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92
#491화
“어, 조장님. 안 주무셨……?”
어스름한 새벽, 내가 머무르는 임시 막사로 들어온 혁무진이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왜.”
“어, 그게…….”
“말해.”
“아닙니다. 그냥 오늘따라 왠지 피곤해 보이셔서요.”
“……후.”
피곤이라, 피곤. 이걸 고작 피곤하다고 해야 하나.
나는 세숫물이 담긴 청동 그릇을 노려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충혈된 눈동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난장판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혁무진의 눈동자에도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 무슨 일이 있긴 했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남의 것처럼 낯설다. 나는 푸석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개 같은 살수 새끼…….”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아주 안 들릴 정도는 아니다. 살수라는 단어에 혁무진이 화들짝 놀랐다.
“예? 살수요?”
“뭐.”
“아니, 방금 분명히 살수라고 하셨잖습니까.”
“잘못 들었어.”
“똑똑히 들었는데요? 제 귀로.”
“아니라니까.”
물론 사실이 맞다.
웬 악독한 살수 새끼가 막사 내부에 십여 개의 암기를 설치했고,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걸려드는 100퍼센트의 성공 확률을 보여 주며 걸레짝이 됐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게 통탄할 노릇이다.
“조, 조장님…….”
“아, 잘못 들은 거라니까!”
“그게 아니라요. 엉덩이에서 피나요.”
“……!”
시벌. 어쩐지 아까부터 엉덩이가 따뜻하더라.
내심 쌍욕을 퍼부으며 엉덩이의 상처를 지혈하는 내 모습에, 혁무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살수 맞는 것 같은데요.”
“수련하느라 다친 거야.”
“정말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수련은 수련이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해독만 하는 게 어느 나라의 무슨 수련 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진짜 수련이야. 네 불알 두 쪽 걸고 맹세한다.”
“누차 말씀드리는 거지만 제 불알은 걸지 마시고요. 혹시 지금도 살수에게 협박당하고 계신 거라면 눈을 두 번 깜빡이십시오.”
“……무진아. 그런 거 시키려면 최소한 전음으로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저 아직 전음 못 쓰는데요.”
“그럼 필담(筆談)으로 하면 되잖아.”
“어, 그러네요.”
“미친놈인가.”
하긴, 상대가 혁무진인데 뭘 더 바라냐.
한숨을 푹 내쉰 나는 녀석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른 새벽에 깔끔하게 무복까지 갖춰 입고 찾아온 걸 보니 용무가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 제갈 대협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다들 모여 있어요.”
“다들? 왜?”
“그, 아시잖습니까.”
괜히 주위를 살핀 혁무진이 입을 뻐끔거렸다. 이내 오직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숨죽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무기요. 죽은 이무기.”
“아.”
“극소수만 은밀히 가기로 했습니다. 무당파의 현공진인(玄空眞人)께서도 기다리고 계세요.”
“현공진인까지? 아, 당연히 그럴 만도 하지.”
현공진인은 이번 사건에 참여한 초절정 고수 중 유일하게 동정채에 남아 있던 사람이다.
게다가 무당파 장문인의 사제이자 무림의 원로이기까지 하니, 무당파의 대표로 참석할 자격이라면 차고 넘친다.
아무리 수신룡의 존재가 극비라고는 해도 무당파에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이 정도 사안이라면 장문인이 올 법도 한데, 왜 굳이 현공진인을?’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떠오른 한 사람에 관한 생각으로 씻은 듯이 지워져 버렸다.
“야, 혹시 같이 가는 사람 중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말을 이으려던 그때, 막사 밖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공자님.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
“준비 끝나셨으면 어서 나오시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멀어지는 기척, 돌처럼 굳어 버린 나를 본 혁무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쟤는, 쟤는 왜 같이 가?”
“누구, 아. 문경이요? 아무래도 신의의 제자씩이나 되는 녀석이니 이무기의 신체 구조나 그런 부분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런데 왜 그러세요?”
