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0
#49화
이른 아침.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띠링.
– [수면 모드]를 종료합니다.
시스템 알림과 동시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다행이다. 모든 게 꿈이 아니어서.
고작 하루였지만 어제는 내 인생이 바뀐 날이었다. F급 헌터 진태경으로 눈을 떴다면 현실이 악몽처럼 느껴졌겠지.
부스럭거리며 일어난 그때였다.
– 상태 이상, [숙취]에 걸렸습니다.
“윽.”
어젯밤의 후폭풍이 장난이 아니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 매트리스 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시스템이 알려 준 바에 의하면 운기조식의 기능 중에는 해독도 있었다.
– [운기조식]을 시작합니다.
진가심법의 구결에 따라 공력을 인도했다. 운기조식을 시작함과 동시에 두통이 옅어졌고, 10분 정도가 지나자 기다리던 메시지가 떴다.
– [숙취]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도중에 갑자기 마무리 지으면 운기조식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에서의 경험이지.’
마침내 가부좌를 푼 것은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머리는 맑았고 몸에는 활력이 넘친다.
문제는…….
‘왜 이렇게 들어오는 기운이 적지?’
외부의 기를 받아들여 내부에 저장, 순환시켜야 공력이 증가한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첫 운기조식은 이상할 정도로 그 기운이 적었다.
‘게다가 탁하기까지.’
비유하자면 양도 적고 맛도 없는 음식인데, 그마저도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셈이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환경 오염 문제인가?’
자연의 순수한 기를 바탕으로 한 공력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무림과 비교하자면 현대 사회의 자연환경은 심각한 수준이니까.
‘아니면 장소가 문제일지도.’
지어진 지 수십 년이 넘은 고시원 원룸이 딱히 자연 친화적인 장소는 아니지. 냄새도 구리고, 시설도 낡았다.
진호 형은 고시원 총무인 주제에 항상 이곳의 정체를 의심했다.
‘고문실 아니었을까. 대격변 때 몬스터 잡아와서 나이프로 불알 툭툭 치면서 마왕 어딨냐, 하면 마왕 부모님 위치까지 불었을 것 같은데.’
……상상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지금쯤이면 자고 있겠지?’
오전에 일어나는 걸 수치로 여기는 인간이니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아침이라도 먹으러 갈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지이잉.
핸드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 명품충
명품충
시간 괜찮으십니까?
발신인은 명품충, 아니 최 팀장이었다.
* * *
번쩍이는 샹들리에. 맵시 있게 차려입은 사람들과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
약속 장소는 카페인지, 고급 레스토랑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곳이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시바, 여긴 웨이터도 연예인 수준이네. 모델 비율에 얼굴은 잘생긴 그리스 신 같다.
‘다들 이렇게 게이가 되는 건가.’
정체성 혼란을 느끼는 나와는 달리 최 팀장은 여유롭게 주문을 시작했다.
“블랙 아이보리 한 잔 주시고. 태경 씨는요?”
그리스 신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왠지 카라멜 마끼아또 달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이 느낌.
“같은 걸로 주세요.”
잠시 후 나온 커피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좋은데요. 이게 블랙…… 뭐라고요?”
“블랙 아이보리.”
사실 들어도 뭐가 뭔지 모른다.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나는 솔직한 감상을 중얼거렸다.
“비싸 보이네요. 원두 좋은 거 쓰나?”
“코끼리 똥이에요.”
“아.”
나는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놨다. 최 팀장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뜬금없는 축하 인사였지만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전날의 등급 재측정 결과를 말하고 있었다.
“빠르시네요. 개인 정보라 협회에서도 전부 오픈하지는 않았을 텐데.”
“C급 재각성자는 드무니까요. 게다가 어제 그 모습을 직접 봤는데 모를 수가 없죠.”
그것도 그러네.
수긍하는 내게 최 팀장이 뭔가를 내밀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봉투 한 장.
“이게 뭡니까?”
“보시면 압니다.”
설마, 돈?
나는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수표 대신 깨알처럼 박힌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계약서군요.”
“저희 길드가 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건입니다. 한 번 읽어 보시죠.”
