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98
#497화
한 식경(食頃).
그것이 내가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었다. 목덜미로부터 느껴지는 검날의 서늘한 감촉에,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거지 같네, 진짜.”
스윽.
따끔한 통증과 함께 핏물이 목덜미를 타고 미끄러진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졌습니다. 그만하시죠.”
“틀렸다. 다시.”
싸우는 도중에는 들을 수 없었던 건조한 목소리. 그리고 나는 목소리의 주인이 원하는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죽었습니다. 됐어요?”
천천히 목덜미를 파고들던 검날이 우뚝 멈춘다. 이내 차가운 날붙이의 감촉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나는 목을 짚어 지혈한 뒤 돌아섰다.
어느새 삼 장 밖의 바위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네가 몇 번째 죽었는지는 알고 있나?”
“열두 번이요.”
사지 근맥이 잘려 죽은 경우가 다섯 번, 사혈(死穴)을 점혈 당하여 죽은 것이 세 번. 심장이 관통당한 것 역시 세 번. 그리고 조금 전에는 목이 베였다.
실제로 죽진 않았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옷소매로 목에 묻은 끈적한 핏물을 닦아 낸 나는 문경을 바라보았다.
“다음번에는 다를 겁니다.”
“열한 번째 듣는 말이로군.”
“이번엔 확실해요.”
“그건 열두 번째고.”
“…….”
기억력 보소. 할 말을 잃어버린 나를 향해 문경이 물었다.
“네놈이 왜 죽었는지 알고 있나?”
싸움은 언제나 결과를 남기고, 결과는 항상 생각을 낳는다.
말없이 머릿속으로 문경과의 싸움을 떠올리던 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살수처럼 싸워서?”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흠.”
나와 거의 동시에 말문을 열었던 문경이 말꼬리를 흐렸다.
“틀렸습니까?”
“계속해 봐라.”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따라 하게 되더라고요. 보여 주시는 움직임이나 그런 것들을.”
처음에는 독 장아찌가 될 정도로 당하고 나니 주위의 모든 것에 주의하게 됐고, 그 후부터는 문경의 움직임을 조금씩 베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에 두세 번씩 비무를 치르다 보니 점점 눈과 몸에 익어 갔다.
하지만…….
“그게 패착이었어요.”
“어째서지?”
“원래 새 신발을 신으면 발뒤꿈치가 까지는 법이죠. 그 신발이 발 크기보다 작으면 두말할 것도 없고.”
“더 자세히.”
“되지도 않는 어설픈 흉내는 집어치우고, 제 방식대로 싸웠어야 했습니다. 상대가 살성일 경우에는 더더욱.”
“…….”
한동안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문경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아주 천치는 아니로군.”
“오, 방금 그거 설마 칭찬하신 겁니까?”
“이제 겨우 기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요. 칭찬 감사합니다.”
문경이 미간을 찡그렸다.
“네놈은 귓구멍이 막혔느냐?”
“아뇨. 뚫렸는데요?”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군.”
“결국 기본이 됐다는 거니까 칭찬 맞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솔직하지 못하세요? 혹시 사춘기십니까?”
“아니라니까!”
“아니, 왜 갑자기 소리를 그렇게.”
“내가 언제! 아니라고!”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지만 말대꾸 한 번만 더 했다가는 목이 날아갈 기세다.
버럭 소리를 지른 문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하면서도 건조한 어조로 돌아왔다.
“기본은 말 그대로 기본일 뿐이다. 지금까지 그런 놈들은 네 녀석 말고도 여럿 있었지.”
그런 놈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제자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사천에서 만나지 않았더냐.”
“동 노인 말고요. 무슨 뜻인지 뻔히 아시면서 다른 소리 하시네.”
“…….”
침묵은 곧 긍정. 숨겨진 살성의 제자가 있다고 생각하자 호기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구, 누굽니까? 지금도 계속 연락 주고받고 그래요? 스승의 날에 다 같이 밥도 같이 먹고?”
“내가 대답해 줄 이유는 없지. 그리고 스승의 날이라니, 무슨 개소리냐?”
“까탈스럽게 구시긴.”
“……날이 갈수록 언행이 방자해지는군. 목숨이 다섯 개쯤 되나?”
“지금까지 열두 번 죽고 되살아난 것으로 봐서는 열세 개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진짜 안 알려 주실 겁니까?”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문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알려 주지. 단, 조건이 있다.”
살성의 제시하는 조건이라. 나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슬슬 밥 먹을 시간이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분명 먹고 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하루에 다섯 끼는 먹어서요.”
“그래도 듣고 가지. 상당히 궁금해하는 것 같던데.”
“각자 인생이 있고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 법인데, 그걸 뭐 하러 캐묻겠습니까. 그럼 전 이만.”
“딱 서라. 목 날아가기 싫으면.”
“…….”
시벌, 괜히 물어봤다.
나는 똥줄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반쯤 돌린 신형을 원위치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야기나 듣자.
“그래서, 정말 또 다른 제자들이 있는 겁니까?”
“제자는 아니지만, 가르침을 내린 놈들이라면 여럿 있었다.”
“이제는 없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실로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까.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리 없지.”
“혹시 그분들께서 몸담으셨던 분야가……?”
“살수였다. 나와 함께 살천문(殺天門)에 속해 있었던.”
살천문이라. 듣기만 해도 피비린내 솔솔 나는 이름이다.
‘이 인간, 사문도 있었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문경이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살수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살성이 소속된 문파였다면 상당히 알려진 이름일 텐데.’
지금까지의 기억을 샅샅이 뒤져 봐도, 살천문이라는 세 글자는 생소하다.
