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04
#503화
세월이 내린 저주.
노환(老患).
문경은 조용히 그 단어를 혀끝에서 굴렸다.
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지만 텁텁하고 씁쓸하다. 이어지는 적천강의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떠날 생각일세. 구화산에서 심신을 가다듬을 생각이야.”
“……!”
“자네라면 그 이유를 모를 리 없을 터. 부디 말리지 말게.”
적천강의 말처럼, 문경은 그가 떠나려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짐이 되기 두려운 거겠지.’
앞으로도 노환은 시시때때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에 정신이 흐려진다면, 적천강과 함께하던 이들은 큰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적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화왕 적천강이지, 사는 곳과 이름도 기억 못 하는 늙은이가 아니니까.
‘더 정확히는, 제자가 위험해질까 염려하는 것일 테고.’
누구에게나 잃어버리면 안 되는 소중한 것이 있다.
저잣거리에서 동냥하는 거지에게는 반쯤 으깨진 만두 하나가 목숨이고, 문무백관을 거느린 황제에게는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옥새가 일천, 일만의 백성보다 소중하다.
진태경이라는 어린 청년 역시 적천강에게 그러한 존재였다.
자신의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잃어버릴 수 없는 소중한 존재.
“어지간히 제자를 아끼는군.”
“제자라, 제자.”
“이번에도 지난번 같은 헛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이라면 집어치워.”
문경의 딱딱한 목소리에 적천강이 쓰게 웃었다.
“아니, 자네 말이 맞네. 하나밖에 없는 노부의 제자지.”
“그래서 제자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게 두려워서 스스로 떠날 만큼?”
“그게 유일한 선택지일세. 그 녀석을 위한 거야.”
“다른 선택지도 있다. 가령 이번에 얻은 이무기의 내단 같은.”
“자네도 알고 있잖나. 영약으로 얻을 수 있는 후천지기로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적천강이 자신의 주름진 손을 내려다보며 뇌까렸다.
“노부는 이미 너무 많이 늙어 버렸어. 설령 이무기의 내단에 그런 효능이 있다 하더라도, 희박한 가능성을 하나만을 믿고 나 같은 늙은이에게 사용할 수는 없네.”
“……!”
“낡은 배의 밑창을 덧대어 봤자, 오래된 선체 어딘가에서는 물이 새겠지. 하지만 그 녀석은, 내 제자는 달라.”
깊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에 빛이 스며든다. 그 빛의 이름은 기쁨이고, 희망이었다.
문경은 그런 적천강의 두 눈동자에서 제자를 향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일세. 그러니 부디 노부의 청을 받아 주게.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도록.”
“……어쩔 수 없는 선택. 그렇단 말이지.”
“그 아이를, 다시 부탁해도 되겠나?”
적천강을 응시하던 문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절강(浙江)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자그마한 섬나라가 있지.”
“섬나라?”
“들어 봤을 텐데. 왜국(倭國)이라 불리는 이름 정도는.”
“……?”
“못 들어 봤나?”
갑작스러운 물음에 적천강이 눈을 깜빡였다.
“물론 들어는 봤지. 왜구들이 노략질하러 온 것이 하루 이틀인가?”
“직접 본 적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괴상하게 생긴 놈들이라고 하더군. 제 키만 한 검을 들고 다니며, 이마를 반쯤 올려 까고 속곳 같은 거적을 걸치고 다닌다던데.”
“누가 알려 줬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들었군.”
“근데 갑자기 이 이야기는 왜…….”
적천강의 말은 곧바로 이어진 문경의 말에 의해 가로막혔다.
“오래전, 바로 그 왜국에서 제일가는 인자(忍者)와 겨루어 본 적이 있다.”
인자에 관해서는 적천강도 들어 본 바가 있었다.
중원의 살수와 비슷한데, 무공은 그리 높지 않으나 은영술이 뛰어나며 표창 따위의 암기에 능통하다는 자들이었다.
“결과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되겠구먼. 그래서, 지금 왜국 제일의 인자를 처단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안 죽였어. 어디까지나 생포가 목적이었으니까.”
생포된 표적을 기다리는 말로는 둘 중 하나다.
