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93
#492화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이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수신룡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사심이 엿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놀랍군, 놀라워.”
은빛 비늘을 어루만지는 제갈풍의 눈빛이 황홀하게 반짝였다.
“이 엄청난 강도, 아름다움. 믿어지지 않아.”
비록 끝끝내 용이 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으나, 수신룡은 오백 년의 세월을 품은 신령스러운 이무기.
이미 한차례의 전투를 통해 검증된 바 있는 수신룡의 육신은 그 자체로도 강력한 갑옷인 동시에 무기였다.
“이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요.”
제갈풍의 말에는 일말의 과장도 없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은 검기로도 완전히 베어 낼 수 없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뼈는 비늘보다 더한 강도를 자랑한다.
마법을 이용한 제련술이 발달한 현대에서도 이 정도의 재료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정도니, 무림이라면 더 말해 봤자 입만 아픈 수준이다.
‘비록 만년한철(萬年寒鐵)만큼은 아니지만…… 엄청난 보물인 건 확실하지.’
무려 백여 장에 이르는 수신룡의 몸뚱어리는 그런 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저 비늘로 갑옷을 만든다면 쇠뇌로도 뚫을 수 없을 것이고, 뼈로 무기를 만든다면 운철(隕鐵) 이상의 강도와 예리함을 지닌 병장기가 탄생할 것이다.
무공 비급과 영약, 뛰어난 병장기는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환장해 마지않는 세 가지 요소.
제갈풍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눈에 탐욕이 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걸로 타구봉(打狗棒)을 만든다면…….”
궁기방의 중얼거림에 혁무진이 반박했다.
“무슨 뼈로 타구봉을 만듭니까. 검을 만들어야 제대로죠. 이무기의 뼈로 만든 골검(骨劍)이라, 상상만 해도 끝내주네.”
“너 지금 개방 무시하냐?”
“아뇨. 궁 소협만 무시한 건데요.”
“개처럼 맞아 볼래?”
“어허, 진정하세요. 어차피 저 정도 양이면 타구봉이든 검이든 백 자루는 족히 만들고도 남아돌 텐데 왜 그러십니까.”
“그건 그래. 그럼 우선 타구봉 하나 내 거.”
“저도 검 하나 예약…….”
빡! 빡!
“억!”
“아악!”
사이좋게 뒤통수를 한 대씩 얻어맞은 궁기방과 혁무진이 나를 돌아보며 버럭 외쳤다.
“왜 때려!”
“이유나 설명해 주고 때리십쇼. 제발!”
이 자식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눈살을 찌푸린 나는 큼지막한 주먹을 흔들며 으름장을 놓았다.
“싸울 때는 아무것도 못 한 새끼들이 뭐, 타구봉? 검? 예약?”
“아니, 그건…….”
“무인이라면 어쩔 수 없는…….”
“수신룡 아니었으면 이미 호북성은 작살 났어. 물고기 몇 마리 난폭해진 정도로 안 끝났다고.”
수신룡에 의해 숱한 사람이 유명을 달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게이트가 완전히 열렸다면 호북성에는 한 폭의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졌을 것이다.
“물론 사체는 유용하게 쓰이겠지만, 최소한 너희가 사람 새끼들이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라. 응?”
내 일갈에 움찔한 두 녀석이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는…….”
“솔직히 조장님도 할 말 없죠. 동정어옹을 그 꼴로 만들었는데.”
빡! 빠박!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두 번의 타격음과 두 번의 비명.
나는 재차 머리를 감싸 쥔 궁기방과 혁무진을 향해 윽박질렀다.
“그거랑 이거랑 같냐? 같아? 어?”
이건 나도 억울한 점이 많다.
물론 동정어옹을 작살 낸 건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타락한 수신룡의 피어에 정면으로 노출된 동정어옹 역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람들을 해쳤고, 당시의 모든 증거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으니까.
비록 사지가 부러지긴 했어도 목숨을 건진 게 어딘가. 따지고 보면 내게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아서 피어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던 거다.
‘주먹이 피어를 이겼다.’
