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08
#507화
문경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칠 주야 동안의 피나는, 아니 피똥 싸는 수련으로 평소의 기감이 훨씬 더 날카로워졌으니까.
아직 시스템이 표시하는 기감의 경지는 오르지 않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앞을 가로막은 벽을 넘어야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둘이 아니라 넷이라니, 이건 무슨 소리지?’
그러나 의문은 잠시뿐이었다.
장강수로맹과 녹림맹의 힘은 정파 무림으로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고, 그런 두 세력과 한 세트로 엮일 만한 곳은 정해져 있다.
나는 과거 적천강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어렴풋이 떠올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새외무림(塞外武林).”
중원을 벗어난, 무림 밖의 무림.
혹자는 고대 황제가 세운 장성(長城) 밖의 오랑캐를 새외라 지칭하기도 하지만, 적천강은 그런 이야기들을 코웃음으로 일축한 바 있었다.
‘장성이 무슨 온 천하를 감싸고 있더냐? 천하는 말 그대로 천하(天下)다. 하늘 아래 펼쳐진 세상은 끝도 없이 드넓고, 저마다의 무림이 있는 것이지.’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적천강이 바라보는 시선은 틀딱 중화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이런 식견을 갖출 수 있었던 이유는, 정마대전 활동 시기를 제외하면 산기슭 여포였던 적천강과 달리 인싸 기질을 마음껏 뽐낸 선대 문주들의 기록도 한몫했다.
사실 후대를 위한 기록이라기보단, 자기만족용으로 쓴 일기에 가깝긴 했지만.
‘충격적이었지.’
나는 열화동에서 읽었던 몇 가지 기록을 떠올렸다.
xx년 x월 x일. 열화문 삼 대 문주 천봉.
중원이 지긋지긋했다. 사방에서 전쟁이 이어지고 무림도 개판이다. 하여 견문을 넓힐 겸 천축에 갔다.
긴 여정 끝에 갠, 뭐라고 부르는 강에 도착했다.
장강보다는 못하지만 넓고…… 아무튼 열화문의 후배들은 천축에 가거든 가장 먼저 갠 뭐 강에서 몸을 씻어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웬 땡중들이 우르르 몰려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칼을 들이밀기에 두들겨 팼다.
우연히 주위를 지나가고 있던 중원의 역관이 질겁하며 저들이 바로 천축의 소뢰음사(小雷音寺)라고 했다.
이름만 듣고 소림사랑 비슷한 줄 알았는데, 이곳의 땡중들은 난폭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더 많은 패거리를 이끌고 온 중놈들을 모조리 불구로 만들고 요상하게 생긴 절간을 모조리 불태웠다.
그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다.
xx년 x월 x일. 열화문 오 대 문주 송학.
본 좌는 사조(師祖)이신 삼 대 문주를 마음 깊이 존경해 온바, 그분의 행적을 좇아 천하와 새외무림을 탐방했느니라.
뜨거운 사막 너머에 존재하는 대막의 광풍사(狂風社)와 일전을 겨루고, 서장(西藏)의 포달랍궁으로 찾아가 기둥을 뽑았느니라.
그러자 서장의 모든 인마가 분노하여 본 좌를 쫓았느니라.
허나 본 좌가 누구인가. 대 열화문의 오 대 문주, 귀염권(鬼炎拳) 송학.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놈들을…… 피해 무사히 중원으로 돌아왔느니라.
먼 훗날 열화문의 진전을 이어받을 누군가여, 명심하거라.
상대가 일류 고수 일백이라면 맞서 싸우고, 일천이라면 화신귀무를 펼치고, 그 이상이면 후일을 도모하라.
물론 이 글을 보게 될 그대가 본 좌보다 강하다면 그냥 싸워라.
아, 그리고 천축의 갠 무슨 강에 간다면 바로 뛰어들어 몸부터 씻어라. 두 번 씻어라.
xx년 x월 x일. 열화문 구 대 문주 구진천.
남만(南蠻)에 갔다. 오독문을 멸문시켰다.
파사국(波斯國)에 갔다. 영웅건 대신 터번이라 불리는 것을 쓴 이들과 만났다.
그들은 회교도(回敎徒)라 불리는 자들로, 선지자이자 예언자를 믿는다고 했다.
예언자를 만나고 싶다 하니 이미 죽었다고 했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여러 번 물었더니 칼을 빼 들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예언자의 곁으로 보내 주었다.