약간의 고통을 겪고 난 뒤 입을 열거나, 끔찍한 고통을 겪고 난 뒤 입을 열거나.
무엇을 선택하던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만 결국 얼마나 더 고통스럽게 죽느냐의 차이였다.
“놈은 후자였다.”
그는 명색이 왜국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인자답게 제법 오랜 시간을 버텼지만, 불행히도 당시 문경이 속해 있던 살천문은 명실상부한 중원 제일의 살수 문파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숱한 고문법을 총동원했다.
그렇게 인자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를 뱉어 내야 했다.
정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뇌리에 잠들어 있던 모든 기억을.
“그때 들었지. 왜국에 어떤 풍습이 있다는 이야기를.”
“풍습?”
“왜국에 나이 든 부모를 산속에 버리는 이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나?”
“……새삼 놀랄 일은 아니지만, 천인공노할 놈들이로군.”
“입을 줄이려는 의도라고 들었다. 굶어 죽든, 산짐승에게 물려 죽든 상관하지 않고 버리는 거지. 더는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니까.”
키워 준 부모를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산 중에 버리다니. 사실이라면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놈들이다.
극심한 재난이 들면 양민들 사이에서도 종종 천륜(天倫)을 어기는 일을 저지르긴 해도, 풍습이 있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문경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사로잡은 인자도 과거 같은 방식으로 제 어미를 버렸다고 했다. 한데 깊은 산중에 자신을 놓고 떠나는 자식에게, 그 어미가 뭐라 했을 것 같나?”
“개썅호로새끼.”
“…….”
“애미 없는 놈.”
만년한철보다 딱딱해진 문경의 얼굴을 본 적천강이 고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태경이 그 녀석이라면 분명 이렇게 대답했겠지. 하지만 그 여인은 달랐을걸세. 설령 자식에게 버려져도 어미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 그래서 결국 뭐라 했나?”
“천천히 가라고 했다더군. 날이 어두워 넘어질 수 있으니 서두르지 말고, 산길 조심하라고.”
적천강은 그 어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떠나고자 결심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으니까.
비록 문경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인처럼 버려지지는 않으나, 소중한 누군가의 짐이 될까 두려워 떠나고자 하는 마음은 같았다.
‘그리고 살성이 노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줬다는 것은…….’
적천강은 안도와 씁쓸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문경을 바라보았다.
“노부의 청을 받아 주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나?”
언제나 스스로를 의생이라 칭하는 문경이다.
적천강은 그런 그가 떠올리기 싫어하는 옛 과거를 끄집어내면서까지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인자의 어미를 자신에게 빗대어 제안을 묵인하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다음 순간, 고개를 가로젓는 문경을 보기 전까지는.
“그건, 무슨 뜻이지?”
“고개를 젓는다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아는데. 열화문은 다른가?”
“그럼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내가 깜빡하고 결말을 알려 주지 않았군. 그 후 인자의 어미는 천수를 모두 누리고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마지막 말을 듣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불효자가 다시 어미를 모셔 갔기 때문이지.”
“……!”
그 순간, 적천강의 신형이 덜컥 굳었다.
마침내,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문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인자의 어미는 버려진 와중에도 자식을 걱정하는데, 노부는 그 아이를 스스로 떠나려 했구나.’
적천강은 진태경에게, 자신의 하나뿐인 제자에게 짐이 되기 싫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제자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존심 강한 노인의 고집이며 착각에 불과했다.
언제였던가. 평범했던 구화산에서의 어느 날, 넓은 바위에 나란히 누워 진태경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잘 버티는구나. 네놈은 몸뚱어리가 쇳덩이로 만들어 졌느냐?’
‘아임 아이언 맨.’
‘헛소리한 벌로 철구 이백 근 추가.’
‘……아.’
‘으하하! 농담이다. 네놈의 헛소리도 익숙해지니까 이상하게 기분 나쁘진 않구나.’
‘됐습니다. 철구는 나중에 달아 주세요.’
‘두 번 말하게 하는 놈이로고. 농담이라니까.’
‘전 진담인데요.’
‘음?’
