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07
#506화
화아아악.
저 멀리 불어오는 북서풍(北西風)에 돛이 크게 부풀었다.
험상궂은 근육질의 수적들은 박자에 맞춰 힘차게 노를 저었고, 빠르게 나아가는 뱃머리를 따라 좌우로 갈라지는 물결은 새하얀 포말을 만들며 사라지길 반복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화롭네.’
앞서 벌어진 여러 참극 때문인지, 오늘따라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장강의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옆에 서 있던 적천강이 입을 열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거지 같은 풍경이군.”
“…….”
“지금 당장 천하에서 사라져야 할 것들을 두 개만 꼽자면 암천과 장강이지.”
마음을 읽긴 개뿔이.
뭐랄까, 참. 여러 의미로 변함이 없어서 좋다. 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크게 쉬지 마라. 땅…….”
“한숨 좀 쉰다고 땅 안 꺼져요.”
“아니, 땅에 오르기도 전에 노부의 손에 뒈질 거라고.”
“이야. 예상을 까마득히 벗어나시네.”
“요새 통 못 봤다고 눈 제대로 뜨는 법을 잊은 모양이구나. 네놈의 눈깔 두 개에 각각 불, 손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를 어찌해야 할까.”
“존, 경. 인데요.”
“발, 경. 으로 처맞고 싶으냐?”
“아. 뇨.”
후웅, 빡!
“억!”
순간 눈앞에 번개가 쳤다. 짧은 비명과 함께 뒤통수를 감싸 쥐는 내 모습에 적천강이 흠칫 놀랐다.
“사, 살살 쳤는데 녀석이 엄살은.”
“아니, 이게 엄살로 보이세요? 골이 아주 쿵쿵 울리는구먼.”
“골이…… 울려?”
“제가 아무리 튼튼해도 사람인 이상 당연한 거 아닙니까?”
“……많이 아팠느냐? 이 정도로 세게 때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디 한번 보자.”
나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적천강의 모습에 피식 실소를 흘렸다.
“왜, 왜 웃는 게냐?”
“그냥요.”
“……?”
“아, 다 나았다. 그보다 이대로면 하남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아무렇지 않게 딴청을 피우는 내 모습에 적천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놈이! 감히 노부를 가지고 놀아!”
빡!
“아, 진짜 아프다고요!”
“그냥 맞아!”
아프다. 정말로.
그런데 왜 맞는 와중에도 자꾸 웃음이 나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웠던 건가.’
그래,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간혹 별것 아니었던 일상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어릴 적 그토록 따가웠던 아버지의 까슬까슬한 턱수염이 그랬고, 점점 느려지고 약해지는 적천강의 손바닥이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비록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지만, 점점 쇠약해지던 적천강은 힘을 되찾았다.
빡!
젊음과 함께 되찾은 적천강의 힘과 속도를 느끼자 자꾸 웃음이 흘러나왔다.
‘좋네. 이런 것도.’
빡! 빡! 빠악!
“……어, 잠깐만.”
“네놈이 감히 노부를 희롱해!”
“어억!”
생각해 보니까 엄청 좋진 않은 것 같다.
아니, 적당히 아파야지 이건 좀 선 넘었잖아.
이미 미친놈처럼 실실거리던 웃음은 씻은 듯이 사라진 지 오래.
계속해서 날아드는 적천강의 두꺼운 손바닥을 피해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던 바로 그때였다.
“어…… 나중에 다시 와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적천강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그 틈을 타 잽싸게 빠져나간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방패 삼아 뒤로 숨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내 소중한 고기 방패, 아니 선화아(船火兒) 무송이 질겁하며 외쳤다.
“이, 이보게. 후배!”
“후배. 오늘따라 그 말이 참 듣기 좋네요. 선배님.”
“이게 무슨 짓인가!”
“채주직을 계승 중입니다.”
“맞으려면 혼자 맞아!”
“이럴 때 도와주셔야죠. 후배 위하는 선배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가 도대체 왜…… 헉, 적 대협!”
아쉽게도 무송과 함께 맞는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흐름이 끊긴 적천강은 불끈 쥐었던 주먹을 내리치는 대신, 입맛을 다시며 무송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 됐고. 무슨 일이냐?”
무자비한 구타를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던 무송이 황급히 나를 떼어 내며 대답했다.
“부르셨다기에 왔습니다. 수하에게 전해 듣기로는 저를 찾으셨다고…….”
“노부가 말이냐? 언제?”
“부, 분명 언제쯤 하남에 도착하는지 물어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가만히 동태를 파악하고 있던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어, 그거 제가 한 말 같은데요?”
아까 딴청을 피울 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수적 중 누군가가 듣고 무송에게 전한 모양이다.
“……후배였나.”
“네. 그냥 해 본 소리였는데.”
“그래, 그렇군.”
스산한 목소리를 들어 보니 잘못된 소식을 전한 그 수적은 오늘 장강 찍먹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어딘가를 노려보는 무송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묻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고요. 언제쯤 도착할 것 같습니까?”
비록 무송이 다른 노강호에 비교하면 새파랗게 젊은 나이라지만 장강에서 일평생을 보낸 베테랑 수적이다.
짧은 시간 동안 뭔가를 가늠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시일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 같네. 오늘 같은 날씨가 이어진다면 아무리 길어도 열흘 안에는 서협(西峽)에 당도할 수 있겠지.”
“서협?”
그간 이곳저곳 부지런히 싸돌아다녔다고 해도, 천하 곳곳의 지명까지 일일이 파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무림에서는 워낙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고, 현대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공부를 해 보려 해도 지명과 특정 장소의 위치가 달라 어려움이 있었다.
