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06
#505화
반로환동(返老還童)은 모든 무림인이 꿈꾸는 경지다.
막대한 공력과 깨달음이 합쳐졌을 때, 인체가 재구성되며 과거의 젊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반로환동이 그리 쉬웠으면 수많은 무림인들이 꿈만 꾸다 죽진 않았을 거다.
이는 하늘의 도움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고, 지금 내 옆에는 기나긴 세월 각고의 노력 끝에 바로 그 천운(天運)을 얻은 한 사람이 걷고 있었다.
“제갈세가, 집합.”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탄력 있는 근육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체구와 칠 척에 달하는 키. 목소리는 쇠몽둥이처럼 묵직했다.
‘……진짜 적응 안 되네.’
사람이 달라도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쳐다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던 화왕(火王) 적천강은 오척단구에 더 늙기도 어려울 만큼 나이든 노인이었지, 기껏해야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몸짱 중년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 적천강이 걷다 말고 작게 중얼거렸다.
“왜, 왜 또.”
“아니, 그렇잖아요. 진짜 어떻게 이러지? 이거 몇 살 때 모습이에요?”
“환갑 전이었을 거다. 물론 머리카락의 색은 단 한 번도 붉었던 적이 없지만.”
“도대체 어떻게 늙으셨던 겁니까? 나이가 먹으면 키가 줄어드는 거야 당연하긴 한데…… 혹시 팔순쯤에 누구한테 다리 잘리신 적 있어요?”
“잘린 적은 없고. 아까부터 거슬리게 나불대는 어느 놈 다리라면 자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던 적천강이 문득 입맛을 다셨다.
“어쨌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노부도 아직 어색하니까.”
“노야 본인도 어색한데, 아니. 노야라고 부르기도 뭐하네.”
“그럼 뭐라고 부르겠느냐?”
“아저씨?”
“…….”
“어이, 적 씨?”
“……뒈지고 싶으냐?”
다행이다. 말투 살벌한 거 보니까 적천강 맞네.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사이, 어느새 가까워진 익숙한 얼굴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와 적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응?”
“조장님,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문경과 몇몇 사람은 달랐다.
“마, 막내야.”
“어어, 은인. 혹시 옆에…….”
진위경과 청풍. 이 두 사람은 사태 파악이 빨랐다.
진위경은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며 정황을 파악하는 사람이었고, 청풍은 이들 중 문경 다음으로 강한 초절정 고수이니 짐작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제갈풍이 무거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적발(赤髮)에 적염(赤髥)이라. 내가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지금까지 이곳에 출입한 이들 중 저런 특색 있는 생김새의 무인은 없었지. 특히 신경 쓰이는 점은 자네와 나란히 오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친밀한 관계인 것 같은데, 자네는 친구가 없지 않나.”
“……상당히 열 받긴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네. 그래서요?”
“하여 내 명석한 두뇌로 추측한 바에 의하면, 자네 옆에 있는 저 무인은 혹 반로환동 한 적 노선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하하, 어떤가. 제법 그럴듯한 헛소리 아닌가?”
“맞는데요.”
“아닐세. 헛소리야.”
“아니긴 뭐가 아냐. 맞다니까요.”
“헛소리라고 해 주게. 제발.”
“맞다.”
이번 대답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짧고 굵은 한마디와 함께 앞으로 나선 적천강의 모습에 주위의 공기가 크게 요동쳤다.
“헉!”
“바, 반로환동이라니.”
“그럼 정녕 저자의 정체가……!”
임시로 세운 나루터 주위에는 이곳을 지키고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무당과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한 트럭이었다.
거기에 더해 우리를 밖으로 데려다줄 선화아 무송과 수룡채의 수적들까지.
주위의 모두가 눈을 부릅뜬 상황에서, 제갈풍의 동공이 흔들렸다.
화왕이 왜 거기서 나와……?