‘나가면 저보다 강한 놈들이 천지일 텐데, 괜히 나중 가서 짐덩이 취급받긴 싫거든요. 먼저 매단 철구가 덜 무겁다는데, 까짓거 올리십쇼.’
‘이놈 보게. 이백 근 늘리면 나중에 짐덩이 안 될 자신은 있고?’
‘그건 아니지만, 죽을힘을 다해 노력 정도는 해 봐야죠. 그래야 나중에 제가 쓰러지면 노야가 주워 주실 것 아닙니까.’
‘이제는 아주 당당하게 짐덩이라고 떠드는구나. 좋다, 노부가 그리한다면 네놈은 뭘 해 줄 테냐?’
‘언젠가 노야께서 쓰러지신다면, 그때는 제가 노야를 업어 드리겠습니다.’
‘허, 노부가 쓰러질 것 같으냐?’
‘지치면 부축이라도 해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힘들면 말씀하세요.’
‘……듣자 하니 오만방자한 놈이로군. 철구 오백 근 추가.’
‘미치셨습니까, 휴먼?’
특별할 것 없는 어느 날의 대화였을 뿐이다.
그러나 적천강은 이후에도 종종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호통을 쳐 놓고도 돌아서서 피식 웃고, 철구를 추가로 매달면서도 이놈이 다치는 게 아닌가 싶어 몰래 숨어서 지켜보았던 순간들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귓가에는 그날 들었던 진태경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언젠가 노야께서 쓰러지신다면, 그때는 제가 노야를 업어 드리겠습니다.’
언제나 네 앞에는 내가, 내 뒤에는 네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쓰러질 수 없었다.
‘지치면 부축이라도 해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비틀거리는 모습조차 보이기 싫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처럼, 너에게만큼은 무적자(無敵者)이고 싶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었던 어느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화신귀무…… 이름 한 번 멋지네.’
‘네, 네놈이 어찌.’
‘머리를 부쉈어야지, 확실하게.’
‘쿨럭!’
‘노야!’
그러나 나는 무적이 아니었다.
훗날 오랜 잠에서 깨어난 후에야 알았다.
쓰러진 못난 스승을 등에 업은 제자가 어떤 고비를 넘겼는지. 몇 번이나 그 귀한 목숨을 걸고 악전고투를 치렀는지.
하여 굳게 결심했다. 두 번 다시 쓰러지지 않겠다고.
제자를 위험에 빠트리는 짐덩어리가 되지 않겠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우리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한 방향을 따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함께.’
뇌리를 가득 채운 한 가지 생각.
그리고 그 순간,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구친 어둡고 습한 과거의 기억들이 적천강의 눈 앞을 가렸다.
화아아악!
그건 만두 하나를 줍기 위해 발버둥 치던 거지 소년으로부터 이어진 수많은 기억과 감정이었다.
분노와 절망. 슬픔과 죄책감이 파도처럼 덮쳐와 적천강의 전신을 옥죄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평소와 달리 그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답답하던 가슴도, 깨질 것 같은 두통도 없었다.
‘이건.’
적천강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평온함 속에서, 문득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 줄기의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그 사이로 묻어 나오는 목소리도 함께.
‘오, 시원하다.’
‘어흠. 노부가 직접 선정한 구화산 최고의 명당이니라.’
‘이거 바위가 거의 장수 돌침대 급인데? 별 다섯 개 드립니다.’
‘크흐흠!’
따스하다. 눈 부신 빛이 스며들었다.
어느덧 수십 년간 적천강의 마음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어둠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심마(心魔).
그건 한 사람이 간직하고 있던 어둠의 이름이었고,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던 사슬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몰아낸 것은, 어느 청명한 날 구화산에 불어온 한 줄기의 시원한 바람과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화아아악!
‘노야.’
빛이 어둠을, 심마를 집어삼켰다. 분명 눈을 감은 채인데, 사방 천지가 눈이 부시도록 환하다.
적천강의 주름진 입가에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오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새하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환상도, 착각도 아니었다.
콰아아아아!
마침내 사슬을 끊고 몸을 일으킨 거인, 화왕(火王) 적천강을 중심으로 흘러나온 바람이 사방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