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02
#501화
“언젭니까?”
제갈풍과 헤어진 후 돌아가는 길, 내가 불현듯 던진 물음에 진위경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달포 후. 하남성 숭산(嵩山).”
“숭산…….”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가 위치한 바로 그곳이다.
불과 석 달 전. 천하 무림의 대연회라 할 수 있는 성라대연(星羅大宴)이 시작되고 암천에 의해 피바람이 불어닥친 그 자리에, 신(新) 무림맹이 탄생하는 것이다.
숭산이라는 장소. 그리고 소림사가 지닌 상징성을 생각해 본다면, 장장 오십여 년 만에 부활하는 무림맹의 출발선으로는 적격인 셈이다.
그나저나 겨우 달포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이미 정해져 있었군요. 사천에 오셨을 때부터.”
그러나 내 예상과는 반대로, 진위경은 작게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아닙니까?”
“위팽이 왜 때마침 하남에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위 대협이 온 이유가…….”
“진룡대는 본가 제일의 정예다. 그중 절반이나 되는 인원을 고작 짐꾼으로 쓰기 위해 불러오는 것은 소가주로서 허락하지 않는다. 설령 옮기고자 하는 것이 천자의 옥새(玉璽)라 해도.”
“예상보다 앞당겨진 거군요.”
“암천의 행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칠고 빨랐다. 사천혈사가 결정적이었지.”
앞서가는 적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뛰어야 한다.
소림사에 휘몰아친 피바람은 사천으로 나아갔고, 이제는 호북에까지 이르렀다. 하남의 수뇌부는 선택해야 했다.
“천하 무림을 한 울타리에 묶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분들께서도 마침내 결심을 내린 듯싶구나.”
조용한 목소리로 뇌까린 진위경이 품에서 봉첩(封牒)을 꺼내 내밀었다.
“이건.”
“위팽이 하남에서 가져온 서신이다.”
“하남이라면, 역시 무림맹에서 보낸 겁니까?”
“짐작하고 있었구나.”
“그럴 것 같더라고요. 아까 제갈 대협한테 주는 거 보고 알았어요.”
척 봐도 보통의 서신과는 외관부터가 다르다.
하지만 이 서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겉면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적힌 무림맹(武林盟)이라는 세 글자였다.
“막내 너도 직접 읽어 보거라.”
“이미 읽고 있으니까 말 시키지 마세요. 집중 안 돼요.”
“……아앗, 으응.”
나는 시무룩해하는 진위경을 뒤로하고 펼친 서신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천하 무림에 고하노라,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서신의 내용은 짧고 강렬했다. 그래서인지 세 줄 요약도 쉬웠다.
1. 야야, 암천 썰 푼다. 이거 진짜 미친놈들이니까 잘 들어 봐.
2. 정마대전 PTSD 알지? 이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자.
3. 숭산 어딘지 모르는 호구 없재? 몇 월 며칠까지 모여라. 안 오는 새끼 암천.
“…….”
세 줄 요약해 놓고 보니까 되게 없어 보이네.
당연하지만, 서신에 이렇게 쓰여 있지는 않았다.
누군지 모르는 서예가가 거침없이 써 내려간 필체는 구름 같았고, 문장 하나하나와 그에 담긴 감정은 장엄하며 심금을 울렸다.
개인적으로 암천의 천주라는 놈에게 보여 주고 싶을 정도다.
‘이거 보면 천주도 무림맹 가입하겠다.’
천주가 무림맹에 가입하면 모두가 행복한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 텐데, 그럴 가능성이 혁무진 귓밥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건, 이제 곧 무림맹이 탄생하겠군요.”
“달포 뒤. 천하 무림이 무림맹의 깃발 아래 모일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진위경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천하 무림이 아니라, 중원의 정파 무림이라고 해야겠군.”
진위경이 덧붙인 저 말의 의미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확실히…… 정파가 천하 무림 그 자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작금 천하 무림의 패자는 두말할 것 없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위시한 정파다.
그러나 과거 정마대전에서 살아남아 승자가 된 것은 정파뿐만이 아니었다.
“사파(邪派).”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진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천하라는 어항에는 한 색깔의 물고기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정파에 비하면 미력하나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한 사파가 있고, 밤거리를 지배하는 흑도가 포함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사마외도 척결을 부르짖으면서 왜 저런 놈들을 남겨 뒀나 했는데.’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 사파 세력은 정마대전 당시 정파의 편에 섰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선택이 단순한 선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현존하는 중원의 사파 세력이 왜 정파 무림의 편에 섰는지, 혹 알고 있느냐?”
