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99
#498화
길었던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린 순간,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아직도 해독이 안 됐나?’
온통 까맣게 물든 시야.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곧장 사그라들었다. 먹빛 하늘 위로 희미한 빛을 뿌리는 달을 확인한 나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바, 좀 깨워 주고 가든가.”
실명산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냥 날이 어두워진 것뿐이었다.
보아하니 정신을 잃은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대자로 뻗은 채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던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워낙 무의식중에 움직이기도 했고, 실명산에 중독된 채로 기절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보진 못했다. 나는 흙투성이인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보았다.
‘따로 다친 곳이 없는 걸 보면 분명히 막은 것 같긴 한데.’
결과는 짐작할 수 있지만 과정이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움직였더라? 곰곰이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려 해 봐도 온통 안개처럼 희끄무레했다.
대신,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띠링.
– 임무 : [문경]에게 인정받기 (완료)
– 돌발 퀘스트, [가짜 무림인]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퀘스트 완료 보상이 지급됩니다!
– 상당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1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 뛰어난 업적, [맹독 소믈리에]를 달성했습니다!
– 당신은 특별 제조된 십여 종류 이상의 맹독을 맛보고 해독했습니다. 당신의 튼튼한 몸뚱어리와 해독 능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 [독 저항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 놀라운 업적, [와, 이걸 사네]를 달성했습니다!
– 당신은 생사의 기로에서 새로운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 [기감]이 보다 날카로워집니다. 수련을 통해 더욱 높은 경지로 나아가십시오!
– 연계 퀘스트, [가짜 무림인-2단계]가 생성되었습니다!
– 연계 퀘스트의 임무는 [문경]의 향후 방침에 따라 결정됩니다!
– 악!
“…….”
악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동정호가 아니라 요단강을 건널 뻔한 나로서는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연계 퀘스트라니.’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라 해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1단계에서 눈 감고 살성의 일검을 피하라는데, 2단계에서는 도대체 무슨 개 같은 짓거리를 준비해 놨을까. 그나마 보상이 짭짤하다는 것이 한 줄기 위안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몸으로 때운 보람은 있는 건가.’
비록 레벨 업은 못 했지만 상당량의 경험치를 얻었고, 칠보추혼산에 중독되며 잃었던 포인트도 복구했다.
그리고…….
‘업적 달성 제목 어떤 새끼가 지었냐.’
[맹독 소믈리에]와 [와, 이걸 사네].이번에 달성한 이 두 가지 업적은 심히 불쾌한 제목과는 별개로 제법 괜찮은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자를 통해 얻은 독 저항력은 말할 것도 없이 땡큐고, 후자는 지금 당장은 조금 애매해 보일지 몰라도 큰 선물이다.
‘깨달음의 실마리.’
근래 들어 벽을 느끼고 있던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다. 물론 열화문의 초절정 무공에, 분기별로 영약까지 든든하게 처먹으며 초고속으로 성장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무림 공적 취급받기 딱 좋겠지만.
‘그래도 막힌 건 막힌 거니까.’
이류, 삼류의 경지에 머무르는 무림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무공 비급과 영약이라 말한다. 그러나 절정 혹은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들의 대답은 다르다.
‘깨달음.’
십 년, 이십 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을 기다려도 쉽게 찾아오지 않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익히고 영약을 섭취한다고 해도 올라갈 수 있는 경지에는 한계가 있다.
영약 처먹는다고 초절정 고수 되고, 반로환동하면 누가 피땀 흘려 수련을 하겠나. 분명한 한계로 인해 벽을 넘지 못하니까 그저 죽어라 수련에 매달리는 거다.
일전에 궁기방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심상(心想)의 영역을 넓혀 깨달음을 얻겠답시고 아편을 복용하는 무림인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왜 그딴 걸 하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그 작자들도 알아. 이대로라면 아편에 중독되리라는 걸.’
‘아는 놈들이 왜 그래?’
‘무림인이니까.’
짧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한마디.
무림인은 그런 생물이다. 더 강해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종자들. 아편이라는 마약보다 무공에 취했고, 힘에 중독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더, 더 강해지고 싶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을 만큼 많은 것을 갖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여타의 무림인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나는 무언가를 얻고자가 아닌 지키기 위해 강해지려 한다는 점이다.
‘현재에 만족했다면 문경의 수련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겠지.’
그런 의미에서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었다는 건 엄청난 성과다.
단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의사 선생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가 정확히 뭘 했는지조차 모른다는 거다. 개 같은 거.
아니, 진짜 어떻게 한 거지?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 같긴 한데, 그 후를 모르겠다.
‘수련을 계속하다 보면 알 수 있으려나.’
당시의 감각을 떠올리려고 노력해 봤지만 당장은 안개를 헤매는 것처럼 허망하기만 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있던 그때였다.
쉬이익, 펑!
저 멀리, 검게 물든 하늘 위로 솟구친 한 줄기 푸른 불꽃이 화려하게 폭발했다.
‘신호용 폭죽?’
무슨 일인가 싶어 수련 장소를 빠르게 벗어나자, 경계를 서고 있던 무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진 대협. 이제야 나오셨군요.”