‘동정호만 해도 그렇지.’
바로 이곳. 무림의 동정호는 호북성에 있지만, 현대 중국 지도에는 호남성에 위치한다.
이와 같은 오차는 두 세상이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는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다.
“서협이면, 하남입니까?”
내 물음에 적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남 남서쪽 끝자락이다. 노부의 기억에 의하면 그쯤에서 장강의 지류가 끝날 테니 그다음부터는 육로로 이동해야겠군. 맞느냐?”
“예. 적 대협께서 하신 말씀이 정확합니다.”
“정마대전 때 서협 인근을 지나갔던 적이 있지. 좋군, 좋아.”
반로환동으로 노환이 완치됨으로써 훨씬 정확해진 기억력이 흡족한 건지, 늦어도 열흘 뒤에는 장강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적천강이 문득 무송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 녀석도 고생이 많구나. 사천에서 호북, 거기에 이어 하남까지 가게 되지 않았느냐.”
무송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까짓게 고생이겠습니까. 덕분에 비명에 간 황 숙부와 수많은 형제의 눈을 편안히 감겨 줄 수 있게 되었으니,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수신룡이 쓰러진 뒤, 무송을 비롯한 수룡채의 수적들은 시신들의 유골을 한데 모아 장강에 흩뿌렸다.
장강에서 살고 장강에서 죽었으니, 장강수로채의 수적다운 최후라 할 수 있었다.
“그들도 구천(九天)에서 감사하고 있을 겁니다.”
“무생이라 했느냐? 해상왕의 제자치고는 예의범절이 제법이군. 장강일도가 어린놈을 잘 키웠어.”
“제게는 혈육 같은 분이셨지요. 그리고 무생이 아니라 무송입니다. 적 대협.”
“그래, 무생.”
“…….”
혹시 노환이 치료가 덜 된 건가.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눈알을 부라리는 적천강의 모습을 보니 저건 그냥 우기는 거다.
이름이 뭐건 간에 본인이 무생이라 했으면 개명이라도 하라는 저 눈빛.
뿌리 깊은 유교 사상에 찌든 삼강오륜 마스터의 기세에 무송이 침을 꿀꺽 삼켰다.
“뭐, 왜?”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래, 무생.”
어디서 틀니 딱딱거리는 소리 안 들리냐.
보다 못한 나는 이름을 잃어버린 무송에게 구원을 손길을 내밀었다.
사실 그런 이유에서보다는,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일을 묻기 위해서가 더 컸지만.
“그런데 선배님은 다시 사천으로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하남으로 향하는지.”
내 질문에 담긴 뜻을 파악한 무송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무림맹에 참여하는지, 그게 궁금한 모양이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예. 그렇죠.”
“암천의 흉계에 의해 부모처럼 따르던 분과 수많은 형제가 비명횡사했네. 자네라면 어떨 것 같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수를 갚을 겁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당장이라도 달려가 무림맹에 손을 보태고 싶어. 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문 무송이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나는 장강수로맹이라는 큰 울타리에 속한 일개 채주일 뿐, 아무런 결정권이 없네. 본 맹의 중대사는 오직 한 분, 바로 내 스승이자 맹주이신 해상왕께서 결정하실 수 있어.”
강자가 대접받는 무림에서는 흔한 일이다.
일문의 문주, 혹은 가주가 갖는 결정권은 현대에서 철통같은 경영권을 손에 넣은 재벌 일가 오너보다 강력했다.
문제는…….
“근본 없는 수적 집단답군. 하기사, 정마대전 때도 이리저리 손익을 재던 놈들에게 뭔가를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그래, 지금 적천강이 말한 바로 저 부분이다.
처음부터 장강수로맹은 정파가 아니었다.
천하 곳곳에 풀뿌리처럼 흩어져 있던 수적들이 맹(盟)의 깃발 아래 모여든 것은 해상왕이라는 강자의 통솔력과 각자의 이권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녹림맹(綠林盟)도 마찬가지라고 들었고.’
장강수로맹이나, 녹림맹이나 애당초 그들의 뿌리는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모인 도적 집단이다.
다만 그들이 지금까지 세력을 유지하고 더욱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마대전에서 정파 무림의 손을 들어 승자가 되었고, 그 공으로 활동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정마대전 당시 살아남았던 여타의 사파보다는 훨씬 대접이 괜찮지만, 그렇다고 풀뿌리가 나무뿌리로 변할 리는 없다.
적천강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장강의 물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노부가 죽기 전에 이 빌어먹을 장강이 말라서 비틀어져야 할 텐데. 그래야 해상왕, 그놈 낯짝이 엉망진창이 되지. 쯧쯧.”
“…….”
“무생 네놈도 잘 생각하거라. 혹여 네 스승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으니.”
“……그럴 리 있겠습니까.”
면전에서 스승의 욕을 들었음에도 무송은 그저 씁쓸한 미소만 짓는 게 전부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보니 스승인 해상왕과 그리 화기애애한 관계는 아닐 것 같다는 짐작이 얼핏 들었다.
‘그나저나 이런 시점에서 장강수로맹과 녹림맹이 암천 쪽에 붙어 버린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답은 금방 나왔다.
제대로 골치 아파지는 거지, 뭐.
암천이 정면에서 다가오는 칼날이라면, 저 두 세력은 등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비수다.
만약 저들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제아무리 강대한 정파 무림이라 할지라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검성이 골머리 꽤나 썩이겠군. 과연 그 두 놈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나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적천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둘이 아니라, 넷이겠지요.”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차분한 표정의 문경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