다음은 북해(北海)에 있다는 빙궁(氷宮)이었는데, 사방이 얼음이요 물이라 그냥 돌아왔다.
후대의 연자여, 그대가 가라.
아, 그리고 갠 무슨 강의 이름을 알아냈다. 갠지스강. 천축에 간다면 반드시 그곳에서 몸부터 씻어라. 꼭 씻어라.
xx년 x월 x일. 열화문 십이 대 문주 한신.
불민한 제자. 여러 선조의 기록을 좇아 천축에 당도하여 갠지스강에 곧장 들어갔나이다.
머리를 감던 도중에 상류에서 떠밀려 오는 시체를 보았나이다.
자리를 옮겨 몸을 씻던 도중에 옆을 지나가는 똥을 보았나이다.
상류로 올라가 보니 수백여 명이 강에 시체를 버리고 똥을 싸고 있었나이다.
아니 시팔 이런 개수작을 부리시면 어떡하나이까.
“…….”
다시 생각해 봐도 기가 막힌 이야기뿐이다.
기록만 대충 훑어봐도 수틀리면 중원, 새외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깨부수고 다녔다.
그 와중에 갠지스강에서 목욕하라는 건 병영 설문 조사에서 유격 훈련 강화하라는 말년 병장의 심술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일명 너도 좆 돼 봐라 마인드.
갠지스강에서 똥물 목욕 후 개빡친 십이대 문주 이후로는 딱히 새외무림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지만, 중원과 새외를 잇는 교역로가 열리자 중원 밖의 무림에 관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지금 막 적천강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저 두 세력이야말로, 지리적으로 중원과 가장 가까우며 관계적으로도 밀접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북해빙궁(北海氷宮), 그리고 남만야수궁(南蠻野獸宮).”
다시 들어도 각자의 위치와 색깔을 확실히 드러내는 문파 명이다.
물꼬를 튼 적천강의 말에 문경이 가증스럽게도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스승님께서 알려 주셨어요. 오래전 가 본 적이 있는데, 확인해 본 바로는 중원의 명문 대파와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
“…….”
분명히 사람 죽이러 갔다는 것에 혁무진의 모두를 건다.
순간 나와 적천강이 비슷한 눈빛을 주고받자 문경의 눈이 슬그머니 가늘어졌다.
“왜 그러세요?”
“……어? 어어. 그냥.”
“크흠. 아무것도 아니다. 병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신의답군.”
나야 당연하고, 적천강도 큰 도움을 입었으니 최대한 장단을 맞춰줘야 하는 처지일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의 반응에 언제 그랬냐는 듯 소년 의생으로 돌아간 문경이 말을 이었다.
“스승님이 하신 말씀이, 정마대전 때도 마교가 그 두 세력을 가장 먼저 포섭하려고 했다던데…… 그게 정말인가요, 적 대협?”
“응? 으음.”
적천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이다. 마교 놈들에게 중원의 사마외도는 한 뿌리에서 나온 곁가지라 할 수 있으니 당연히 합류시켰고, 마교의 포섭에 응한 북해빙궁이 남하하고 남만야수궁이 북상한다면 정마대전은 매우 힘든 양상으로 흘러갔겠지.”
그러나 두 세력 중 어느 쪽도 마교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북해빙궁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 외부와의 단절을 선언했고, 그보다 지리적으로 중원과 가까운 남만야수궁은 저울질 끝에 정파 무림의 손을 들어 주었다.
“야수궁 놈들은 처음에 싸우는 시늉만 내려 했지만, 나중 가서는 제법 큰 도움이 됐다. 놈들이 데려온 온갖 맹수들은 하나하나가 능히 일류 고수 몇 사람 몫을 해냈고, 마교가 천하 각지로 날려 보낸 전서응은 야수궁의 비전으로 조련한 천응(天鷹)에게 붙잡혔지.”
남만야수궁은 현대에 존재하는 동물 애호가들의 공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남만의 밀림에 서식하는 온갖 생물체들을 붙잡아 조련하고 맹수의 움직임을 본 따 무공을 창시하여 익혀 왔으니까.
“어, 잠깐. 그러고 보니까 그쪽에 계신 분과 친하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묻자 적천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
“궁주요. 궁주.”
“궁주? 아, 야수묘왕(野獸苗王) 말이냐?”