눈동자에 딱 그렇게 쓰여 있다. 사람들의 동요 속, 말없이 적천강을 바라보던 제갈풍이 공손하게 포권을 올렸다.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혹여 무슨 일이 있으신가 싶어 제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왜 마교 놈들이 그 많은 길을 놔두고 구화산에 왔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칼 같은 어조에 제갈풍이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한 번만 더 모르는 척했다가는 좋은 꼴 못 본다.”
“……혹시 어디서부터 들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혜롭고 현명하신 조부님의 판단이 아니었다면, 부터.”
“음. 다 들으셨군요.”
“다 들었지.”
“만약 제가 한 말이 모두 오해라고 말씀드린다면…….”
“제갈세가에 불을 싸질러 버려야지.”
“아앗…….”
“어쩐지 그 개 같은 마교도 놈들이 그 많은 길을 놔두고 왜 이리 오나 했다.”
적천강은 스산한 눈빛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오늘내일할 것 같던 할배 시절에도 저런 눈빛을 하면 모두가 꼬리를 내렸는데, 회춘까지 해 버렸으니 그 기세에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낮잠 자다가 일어났더니 구화산이 타고 있더라. 이 문제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갈풍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심기가 불편하셨으리라 사료됩니다.”
“참으로 개 같았지. 황급히 달려가지 않았다면 노부의 거처까지 잿더미가 되었을 거야.”
“거처는 무사했군요. 다행입니다.”
“거처 빼고 다 탔다. 노부의 마음도.”
“아아앗.”
“자, 이제 두 가지 선택지를 주마.”
적천강이 손가락 하나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첫째. 노부가 제갈 성을 쓰는 놈들을 모조리 붙잡아 일오횡대로 나란히 세워 놓고 귀싸대기를 갈기는 것.”
내가 그거 장관이겠는데, 라고 생각할 때 제갈풍이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두 번째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게 뭔지 알고?”
“뭐든 간에 두 번째로 하겠습니다.”
이건 나 같아도 2번 고른다.
무림인이 목숨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존심이다.
화왕 적천강한테 식솔 전체가 줄 싸대기 맞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문파는 그날부터 현판 내려야 한다.
아무리 오대세가의 일원인 제갈세가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제갈풍의 선택은 현명했다.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제아무리 그라도 어쩔 수 없었다.
“한데, 무엇입니까?”
“노부의 두 번째 제안 말이냐?”
적천강이 짧게 나 있는 붉은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나를 포함한 이 자리의 모두를 천천히 눈에 담은 그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앞으로 잘해라.”
“노 선배님. 죄송하지만 정확히 그게 무슨…….”
“이미 전란은 시작되었다. 그러니 정마대전 때 제갈세가가 해 왔던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잘하란 말이다. 네 조부처럼.”
“……!”
“뭐, 따지고 보면 네놈 조부가 마교도와 결탁해서 구화산에 불 지르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이미 죽어 땅에 묻힌 놈에게 화내는 것도 우습지. 무덤까지 찾아가서 도로 뒤엎어 버릴 수 없는 노릇 아니냐.”
적천강이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날 마교도 놈들이 구화산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면 다른 인연도 만들어지지 않았……. 그런데 네놈은 왜 표정이 그 모양이냐?”
나는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대답했다.
“평소 그대로인데요.”
“……짚이는 게 없지 않지만 넘어가 주마.”
사실 전대 가주의 무덤에 찾아가서 오줌이라도 갈길 줄 알았다고 대답하면 적천강이 날 죽이려 들 거다.
다른 사람들 표정을 보아하니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고.
‘그래도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살짝 감동인데.’
적천강의 말마따나, 그가 구화산의 은거기인으로 남아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함께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각자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지.
하지만 운명의 시계추는 나를 무림으로 인도했고, 적천강과 이어 주었다.
그리고 이 또한 운명일지는 모르나, 우리는 다시 한번 다음 장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하남(河南).’
그 한 단어가 뇌리를 가득 채운 그 순간.