누덕누덕 기운 옷차림에 허리에 매달린 두 개의 매듭. 호북 분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 개방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색이 푸른 걸 보니 방문객입니다. 미리 들어서 알고 있긴 했는데, 생각보다 늦었군요.”
“방문객?”
아니, 여기가 무슨 관광 명소도 아니고.
워낙 기밀로 취급하다 보니 찾아올 만한 사람이라고 해 봐야 선뜻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기껏해야 이곳에 모인 세 문파, 그리고 관부 정도인데. 인력 충원이라면 굳이 방문객이라고 표현할 리는 없고.
“어디에서 온 건데요? 제갈세가? 아니면 무당파? 아, 거기 장문인께서 드디어 오신 건가.”
“예?”
개방도를 비롯한 무인들이 별 희한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음. 못 들으셨습니까?”
“뭘요?”
“지금 오고 있는 방문객 말입니다.”
“그게 무슨……. 혹시 제가 아는 사람들이에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개방도가 대답했다.
“예. 태원진가니까요.”
“……어?”
어디라고?
* * *
철벅! 처처척!
절도 있는 발걸음이 하늘 위의 달을 비추는 강물을 밟고, 모래 위로 새로운 발자국들을 찍어 나간다.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인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좌우로 도열하자, 그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 한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와 더욱 늘어난 흉터. 나는 일 년 만에 마주한 낯익은 얼굴을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얼굴이 더 살벌해지셨네. 이 정도면 귀검(鬼劍)이 아니라 귀면(鬼面)이라고 해도 되겠어요.”
“손봐야 할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본가의 발이 넓어지니 별의별 놈들이 꼬이더군요.”
“누군지 말만 하세요. 제가 손봐 주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손쓸 수도 없는 곳으로 떠났으니. 그리고…….”
가늘게 뜬 눈에는 웃음이,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감회와 기쁨이 묻어 나왔다.
“고작 소, 돼지를 잡는 일에 신룡(神龍)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귀검 위팽. 진위경의 오른팔이자 한때 내 참교육 담당이었던 그가 나를 향해 깊이 포권을 취했다.
“대태원진가 진룡대주 위팽.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거대한 외침이 깊은 밤의 적막을 터트리며 울려 퍼졌다. 좌우로 철탑처럼 늘어선 무인들의 전신으로부터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하나같이 가슴에 수실로 새겨 넣은 진룡(進龍)이라는 두 글자처럼.
‘이야, 태원진가 언제 이렇게 컸냐.’
항산검문과의 전쟁에서 턱없이 부족한 일류 고수의 숫자 때문에 머리 맞대고 좆 됐다를 중얼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당장 이 자리에 모인 진룡대의 무인들만 봐도 최소가 일류 고수다.
‘보고만 있어도 뽕 찬다. 뽕이 차.’
가주의 장기 부재, 극심한 인력난, 집보다 기루를 더 좋아하는 삼공자와 기타 등등의 문제로 천천히 몰락해 가던 태원진가가 떡상한 것을 보니 절로 가슴이 벅차 온다.
‘이 맛에 가문 키우는 건가.’
그저 흐뭇하게 위팽과 진룡대를 바라보던 바로 그 순간, 위팽의 등 뒤로 산통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씨, 깜짝이야. 밤중에 왜 이렇게들 소리를 지르고 그러시오? 나처럼 심장 약한 늙은이가 놀라서 급사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마 그럴 일은 없어 보이는데.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우람한 근육을 지닌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나는, 마침내 옛 기억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절대 태보해?”
전(前) 철기방주. 장태보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저, 말하는 싸가지 보게. 내가 네놈 친구냐!”
일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위상을 쌓아 올린 나지만, 노빠꾸 장인인 장태보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였다.
나 역시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더 정이 가고 반가웠다. 게다가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준 백염(白炎) 덕분에 여러 번 목숨을 건지기도 했으니까.
“아니, 어르신이 여기 웬일이십니까?”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장태보의 입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내가 특별히 청하여 모셨다.”
태원진가의 도착 소식을 듣고 급히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좌우로 갈라졌다. 인의 장막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한 사람의 모습에, 조금 전보다 더욱 큰 외침이 울려 퍼졌다.
“대태원진가 진룡대주 위팽. 주군께 인사 올립니다.”
“충(忠)!”
“그만.”
다른 때였다면 위팽 손부터 붙잡고 왈츠를 췄겠지만 지금은 수많은 시선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진중하면서도 위엄 있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은 진위경이 묵직한 중저음으로 말을 이었다.
“진룡대주. 그리고 장 노야. 오느라 고생 많았네.”
“아닙니다. 주군.”
“이 늙은이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소가주.”
위팽이야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심복이고, 나한테는 이놈 저놈 하는 장태보도 진위경에게만큼은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다. 이미 한참 전에 은퇴했다더니, 못 본 사이 태원진가에서 하청이라도 받고 있나?
내 의문을 뒤로하고 진위경이 재차 입을 열었다.
“오는 길이 고단했을 터, 우선 다 같이 자리를 옮깁시다.”
저 ‘다 같이’에 내가 포함되어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기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놈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진룡대 부대주 혁무진! 지금 막 경계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
경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거짓말을 칠 거면 눈곱부터 떼고 와, 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