“제가 지난 일 년 사이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잊으신 건 아니죠?”
“적 대협께서 말씀해 주셨구나.”
“이것저것 많이 주워들었죠.”
옛말에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라고 했다.
정마대전 당시 마교가 청해를 넘어 중원을 향해 들이닥치자, 사파는 교주님 만세를 부르짖으며 재빨리 합류했다.
그만큼 마교의 기세가 엄청난 것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동류라 할 수 있는 마교가 천하 무림의 주인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중원(中元)에 자리 잡고 있던 사파 무림인들은 사정이 달랐다.
‘정파에 안 붙으면 당장 중원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척살 당할 텐데, 제깟 놈들이 이쪽에 안 붙고 배겨?’
언젠가 적천강이 코웃음 치며 했던 그 말은 당시 중원의 사파인들에게 정확히 해당되는 현실이었다.
“거의 울며 만두 먹기 식이었다고 하던데요.”
“나 역시 그 시대에 살았던 건 아니지만,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사실이다.”
“확인?”
“네가 사천에 떠난 뒤 하남에 남아 옛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수많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파에 관련된 기록도 그중 하나였고.”
평화가 찾아오자 무림맹은 해산되었지만, 정마대전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과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담은 기록은 남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장구한 무림의 역사에서 오십여 년이라는 시간은 ‘고작’ 반세기에 불과하니까.
“기록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요?”
“어떨 것 같으냐?”
“어느 정도 예상이 되긴 하네요. 들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적 대협께서 네게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해 주셨는지는 모르나, 아마 대부분 사실일 것이다.”
“……그게 사실이면 좀 골 때리는데.”
정마대전의 시작과 동시에 중후반에 접어들기까지, 정파에 합류한 사파 무림인들은 끊임없는 배신을 반복했다.
당시 무림맹 수뇌부가 정파 내부의 사파를 모조리 뽑아내는 삭초제근(削草除根)까지 논의했다는 적천강의 말을 생각하면 심각한 수준이었던 건 확실해 보인다.
“그래도 나중에는 열심히 싸웠다면서요?”
“처음과 달리 승패를 알 수 없게 되었으니까. 천면호리 송 대협이 이끄는 은영각(隱影閣)의 철통같은 감시도 있었고, 수뇌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사파 무림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꼬리를 잘라 냈다는 기록이 있다.”
정파라고 무조건 정의로운 것은 아니고, 사파라고 아주 악질들만 모여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파와 달리 사파는 스스럼없이 꼬리를 잘라 낼 수 있는 행동력과 잔혹함이 있었다.
마교의 간자라고 의심이 가는 순간 가차 없이 멱부터 따고 본 것이다.
“결국 꼬리를 잘라 낸 몸통은 살아남았고, 정파에 협조하여 승자가 되었지.”
사파의 잔존 세력은 그렇게 정파라는 거목의 그늘서 명맥을 이어 갈 수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전과 같은 위세를 과시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이미지가 지저분한데 마교에 붙어먹은 전력이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무림맹 수뇌부 측에서 어느 정도 공로와 권리를 인정해 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사마외도를 부르짖는 골수 의협들에게 끌려나가 오체분시 당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종전 후에 사파를 향했던 혐오의 시선은 유구한 전통처럼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크게 문제 될 게 없었지만, 지금부터는 얘기가 다르다.
“걔들도 함께 데리고 싸워야 하잖아요.”
“그래. 무림맹이 아니라면 암천의 편에 설 테니까.”
“품에 안자니 찝찝한데요.”
“전장에서 등을 맡기기에는 싫은 상대지. 전례도 있거니와 종전 후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이 수십 년간 쌓여 있을 테니까.”
“차라리 중립을 지키라고 한다면…….”
“만약 무림맹이 패색이 짙다고 치자. 막내 네가 사파의 무림인이라면 어쩌겠느냐?”
“……음.”
저렇게 대놓고 물어보니까 뭐라 할 말이 없네. 입맛을 다신 내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런 말 하긴 뭐한데, 암천에 붙어야죠.”
“이유는?”
“무림맹이 이기면 본전이지만, 말하신 대로면 이미 승부의 저울은 기울었고 암천이 중원 무림의 주인이 될 상황이잖아요.”
“그렇지.”
“암천이 어떤 놈들인데 사파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중립 지켰다고 칭찬하는 것보다 중요할 때 안 도왔으니 괘씸하다며 싸그리 죽여 버릴 놈들이죠.”
“정확히 맞췄다. 그래서 사파가 계륵(鷄肋)인 것이다.”