안 그래도 이미 읽고 있다. 첫 줄부터 마지막까지. 조항마다 놀라움의 연속이다.
“C급 계약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이 바닥에서 7년쯤 굴렀더니 본 것도, 주워들은 것도 많다.
그런 나도 이 정도로 후한 계약서는 처음 본다.
“B급 중에서도 괜찮은 조건이니까요.”
“그런데 왜 저한테…….”
“저를 믿으니까요.”
“네?”
“제 촉을 믿고, 사람 보는 눈을 믿습니다. 그래서 진태경 씨를 꼭 잡고 싶어요.”
최 팀장이 빈 커피잔을 내려놨다.
“계약, 하시겠습니까?”
솔직히 흔들린다. 그것도 아주 많이.
계약 조건을 떠나 누군가가 나를 알아봤고, 이렇게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그래서 오늘의 망설임은 어제보다 길었다. 마침내 결정을 내렸을 때는 커피가 식은 후였다.
“죄송합니다.”
이유는 어제와 같았다.
계약서에 따르면 최소 1년간 소속 헌터로 활동해야 한다.
제의는 고맙지만…… 나로서는 성급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이미 계약하신 겁니까? 아니면 예정이라도?”
“아뇨. 단지 시간이 더 필요해서요.”
“시간이라.”
최 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건네려던 그때.
“두 번째 제안입니다.”
“예?”
최 팀장의 품속에서 또 다른 봉투가 나왔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가계약?”
“어떤 건지는 대충 아시죠?”
알지. 잘 알지.
인력 사무소가 일일 근로자라면 길드와의 가계약은 비정규직이다. 짧은 기간 동안 길드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일종의 용병인 셈이다.
“이것까지 거절하시지는 않겠죠?”
앞서 받은 정식 계약서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후하기는 마찬가지다. 거기에 내게 가장 중요한 계약 기간은 텅 빈 공란.
“원하는 기간을 적으세요.”
“아, 네.”
최 팀장이 내미는 펜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7일을 적어 넣었다. 일주일이면 시스템이 유지되는지 지켜보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사인까지 마치자 최 팀장이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제가 할 말이죠.”
굳게 손을 맞잡으니 C급 헌터로 첫발을 내디뎠다는 게 실감이 났다.
‘비록 가계약이지만.’
가슴이 벅찼다.
“내일부터 출근하면 되나요?”
“아뇨.”
최 팀장이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지금부터.”
* * *
부우웅.
최 팀장의 차는 커다란 군용 차량이었다. 고가의 슈퍼카를 모을 것 같은 이미지라 의외다 싶었는데, 게이트에 도착한 후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고르세요.”
“뭘요?”
“장비.”
최 팀장이 작은 버튼을 누르자 성인 남성 다섯 명이 누워도 될 만한 트렁크가 나타났다.
“작업용으로 개조했어요. 집에 놔두기도 뭐해서.”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트렁크 안을 구경했다.
‘와, 미쳤다.’
적어도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장비들이 차곡차곡 분류되어 있었다. 방어구에 무기는 기본이요. 각종 포션과 비싸서 못 쓴다는 일회용 마법 스크롤까지 없는 게 없다.
“……이게 다 팀장님 거예요?”
“일단은요. 선물 받은 것도 있고, 예뻐서 산 것도 있고.”
그렇구나. 장비가 예뻐서 사는구나.
‘돈이 얼마나 많아야 저런 마인드가 되는 거냐.’
C급 헌터가 잘 벌긴 하지만 최 팀장의 씀씀이는 이미 그 이상이다. 원래 돈 걱정 안 하고 살 만큼 부자인 거겠지.
꿀꺽.
“그냥 대여소에서 빌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괜히 빌렸다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좀.”
“유행 지난 거라 상관없어요.”
그렇구나. 장비 디자인 유행도 따지는구나.
나는 그쯤에서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장비를 골랐다.
시스템이 있으니 장비 고르는 것도 쉬웠다.
‘아이템 확인.’
띠링.
아이템창
[리자드맨 사냥꾼의 가죽 세트]종류 : 방어구
등급 : 일류
제한 : 無
설명 : 리자드맨의 가죽을 통으로 벗겨 제작했다.