이것이 바로 인간 승리……는 아니고, 서로의 사정이 있었던 거다.
안 그래도 미안해서 병문안도 다녀왔다. 혼절해 있던 상태라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어쨌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알겠냐?”
내가 두 녀석을 향해 위협적으로 주먹을 흔들던 바로 그때였다.
“진 도우의 말이 맞네.”
듣는 것만으로도 깊은 현기(賢氣)가 느껴지는 목소리. 앞으로 나선 무당파의 현공진인이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설마 했는데, 이리 보게 되니 알겠네. 참으로 하늘이 내린 신령스러운 영물이로군.”
현공진인과 마찬가지로, 오늘 처음 수신룡을 목격하게 된 진위경도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인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더 큰 혈풍(血風)을 막았으니, 이 이무기야말로 신룡이라 부를 만한 존재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이토록 큰 은혜를 입었으니, 모두가 함께 그의 명복을 빌어 주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현공진인은 역시 도교의 성지인 무당파에서 깊은 도력을 쌓은 노 도사다웠다.
궁기방이나 혁무진과 같은, 일말의 고마움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 말종들과는 뿌리부터가 다른 것이다.
나는 원시천존에 대한 무한한 신앙심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합장했다.
“아멘.”
도교의 법문을 외고 있던 현공진인이 움찔하며 돌아섰다.
“아멘?”
“착각했습니다. 아미타불.”
“……따라 해 보게. 무량수불.”
“아, 죄송합니다. 무량수불.”
“훌륭하군. 원시천존께서 진 도우를 굽어보실 걸세.”
“아, 예.”
무당파에도 전도사가 있나.
종교 승리를 노리는 문명 유저처럼 흐뭇하게 웃어 보인 현공진인이 짧게 법문을 왼 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대, 신령스러운 이무기여. 부디 그곳에서는 창룡이 되어 하늘을 누비길 기원하겠소.”
“아아…….”
“역시 진인이십니다.”
어른의 사정이 있는 제갈풍과 진위경이 열심히 빨아 주자 현공진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 마땅한 도리를 했을 뿐이오. 그건 그렇고…….”
“예. 진인.”
저 노 도사의 입에서 무슨 현기 어린 말이 흘러나올까.
나를 포함한 모두가 경건하게 고개를 숙인 채 귀를 기울이던 그때였다.
“이제 뜯읍시다.”
“……?”
“그, 할 건 해야 하지 않겠소.”
“……!”
고개를 든 나는 볼 수 있었다.
현공진인의 눈에 이글거리는 병장기에 대한 탐욕과 열망을. 그리고 그의 눈동자로부터 전해지는, 들리지 않는 외침을.
‘나는 송문고검! 송문고검 한 자루 찜!’
이거 도사가 아니라 도라이였네.
잠시나마 믿었던 현공진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역시 무림인이란 종자들은 하나 같이 답 없는 새끼들이란 것을.
* * *
레이드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다.
레이드만큼이나, 아니 가끔은 그것보다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할 과정이 남아 있다.
‘부산물 분배, 최종 정산.’
결국 헌터도 밥 벌어먹자고 하는 짓이다.
연봉이 수십, 수백억에 달하는 상위 헌터 정도 되면 모를까. 하급 헌터들로 이루어진 레이드 파티에서는 몇만 원짜리 부산물에 얼굴 붉히고 싸우는 일이 부기지수였다. 그래서 계약서가 필수인 거고.
하물며 수신룡의 사체는 그 자체로 막대한 가치를 지닌 보물.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은 채 돌입한 레이드였으니 현대였다면 엄청난 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현대가 아닌 무림이고,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말로 하는 흥정보다는 몸으로 나누는 대화를 선호하는 육체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단어를 알고 있다.
‘호구.’
고개를 돌려 주위를 쓱 훑어보니 죄다 눈치만 보고 있다.
아니, 이 중에서 두 사람은 예외다.
그중 한 사람, 호북 제일의 거부라 할 수 있는 제갈세가의 가주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크흠.”
