“비즈니스.”
그 단어를 혀끝에서 굴려 본다.
어감 좋고, 느낌은 별로다. 비즈니스 상대가 김상식, 소풍 길드라서 더더욱 그랬다.
“솔직히 태경 씨도 알잖아요. 대형 길드 아닌 이상 거기서 거기인 거.”
“알죠. C급이면 대형 길드에서도 손 내미는 것도 알고.”
“잘 생각해 보란 거죠. 그쪽은 아쉬울 게 없어요. C급 헌터 정도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동네니까. 대우도 딱 그 정도일 거고.”
김상식이 침을 튀겨 가며 말을 이었다.
“어디서 얼마를 부르든, 무조건 더 얹어 드릴게. 이 부분은 길드장님 허락도 떨어진 거니까 확실해요.”
소풍 길드는 몇 년간 꾸준한 하락세를 보였다.
그런 상황이니 길드장도 어지간히 똥줄이 탄 모양이다.
‘이 인간도 마찬가지고.’
가뜩이나 길드 내 평가도 바닥인데 며칠 전 멋대로 잘라 버린 F급 헌터가 C급으로 재각성을 해 버렸다.
다혈질로 소문난 길드장이 그 사실을 알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긍정적으로만 생각해 줘요. 아, 이럴 게 아니라 어디 괜찮은 가게라도 가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 봅시다. 길드장님도 지금 오고 계시…….”
“김상식 씨.”
나직한 목소리에 상식 씨가 입을 다물었다.
“저 영입하고 싶으면, 길드장님한테 토씨 하나 안 빠트리고 전하세요.”
“무슨?”
“꼴도 보기 싫은 인간. 그 인간 하나만 치워 주면 생각해 본다고.”
누굴 가리키는 말인지는 명백했다.
와락 일그러진 얼굴의 김상식을 뒤로하고, 나는 택시에 올랐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푹신한 시트에 한껏 몸을 기댔다.
등급 재측정과 옛 악연과의 만남.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고양감과 동시에 속이 후련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송내역 희망 고시원이요.”
택시 기사가 나를 보며 허허 웃었다.
“아까 그 손님이네.”
“아.”
염병할 서울 택시.
* * *
“웬일이냐? 네가 소고기를 다 사 오고.”
고시원 옥상에 돗자리와 불판을 깔았다. 진호 형은 익어 가는 고기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 네 성의를 봐서 사례금은 없었던 일로 하지.”
“줄 생각도 없었어.”
“양아치냐?”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우리는 마주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돈은 어디서 났어? 당장 이번 달도 힘들다고 징징거리던 놈이.”
“오늘 일당.”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길드 잘리더니 인생 포기했냐?”
“몇 푼?”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쭈, 웃어?”
“웃어야지 그럼. 천만 원을 푼돈 취급 하는데.”
진호 형이 우뚝 멈췄다.
“얼마?”
“천만 원.”
“오늘 일당으로 천만 원을 벌었다고?”
“좀 더 들어오긴 했는데 일단은.”
“너 설마.”
진호 형이 침을 꿀꺽 삼켰다. 눈치가 꽤 빠르군.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아, 나 오늘…….”
“장기 팔았냐?”
죽일까.
나는 한숨을 푹 내쉰 다음 술잔을 털어 넣었다.
“사실대로 말해. 이 형은 고시원 총무로서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얼핏 들으면 고시원 총무가 아니라 국무총리인 줄 알겠다.
“게이트 가서 번 거야.”
“증거 가져와. 난 내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
“그러시든가, 여기.”
진호 형에게 핸드폰을 건네줬다. 협회에서 재측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받은 문자였다.
발신인은…….
“명품충? 누구야 이건?”
“오늘 같이 레이드 뛴 팀장.”
“돈 많나 보네. 의형제 맺고 싶다.”
이 인간 나랑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
잠시 후, 문자 내용을 확인한 진호 형이 눈을 부릅떴다.
“천삼십만 원? 이거 내가 제대로 본 거냐?”
“그럴걸.”
계약서대로라면 지급 금액은 30만 원. 최 팀장은 거기에 천만 원을 추가 지급했다.
‘심지어 잔금이 남았지.’
홉 고블린 주술사와 대전사는 C급의 레어 몬스터. 놈들의 장비와 가죽, 마정석은 판매처를 찾고 있다고 최 팀장은 덧붙였다.
‘판매되는 대로 추가 지급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근처 마트에서 소고기를 닥치는 대로 쓸어 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너…….”