바로 그때, 내 의문을 알아차린 것처럼 문경이 입술을 뗐다.
“소용없다. 이미 오래전 사라진 곳이니.”
문파가 사라진다면 그건 한 가지 경우뿐이다.
나는 문경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멸문(滅門)?”
“그래.”
“도대체 어쩌다가? 아니, 그전에 본인이 문주 아니셨어요?”
“잘못된 길을 택했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렀지. 해 줄 말은 그뿐이다.”
말을 끝마친 문경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소검이 시퍼런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자. 이제 값을 치를 시간이로군.”
“예?”
“내 일검(一劍)을 피해 보아라. 그게 조건이다.”
보통은 도대체 그걸 어떻게 피해, 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 볼 만하다.
천하의 살성을 상대로, 그것도 어설픈 살수 흉내를 내면서 한 식경을 버텼는데 일검쯤이야.
“이거 피하면, 나중에 또 이야기 들려주실 겁니까?”
“물론.”
“좋습니다, 까짓거.”
문경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단, 눈을 감아라.”
“시발 거. 장난하십니까?”
“그렇다면 죽겠군. 열세 번째가 아니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경의 소매가 펄럭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익숙해진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었지만, 날아온 것은 암기가 아닌 또 다른 무언가였다.
‘저건.’
안력(眼力)을 극도로 끌어올려야 볼 수 있을 만큼 미세한 크기의 가루들.
때마침 내 쪽을 향해 불어오던 바람에 실려 날아온 가루가 공기에 닿는 바로 그 순간.
화악!
어둠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아니, 아니다. 어둠이 집어삼킨 것은 세상이 아닌 바로 나였다.
삐빅.
– [실명산]에 중독되셨습니다!
–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합니다!
– 빠른 해독이 필요합니다! 해독이 오래 지체되면 영구적인 손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귓가를 파고드는 시스템 알림과 함께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실명산? 독 따위는 상관없다. 아직 만독지환을 착용한 상태니까.
문제는 만독지환이 실명산을 해독하는 속도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에서 다가오는 문경의 일검이 훨씬 더 빠르다는 것이다.
스으윽.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느리게 흐르는 세상 속에서, 바람을 지우며 다가오는 살검(殺劍)을.
‘이건.’
고금제일의 살수가 펼친 한 수.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는, 몸서리칠 만큼 은밀하고 소름 끼치는 살기가 느껴진다.
나는 온통 암흑으로 가득한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숨 막히는 공간 속에서, 내 안의 모든 감각이 깨어남을 느꼈다.
서걱!
* * *
무당파, 제갈세가. 그리고 개방.
기밀을 위해 믿을 만한 정예들만을 선별했다고는 하나, 그들의 면면과 숫자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기백 명이 넘는 명문 대파의 무림인들 사이에서 소년 의생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오, 너로구나. 지금 나오는 길이냐?”
“진 공자님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근래 들어 더욱 자주 들르는 것 같은데?”
“예. 요즘 수련을 워낙 거칠게 하시는 통에, 자꾸 다치셔서요.”
“허어. 그렇구나. 진 대협도 참 대단하시지. 나이도 따지면 내 아들놈보다도 어린데, 지금의 경지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모습이…….”
“대단한 고수이신가 봐요. 저야 무림에 관한 일은 영 문외한이라.”
소년 의생, 문경의 순진무구한 한마디에 경계를 서고 있던 제갈세가의 무인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심심했기로서니 배운 것이라고는 의술밖에 없는 어린아이를 붙잡고 귀찮게 했다는 생각에서였다.
“대단하시지. 그렇고말고.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게다.”
“으음. 그런가요?”
“무림에 연관이 없다면 잘 모를 수도 있단다. 어쨌건 이제 오늘 수련은 마무리된 게냐?”
아무것도 모르는 양,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문경이 대답했다.
“아뇨. 앞으로 두 시진 동안은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알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 대협의 수련을 방해할 수는 없지. 다음 근무자들에게도 전달하도록 하마.”
“네. 그럼 고생하세요.”
예의 바르게 허리를 꾸벅 숙인 문경이 떠나려던 그때, 무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런, 수련이 생각보다 거친 모양이로구나.”
“예?”
“네 소매에 묻은 피 말이다. 진 대협께서 많이 다치셨느냐?”
뒤에 덧붙인 무인의 질문은 미처 한 사람의 귓가에 닿지 못했다.
말없이 혈흔이 묻은 자신의 소매를 바라보던 문경이 중얼거렸다.
“기본……인가.”
“응?”
“아, 별일 아닙니다. 진 공자님께서는 무탈하시니 걱정마세요.”
“어어. 그래. 알겠다.”
문경은 찜찜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무인을 뒤로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제법 익숙해진 얼굴들이 말을 걸고 알은체를 해 왔으나, 소년 의생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진태경. 진태경이라…….’
설마 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정말 마지막 일검을 피해 낼 줄은.
지난 며칠간의 시험과 오늘을 통해 얻은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아니, 상상 이상이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군.’
문경이 진태경에게 했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한때 그에게는 분명 제자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기본’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은 진실이 있다면, 바로 습득 기간이었다.
‘가장 빨리 통과한 놈이 일 년 남짓이었지, 아마.’
하지만 진태경은 해냈다. 그것도 불과 칠 주야 만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다.
그 이유가 천무지체여서, 초절정 고수라서인지는 몰라도 진태경이라는 놈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문경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예리한 무언가에 의해 베인 살갗과 그 위로 맺힌 핏방울이 눈에 들어오자,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제야 알겠군. 화왕의 마음을.’
하지만 문경은 알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