계륵. 상당히 적절한 표현이다.
별로 득이 되진 않지만, 버리기에는 아깝다. 함께 싸우자니 찝찝하고 버리면 암천이 고스란히 주워 이쪽을 향해 던질 것이다.
닭 뼈가 아무리 말랑해도 결국 뼈. 맞게 되면 제법 아프겠지.
그렇다면 결국…….
“하남에서도 이미 그쪽으로 서신을 보냈겠군요.”
진위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다. 굳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사파 무림은 반드시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 해.”
사파는 계륵치고는 살점이 많이 붙어 있는 편이다.
당장 해 떨어지면 뒷골목에 어슬렁거리는 흑도 칼잡이들도 사파에 속하는데, 지금은 삼류 칼잡이 하나가 아쉬울 때 아닌가.
무엇보다 가까이 두고 목줄을 잡아채는 게 낫지, 아예 암천에 붙는 건 너무 큰 손해…….
‘그런데 잠깐. 흑도?’
나는 문득 떠오른 기억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느냐?”
“아니, 얼마 전에 들은 게 기억나서요. 이번 수신룡에 관한 일로 호북성의 흑도를 흉수로 몰아서 싹 날려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럼 사파 애들이 기분 나빠할 것 같은데요. 결국 우리가 관부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자기네 식구 족친 거잖아요.”
그림이 좋지 않다. 어쩌면 이번 일로 사파가 무림맹에서 보낸 입맹(入盟) 제안을 거부할 수도 있을 만큼.
그러나 진위경의 안색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두 가지가 틀렸다.”
“예?”
“첫째. 종전 이후 사파 무림은 사분오열된 상태다. 식구가 아니라, 오히려 경쟁자라고 봐야 옳겠지. 우리는 이번 일을 기회 삼아 유난히도 숫자가 많던 호북의 흑도를 뿌리 뽑았고, 빈자리는 또 다른 사파가 채울 것이다. 새로운 기회지.”
“……!”
“충분한 먹이를 주었으니 그들은 만족할 게다. 또한 호북의 일을 전해 들으며 깨닫겠지. 이건 경고라는 것을.”
먹이를 던져 주고,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목줄을 채웠다.
그것이 무림맹이 사파 무림이라는 사냥개를 길들이는 방식이다.
“그리고 둘째. 관부가 제안하고,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진위경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아니, 내가 먼저 제안했다.”
“아.”
“관부는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 차이는 아주 크지.”
“……관부가 그렇게 쉽게 말입니까?”
“호북성의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는 한 성을 좌우할 수 있는 요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포정사사가 산서성 육조참정을 지냈다는 사실만 알 뿐, 상산왕의 숨겨진 충복이라는 것까진 알지 못하더구나.”
문득 처음 호북성에 도착했을 때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사람들의 적의 어린 시선. 그리고 관병을 이끌고 나루터를 포위한 관리를 향해 묻던 진위경의 모습.
‘아, 그건 그렇고 이 가에 홍천이라는 함자를 쓰시는 분을 알고 계시오?’
‘그, 그분은 얼마 전에 새로 부임하신 포정사사신데. 혹시 포정사사님과 어떤 관계이신……?’
‘몇 번 만나 뵙고 술 한두 잔 했지. 필요할 때 도움도 드렸고.’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진위경의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서늘한 칼날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건 책사이자 정객(政客)의 눈빛이었고, 알아채기 무섭게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걱정 말거라. 모든 것이 잘될 테니.”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서 힘이 느껴진다. 그런 진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불쑥 입을 열었다.
“가주…… 아니,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진위경의 입가에 맺혀 있던 희미한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니, 분위기 좋았는데 그 인간 이야기는 왜?”
“아시다시피 제가 그때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기억이 잘 안 나길래.”
“기억할 필요 없다! 그냥 머릿속에서 지워! 내가 네 애비다!”
“…….”
익히 알고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쌓인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모양이다.
진위경은 지난날의 서류 지옥을 떠올렸는지 주먹까지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느냐?”
“그냥. 아버지가 사라지고 형님이 가문을 맡은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막내야. 부디 선 넘지 말거라.”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돌아섰다.
형이 말하는데 어딜 가냐고, 애정이 식었냐고 묻는 진위경의 물음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달포 뒤라면서요. 떠날 준비 하러 갑니다.”
이제는 호북에서의 일을 뒤로하고 떠나야 할 때였다.
나와 함께하는,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은 이들과 함께.
“이 정도면 시간은 충분히 드린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주위의 소음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는 까마득한 높이의 절벽을 바라보며 턱을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