진호 형이 멍한 얼굴로 나와 손에 쥔 핸드폰을 번갈아 봤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온 거야?”
“말하자면 긴데.”
허허 웃은 진호 형이 가위를 움켜쥐었다.
“네 명줄은 짧고?”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나.
캡슐에 관련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진호 형에게는 허무맹랑한 거짓말로 남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오늘 게이트에서 레어 몬스터 두 마리가 나왔는데…….”
목숨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순간, 재각성의 행운이 찾아와 놈들을 무찌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협회에서의 일까지.
급하게 이어 붙인 스토리였지만 진호 형에게는 먹혀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C급 헌터라고?”
“재조정 절차 끝나려면 며칠 걸려서 아직은 아닌데.”
“그게 그거지, 인마.”
넋 나간 얼굴, 잔뜩 쉰 목소리.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진호 형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이 양반 왜 이래, 이거.
“……설마 우냐?”
“울기는 시발. 뭔 개소리야.”
괜한 욕과 함께 고개를 돌려보지만 툭 떨어지는 한 방울 눈물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나는 소매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 진호 형의 눈치를 살폈다.
“형?”
“고기나 뒤집어. 탄다.”
“딴소리는.”
“탄다고!”
“아, 알았어.”
치이익.
고기를 뒤집는데, 뭔가 당황스러우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린다.
‘그러고 보니까 진호 형이랑 안 지도 오래됐네.’
6년? 7년째던가. 세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고시원에 들어오면 그는 늘 그곳에 있었다.
내게 친형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는 형제처럼, 친구처럼 지냈다.
“야.”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진호 형이었다. 나는 괜히 고기를 한 번 더 뒤집었다.
“어, 왜.”
“잘됐어.”
“……그래.”
“그리고.”
작은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고생했다.”
고작 그 한마디에.
저 밑에서부터 울컥 솟구치는 뭔가가 있었다. 지난 7년간 켜켜이 쌓여 있던 감정과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C급 헌터 된 거. 축하한다. 이젠 놀리지도 못하겠네.”
“형…….”
“태경아…….”
“형!”
“태경아!”
우리는 불판을 사이에 두고 뜨겁게 포옹했다. 진호 형이 떨리는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형 마음 다 알아. 고마워, 형.”
“그거 말고. 사례금.”
“……응?”
“사례금 꼭 줘라. 형 요즘 힘들다.”
“…….”
“너 이제 돈 많이 벌잖아.”
진짜 죽일까.
* * *
비틀비틀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지금쯤 투덜거리며 옥상을 치우고 있을 한 사람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어요.’
진호 형답다. 축하하는 방식도, 마지막의 장난도.
전부 그 나름의 표현 방식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고생했다.’
그 한마디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인정하면 쪽팔리지만…… 그때만큼은 살짝 울 뻔했다.
‘그래, 고생했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알바를 병행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아픈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위해 버티고 또 버텨야 했다.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내게는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띠링.
– 상태 이상, [만취]에 걸렸습니다.
– [운기조식]으로 해독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이 내 인생에 끼어들었다.
정체불명의 고물 게임 캡슐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게임 캡슐이라.”
이제는 저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나를 C급 헌터로 만들어 줬으니 신의 선물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 어쩌면 악마가 준 선물일지도 모르지.
‘이대로 괜찮은 건가?’
인생 최고의 날을 보냈음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공짜는 없으니까.’
내가 경험한 세상은 그랬다. 모든 것에는 가격표가 매겨져 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언젠가는 그 값을 치르기 마련이다.
‘시스템은 얼마나 비쌀까.’
천억? 천조? 어쩌면 그 이상?
비실비실 웃던 나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아, 맞다. 나 만취 상태였지.’
찌륵. 찌르륵.
창밖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시야가 어두워지며 잠이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꿈을 꿨다.
깊은 산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꿈을.
– 조장, 조장!
이상하게 듣는 것만으로도 때려 주고 싶은 목소리. 한편으로는 낯익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너무 졸려 눈을 뜰 수 없었다.
– 어떡하지?
– 당장 본대에 알려야…….
– 조장은 왜 갑자기 이럴 때…….
고장 난 라디오를 듣는 기분이다. 목소리에는 노이즈가 꼈고 뚝뚝 끊겼다.
‘졸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들린다.
– 막내야, 살아남아라.
그러나 다음 날 잠에서 깼을 때, 나는 그것들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