“네, 그분.”
야수묘왕은 십왕(十王) 중에서도 가장 말석이자, 가장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애당초 본인부터가 남만의 토착민인 묘족(苗族)의 우두머리일뿐더러, 남만의 패주라 할 수 있는 남만야수궁의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십왕에 들어간 이유는 정마대전에서 세운 공과 출중한 무공 때문이었으나 밖에서 보는 시선은 외국인에게 주는 명예 훈장에 가까웠고, 그 때문인지 중원 무림 내부에서도 언급을 꺼렸다.
같은 정파 식구나 넣어 주지, 뭐 하러 남부 야만인 놈을 그렇게 추켜세우냐는 것이 야수묘왕 거품설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그저 몇 번 일면식이나 한 정도다.”
“그런데 야수묘왕이 직접 인사하러 찾아온 적도 있다면서요?”
“그건 사실이다. 대낮에 웬 상반신을 헐벗은 시커먼 놈이 거처로 찾아왔길래 화염신장부터 날릴 뻔했지.”
어째서인지 조금 전부터 불안한 눈빛으로 엉거주춤 서 있던 무송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노부가 이 나이에 거짓부렁이라도 늘어놓으리?”
“그, 그게 아니라 놀라워서 그랬습니다. 제 스승님께서도 야수묘왕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지만, 그는 성격이 폭급하고 오만방자하여 오직 무신께만 예의를 갖췄다고 들었는데…….”
“해상왕,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벌써부터 노망이 났나. 제깟 놈이 병신 같으니 야수묘왕이 예의를 안 차린 걸 가지고. 쯧쯧.”
같잖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야수묘왕이 겉보기에는 그럴지 몰라도, 필요할 때는 예의를 갖추는 놈이다. 그냥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었으면 묘족이 한 깃발 아래 모였겠느냐?”
확실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문도가 수십 명밖에 없는 중소 문파도 제자가 없어 사라지고 생기길 숱하게 반복하는데, 야수묘왕은 단순히 생각해도 수천이 넘는 묘족을 다스리는 족장이니까.
“그래서요?”
내 물음에 적천강이 윤기가 흐르는 붉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서는 뭔 놈의 그래서. 별거 없다. 찾아와서 사근사근한 말투로 선대의 인연을 들먹이더구나.”
“선대의 인연이요?”
“허, 참. 이런 불민한 놈을 보았나.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넌 알아야지!”
“깜짝아. 왜 그러세요?”
우리 노야 갑자기 풀 악셀로 급발진하시네.
한차례 불호령을 내린 적천강이 심기 불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이백여 년 전, 본문의 오대 문주께서는 남만의 오독문을 멸문시켰다.”
“그게 왜…… 아, 혹시?”
“당시의 남만은 세 발 달린 솥의 형국이었지. 오독문의 세가 가장 강성했고, 그다음이 남만야수궁이었으며 마지막은 독곡이었다.”
“결국, 오독문이 멸문당하자 남만야수궁이 치고 올라왔다?”
“그렇지. 독곡도 흡수하여 남만을 제패했고.”
“와, 미친. 이게 이렇게 되네.”
“그런 이유로 야수묘왕은 본문에 호의를 품고 있었지. 정마대전에 참여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 그런데 지금 감히 반말을 지껄인 게냐?”
“……시정 하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오래전 역대 문주가 행했던 깡패짓이 이렇게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나저나 야수묘왕이 열화문에 호의를 품고 있고, 그 때문에 정마대전에도 정파의 손을 들었다는 건…….
“남만야수궁은 이번 무림맹에도 참여할 가능성이 높겠네요.”
“글쎄, 그 부분은 노부도 쉽게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노부가 기억하는 야수묘왕이라면, 충분히 정파를 도울 것이다.”
“그럼 북해빙궁은요?”
“하남에서 보낸 사절이 가는 길에 얼어 죽지만 않았다면 서신 정도는 읽어 보겠지.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게다.”
풍부한 식견과 깊은 연륜을 지닌 노강호의 눈빛이 무송을 향했다.
“다만 당장 급한 것은 이쪽인데…… 해상왕이 어찌하려나?”
무송이 신형을 움찔거린 그때, 문경이 나직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무송 대협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으, 응?”
파르르 떨리는 무송의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보던 문경이 문득 혀를 찼다.
“너, 내가 누군지 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