왜 그러긴. 저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그렇지.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키고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다가 멈칫한 뒤 혁무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진아.”
“예?”
“앞장서라. 난 네 뒤만 따라갈게.”
“예에?”
시스템 알림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한 기분이다.
띠링. [고기 방패]를 획득하셨습니다!
* * *
준비되어 있던 작은 선박에 올라타자 익숙한 면면들이 보인다.
누덕누덕 기운 도포에 낡은 송문고검(松紋古劍)을 허리에 찬 현공진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젊은 도우가 오셨군.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네.”
“현공진인을 뵙습니다.”
이제는 제법 무림인답게 포권을 취하자, 옆에 있던 제갈풍이 쥘부채를 흔들며 끼어들었다.
“그런데 자네 표정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영 좋지 않아 보이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진인?”
“제갈 가주의 말에 동의하오. 꼭 밤새 살수에게 시달린 듯한 얼굴이구려.”
“살수라니, 진인께서는 농담도 잘하십니다. 하하.”
“허허허.”
“…….”
웃지 마. 이빨도 보이지 마.
만독지환이 없었으면 지금쯤 제대로 서 있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얼마나 독에 절여졌으면 별호를 열화신룡이 아니라 독 장아찌, 뭐 그런 것으로 바꿔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다.
‘이 와중에 뻔뻔하게 앉아 있는 것 보소.’
나는 어느새 쾌조선의 한 자리를 차지한 문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찌를 듯한 눈빛을 알아챈 소년의 고개가 스르륵 돌아간다.
– 눈 깔아라.
“…….”
깔라면 깔아야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문경이 흘려보낸 전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 꼴을 보아하니 첫날부터 죄다 걸려든 모양이군. 한심하긴, 만독지환과 열양지기가 아니었다면 네놈은 간밤에 이미 죽고도 남았다.
– ……죽었을지 살았을지, 그걸 어떻게 압니까?
– 알려 줄까?
– 제가 실언을 했네요.
이게 영 틀린 말은 아닌 것이, 문경이 설치해 놓은 암기에는 하나같이 강력한 독이 발라져 있었다.
언젠가 의술과 독은 일맥상통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백번 옳다. 무슨 수를 썼는지 당하는 독마다 ‘강력한’이라는 미사여구가 꼭 붙어 있더라.
그나마 만독지환의 사기적인 성능과, 독에 상극이라 할 수 있는 열양지기를 익혔기에 자상(刺傷) 몇 군데 입은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거다.
만약 그 두 가지가 없었다면…… 생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의생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저게 신의냐, 독의지.’
– 방금 내 욕 한 거 다 안다.
“흡.”
나도 모르게 헛숨을 삼키자, 마음씨 좋은 현공진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진 도우?”
“아, 아닙니다. 그냥 습관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빈도는 또 정말 살수에게 겁박이라도 당하는 줄 알고 놀랐지 뭔가. 안 그렇소, 제갈 가주?”
“으허허! 제 배꼽 빠집니다, 진인!”
“허허허.”
“…….”
확 그냥, 배꼽을 쥐어 뜯어 버릴라.
내가 제갈풍의 배꼽을 노려보고 있는 사이, 손님들을 태운 선박은 잔잔한 물살을 가르며 부드럽게 나아갔다.
너무나도 당연한 출발에 한 박자 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내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노, 아니 스승님께서 안 오셨는데요.”
갑작스러운 이의 제기에 제갈풍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응? 듣지 못했나?”
“네? 뭘요?”
“적 노 선배께서는 불참하시기로 했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당분간 찾지 말라고 하시더군.”
“……그렇습니까?”
“몰랐나? 어쩐지, 제자를 통해서 말씀하시지 않더라니.”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유가 뭐건 간에 내게 직접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섭섭하고, 지금 그가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착잡하시겠지.’
제자를 키워 본 적은 없지만, 훗날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나 역시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핀 가족 같은 반려동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기분이 아닐까.