시종일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홀로 떨어져 있던 문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해가 질 모양입니다.”
어느새 붉게 물든 서산(西山).
그리고 서산보다 붉게 물든 머리카락을 한 적천강이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이제 가자꾸나.”
“예.”
그래, 가자.
하남으로. 신(新) 무림맹으로.
* * *
“그래, 모두 떠났다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청수한 인상의 노도사였다.
검버섯 하나 피지 않은 피부는 젊은이처럼 팽팽했고, 길게 늘어트린 도포 자락은 눈부시게 희었다.
노도사에게 새로운 소식을 가져온 이 역시 늙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누덕누덕 기운 옷차림은 그의 소탈한 성품을 증명하는 것 중 하나였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남루한 차림의 도사, 현공진인이 대답했다.
“예, 장문 사형.”
어릴 적부터 한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하던 두 소년은 어느덧 존경받는 진인이자 무당파의 기둥이 되어 있었다.
그저 무공만을 좋아했던 현공진인은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명성을 떨쳤고, 그보다 일곱 살이 많았던 사형은 스승의 뒤를 이어 대 무당파의 장문인이 되었다.
바로 그가 청수한 인상의 노도사, 현천진인(賢天眞人)이었다.
“떠나기 전 꼭 한번 만나고 싶었거늘.”
안타까움이 담긴 사형의 뇌까림에 현공진인이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장문 사형께서도 만나기 싫어 저를 대신 보내신 게 아니니.”
“그건 그렇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구나. 태원진가와 화산파가 자랑하는 이룡(二龍)도 그렇지만, 적 선배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셨다니 꼭 뵈었어야 했는데. 허어.”
“하하,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십시오. 곧 다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이 서신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말이야.”
현천진인은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서신이 들어 있는 봉투의 겉면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림맹(武林盟).
고작 세 글자에 불과하지만, 이에 실린 무게는 두말할 것 없이 무겁다.
무림맹은 정파 무림 그 자체를 상징하는 권위이며, 정마대전과 버금가는 전란이 다가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정녕…… 이리 시작되는가.’
현천진인의 표정은 무거웠다. 과거 정마대전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간 수많은 사형제들의 비명이 노도사의 귓가를 스치는 듯했다.
젊은 시절 겪었던 끔찍한 기억이 반복되려 하고 있었다.
‘불초 제자, 이제야 스승님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현천진인이 오래전 정마대전에서 입은 부상을 이기지 못해 명을 달리한 스승을 떠올리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 장문인!”
전각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
이상함을 느낀 현천진인이 소매를 내젓자 부드럽게 쏘아진 한 줄기 경력(經力)이 전각의 문을 열어젖혔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현공진인이 미간을 좁혔다.
“너는…….”
다급한 외침의 주인은 무당파의 이대 제자로, 추격대에 포함되어 살귀(殺鬼)를 쫓던 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대 제자를 바라보던 현공진인이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예, 놈을 잡았습니다.”
“그거 잘 되었구나!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던 살귀를 드디어…….”
기뻐하던 현공진인이 말을 멈췄다. 자신과 달리 사형인 현천진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현공진인의 짐작은 정확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대제자를 말없이 응시하던 현천진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귀를 잡았으니 기뻐해야 마땅하거늘, 네 낯빛이 어둡다. 무슨 일이더냐?”
“그, 그것이.”
“혹, 누가 또 죽거나 다쳤느냐?”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이대 제자가 고개를 숙였다.
“살귀의 시신을 이리 가져오고 있으니, 장문인께서 직접 보고 판단해주심이 좋을 듯합니다.
“이 무슨.”
현천진인의 의문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불과 한 식경 뒤, 무당파의 제자들이 옮겨 온 살귀의 실체를 확인한 그는 한참 동안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하남에 갈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노도사의 맑은 눈동자에 비친 것은, 짐승도 인간도 아닌 또 다른 무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