헛기침으로 운을 뗀 제갈풍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사안에 관해서는 본가가 양보할 수밖에 없겠구려. 제갈세가는 일 할만 가져갈 터이니 나머지는 다른 분들께서…….”
“동작 그만. 밑장 빼깁니까.”
“뭣이!”
제갈풍의 말을 자른 내가 피식 웃었다.
“일 할? 얼마나 큰일을 했다고 일 할씩이나 가져가십니까. 그렇게 날로 드시려고 하면 배탈 나요.”
“자, 자네…….”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제가 아무리 제갈 대협을 존중한다지만 이건 아니죠.”
한 것도 없는 주제에 일 할이라니, 어딜 감히 은근슬쩍 날강도 짓을 하려고.
내 서슬 퍼런 눈빛에 움찔한 제갈풍이 재차 입을 열었다.
“한 것이 없다? 우리 제갈세가가 제공한 정보가 아니었다면 자네는 눈뜬장님이나 다름없었을 터. 틀림없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혓바닥이 기시군요.”
“흡!”
“그 정보로 도출한 결론이 동정어옹이 범인이다! 아닙니까? 누워 계신 동정어옹께서 벌떡 일어나서 공중제비를 다섯 번 돈 다음 허공답보로 여기까지 뛰어오실 이야기를 하시네.”
“그, 그건…….”
순간 말문이 막힌 제갈풍을 향해, 다른 이들 중 유일하게 여유를 보이고 있던 또 다른 한 사람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과연, 태원진가를 현재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수완가다운 미소였다.
“제갈 대협. 제 아우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립니다.”
“크, 크흠!”
“전부 아우를 잘못 가르친 제 잘못입니다.”
“사실 말이 좀 심하긴 했소.”
“마음이 상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것 참,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괜찮소. 그래도 소가주와는 말이 통할 것 같으니 다행…….”
“아닙니다. 아주 혼쭐을 내줘야지요. 태경이, 너 이 녀석! 어서 사죄드리지 못할까!”
진위경이 내뱉은 쩌렁쩌렁한 호통에 나는 냉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말이 과했습니다.”
“아무리 제갈 대협께서 날로 먹으려 드셔도 그렇지,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아니, 잠깐. 잠깐만. 진 소가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제갈풍이 입을 열었지만, 진위경의 호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태경이 네가 수신룡을 쓰러트리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제갈 대협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명가의 가주이시자 무림의 존장이시란 말이다!”
“후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 이보시오. 소가주.”
“아무리 버릇없이 자랐다고는 하나, 너 같은 새파란 녀석이 무림에 위명이 쟁쟁하신 제갈 대협을 그런 철면피 취급하다니! 내 본가로 돌아가는 즉시……!”
“소가주우!”
절박하게 부르짖은 제갈풍이 질린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알겠소. 다 알겠으니 모쪼록 신경 좀 써 주시오.”
“음. 그럼 저희 형제의 사과를 받아 주시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제갈 대협!”
“아, 알겠다니까. 이제 두 사람 모두 그만합시다.”
“감사합니다. 일 할까지는 아니어도, 제갈세가에는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리지요.”
“개평은 국룰.”
“……후우.”
게임 끝. 요시 그란도 시즌.
순식간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제갈풍이 힘없이 나가떨어지자, 나와 진위경은 흐뭇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머리가 뛰어난 것으로는 죽었다가 깨나도 제갈풍을 따라잡을 수 없겠지만, 이런 종류의 협상은 책상머리에서 배울 수 없다.
‘이게 다 생활의 지혜지.’
정산 과정에서 고블린 독침 하나 더 받겠다고 지랄 발광을 떨던 나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아버지의 부재로 몇 년간 짬통에서 업무 신공을 익힌 진위경.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호구라면 우리는 타짜다.
‘활약한 비중을 봐도 내가 원톱이지.’
싸우는 자가 쟁취하는 법.
이건 물러설 수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되는 싸움이다.
상대가 그 누구라 할지라도 당당히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진정한 헌터이자 무림인이 될 수 있다.
– 일 할. 내놔라. 아니면 목을 내놓든가.
–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예외도 있는 법이다.
……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