“…….”
아니, 정정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적천강의 애완견이나 마찬가지잖아.
‘자식. 그래, 자식이라고 하자.’
스스로 합의점을 찾고 있던 그때, 해맑은 표정으로 다가온 청풍이 손에 든 것을 불쑥 내밀었다.
“뭐야, 이건.”
“당과예요, 은인.”
“……당과인 건 아는데, 이런 건 도대체 어디서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거야?”
둘 중 하나가 틀림없다.
청풍이 시스템 이용자여서 인벤토리에 당과 10톤을 쌓아 놨거나, 근처에 당과가 열리는 나무가 있거나.
“어쨌든 잘 먹을게.”
평소였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지금 당과는 훌륭한 당분 보충 수단이다.
나는 건네받은 당과를 깨물며 청풍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당과를 구해 오다니, 재주도 좋네. 아, 지난번에 제갈세가로 왔을 때 사 둔 거야?”
“아뇨. 그건 벌써 다 먹었는데요.”
“음? 그럼 이건?”
“살, 아니 문경이 줬어요. 이건 특별히 은인께 드리래요. 참 좋은 사람이에요!”
“……누구?”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삐빅.
– [강력한 산공독]에 중독되었습니다!
– [산공독]은 일시적으로 공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 [공력]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습니다! 빠른 조치가 필요합니다!
“…….”
시벌, 어쩐지 당과가 유난히 달더라.
나는 조용히 만독지환을 꺼냈다.
* * *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다.
그리고 이는 장장 오백 년간 동정호와 장강을 지배했던 신령스러운 존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비록 수신룡의 넋은 이미 육신을 떠났지만, 그의 육신은 마지막으로 몸을 뉘었던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생전의 위용과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허어.”
깊은 현기와 깨달음을 지닌 노도사, 현공진인조차 할 말을 잃고 외마디 탄성을 토해 냈다.
그만큼 수신룡의 육신이 주는 위압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미 수신룡을 목격한 바 있는 궁기방조차 입을 쩍 벌린 채 감탄사를 연발했다.
“다시 봐도 어마어마하군. 그렇지 않나?”
나는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마어마하지. 네 입 냄새도 그렇고. 그런 의미에서 부탁하는 건데 꺼져 주면 안 될까. 산공독보다 더 센 것 같아.”
“음. 어렵지 않은 일이군. 단, 조건이 있다.”
“뭔데.”
“어제 주기로 했던 은자 열 냥 중에 다섯 냥을 아직 못 받았다. 네놈이 막 나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다 하다 거지 등쳐 먹는 놈일 줄이야.”
“줄 테니까 말 좀 짧게 해라. 눈앞에 막 환상이 보이려고 하네.”
저게 입인지, 하수구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다.
기어코 은자 다섯 냥을 추가로 받아 낸 궁기방이 툴툴거렸다.
“엄살은. 그리고 환상이라면 나도 지긋지긋하게 봤다. 근 며칠 동안 이상한 꿈도 꿨어.”
“꿈?”
“그래. 꿈.”
궁기방이 피식 웃으며 문경을 가리켰다.
“꿈속에서 문경이 저 이무기와 싸우더군. 검강도 슁슁 날리고, 유령처럼 휙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하는데…… 그 모습이 고금제일의 살수인 살성이라고 해도 믿겠더군.”
“…….”
걔 살성 맞아.
나는 계속해서 떠드는 궁기방을 애써 무시한 채 수신룡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장장 백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육신.
한때 검게 물들었던 비늘은 눈부신 은빛을 흩뿌리고 있고, 몸뚱어리 곳곳에는 수많은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나는 쩍 벌어진 상흔을 쓰다듬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물론 알고 있다. 수신룡과의 전투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오히려 그는 이렇게라도 자신을 멈춰 준 우리에게 고마워했다.
다만 내가 이렇게 사과하는 이유는, 그의 육신을 이대로 묻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체.’
레이드가 끝났으니, 사체를 처리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