전 세트 장착 시 [비늘 갑옷] 발동.
‘이거 괜찮네.’
무게도 가볍고, 가죽은 질기면서 단단했다.
모두 장착하자 [비늘 갑옷]의 세트 효과가 발동되었다.
“오.”
가죽 위로 솟아난 녹색 비늘이 온몸을 촘촘하게 뒤덮는다. 그런 내 모습에 최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거 고르셨네요. 안목이 좋으신데요.”
시스템이 좋은 거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무기를 뒤적거렸다. 생각해 보면 최 팀장 이 인간, 검 쓰는 것밖에 못 봤는데 트렁크 안의 무기만 해도 다섯 종류가 넘어간다.
‘손때도 묻어 있고.’
스스로에게 맞는 걸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잠시 후, 내 손에는 창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아이템창
[리자드맨 학살자의 작살]종류 : 무기
등급 : 일류
제한 : 無
설명 : 공격 성공 시 높은 확률로 [출혈] 발동
누가 보면 리자드 성애자인 줄 알겠다. 창을 마지막으로 장비 선택이 끝나자 최 팀장이 피식 웃었다.
“왜 그러세요?”
“일이 잘 풀린다 싶어서요.”
“예?”
“곧 알게 될 겁니다.”
뭔 소린가 싶었지만 일단 최 팀장을 따라 게이트 앞으로 갔다. 관리청 직원 대신 웬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오셨습니까.”
깍듯한 90도 인사. 더 놀라운 건 그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최 팀장의 태도다.
“게이트 상황은요?”
“예. 어제 연락받고 출입 통제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아닙니다. 도련님.”
도련님이란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을 높여 이르거나 부르는 말인데, 일단 저 남자가 최 팀장의 형수일 리는 없고…….
‘최 팀장. 부잣집 도련님이었구나.’
어쩐지.
위아래로 명품 장비 쫙 빼입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거기에 장비 디자인까지 따지는 패션피플, 어지간한 금수저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지.
‘저 인간은 다 가졌네.’
그 다 가진 인간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 들어갑시다.”
“지금 당장이요?”
“장비도 해결됐고,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너무 당연하다는 말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최 팀장. 그리고 낯선 아저씨까지. 셋이 전부다.
“다른 팀원은요?”
“여기 있잖습니까. 팀원.”
“아, 그렇구나. 저분도 들어가시는 거죠?”
아저씨가 묵직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전 아닙니다.”
“그럼……?”
“우리 둘이 전붑니다. 추가 인원은 없어요.”
최 팀장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없어요?”
“네.”
“한 사람도?”
“개 한 마리 안 데려갑니다.”
단호한 거 보소. 포청천인 줄.
“그럼 단둘이서 게이트를 돈다고요?”
“못 할 거 있습니까? 고작 D급 게이트인데.”
“저 D급 게이트 처음인데요.”
“전 많이 다녀 봤습니다.”
아니, 시발…….
D급 게이트가 무슨 동네 할인 마트도 아니고.
“단둘뿐이라면 빠지겠습니다.”
D급 게이트라면 동일 등급의 헌터 열 명이 팀을 짜야 안전한 레이드를 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고, 무공을 익혔다지만 그걸로 모든 위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진태경 씨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압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죠.”
최 팀장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도 재각성 헌터입니다.”
“재각성이요? 팀장님은 C급으로 알고 있는데…….”
“C급은 처음 측정 당시 나온 등급이죠. 재각성은 그 후의 일이었고.”
말인즉슨 최소 B급 이상의 실력자라는 뜻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 이상일 수도 있고.
‘B급 헌터라.’
그렇다면 말이 달라진다. 단둘뿐이니 그만큼 내게 떨어지는 액수도 늘어날 테고.
“돌아가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저야 혼자 들어가도 되니까요. 그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혼자 D급 게이트를 수시로 드나들어?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부터는 E급으로 알아보죠.”
그 말이 결정타였다.
나는 돌아서는 그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최 팀장님.”
“네.”
“레이드가…… 하고 싶어요.”
최 팀장이 따스하게 웃었다.
“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