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12
#511화
사방이 어둠에 잠긴 깊은 밤. 돛을 활짝 펴고 쾌속하게 나아가는 두 척의 선박이 있었다.
촤아아악.
밤눈이 밝은 뱃사람이라면 선박의 범상치 않은 속도에 한 번, 그리고 선박의 희미한 횃불 너머로 보이는 깃발에 두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장강수로맹(長江水路盟).
푸른 염료로 적힌 이 다섯 글자야말로, 이토록 드넓은 장강을 안전하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확실한 통행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통행증인 동시에 약탈자의 상징이기도 했다.
“저건…….”
“자, 장강수로맹! 수적 놈들이다!”
“꺄악!”
놀잇배를 띄워 놓고 잔치를 벌이던 풍류객들은 난리가 났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물을 걷던 어부들의 반응은 달랐다.
“지랄헌다. 술이나 마저 퍼먹을 것이지 비명은 왜 질러?”
“신경 쓰지 말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런데 저게 장강수로맹이 자랑하는 바로 그 쾌조선인가?”
“쾌조선이라면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지. 겁나게 빠른 걸 보니까 확실혀.”
“나도 저런 배 한 척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군.”
“고기를 얼마나 더 잡으려고?”
“뭔 소린가. 쾌조선이 있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고기를 잡아? 바로 수적으로 갈아타야지.”
본래 어부와 수적은 한 끗 차이다. 생계가 어려워지면 엊그제까지 물고기를 잡던 그물과 작살을 들고 약탈자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수적을 딱히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 이쪽으로 오는디?”
“놔두게. 그래 봤자 우리는 안 털어 갈 테니.”
“염병, 가진 게 없으니까 수적 놈들도 안 털어 가네.”
어부들은 대화를 나누며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구경했다.
어부 역시 거칠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뱃사람들. 세상 물정 모르는 얼뜨기 수적도 어부는 안 건드렸다.
겨우 푼돈을 뜯으러 왔다가 작살에 꿰이는 수가 있으니까.
그건 장강수로맹 입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 푼 얻기 위해 어부들을 약탈하는 건 수지타산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니 어부들 입장에서는 남의 집 불구경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더욱 속도를 높여 사라지는 쾌조선을 본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 그냥 가네?”
“그러게 말일세. 저 놀잇배에 건드리면 재미없을 만큼 대단한 집안 자제라도 있나?”
“그런 것치고는 신분도 확인 안 하고 휙 가 버리던디.”
“됐네. 무슨 상관인가. 더 늦어지기 전에 그물이나 마저 걷고 돌아가자고.”
“어, 그려.”
두 척의 쾌조선이 아무 일 없이 사라지자 놀잇배에서는 다시 흥겨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고, 입맛을 다신 어부들은 신경을 끈 채 자신들이 할 일에 열중했다.
고작 반 시진 뒤, 어디선가 정체 모를 괴성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끼얏메우!”
맨 처음, 그 괴성을 들은 어부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거 참. 적당히 해야지. 시끄럽게들 노네.”
“놀 줄 아는 놈인가 보군.”
“가뜩이나 힘들어 뒤지겄는디 끼얏메우 같은 소리 허네. 확 그냥 배 밑창에 구멍을 뚫어 버릴라.”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린 반백의 어부가 재차 그물을 잡아당기던 그때였다.
“간다! 간다! 간다! 숑 간다아악!”
“응. 그려, 내가 지금 간다. 이 개자석들아.”
작살을 집어든 어부가 눈깔을 뒤집으며 분노했다.
“시벌 안 되겄네. 내가 얼른 가서 밑창에 구멍 뚫고 올라니까, 아무도 말리지 마소.”
“잠깐, 잠깐만 기다려 보게.”
이제야 뭔가 이상함을 알아챈 어부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이거…… 놀잇배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진짜네. 뭐여, 그럼.”
“그러니까 소리가 들려온 방향이 아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불쑥 쳐든 어부들이 소리를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연주가 뚝 끊긴 놀잇배에서도 이게 뭔가 싶었는지, 휘황찬란한 비단옷을 걸친 남녀가 뱃머리에서 캄캄한 장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
“분명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디.”
“허, 무슨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던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아!
거칠게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오메.”
“저, 저게 뭐여.”
마침내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이 깊은 밤에 웬 청년이 상반신을 홀딱 벗은 채 장강을 가로지르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알 수 없는 줄에 묶여 앞에서 헤엄치는 거대한 생물체의 정체를 깨닫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 사어(鯊魚)! 사어다! 사람이 사어를 타고 있다!”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 순간 내려앉았던 적막을 깨트렸다.
그리고 모두가 깨달았다. 저 미친 소리가, 자신들이 보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콰콰콰콰콰!
사어. 거대한 몸뚱어리에 생김새가 흉측하며, 타고난 성정이 잔혹해 사람마저 잡아먹는다는 괴이한 물고기.
바로 그 사어가 사람을 태운 채 헤엄치고 있었다.
심지어…….
“하, 한 마리가 아니다!”
“지느러미가 하나, 둘…… 다섯 개. 사어가 무려 다섯 마리!”
실로 경악할 노릇이었다. 주로 대해(大海)에서 서식하는 사어가 장강에 나타난 것도 흔치 않은 일이지만, 무려 다섯 마리가 한곳에 모여 있다니.
하지만 고작 그 정도였다면 어부들이 지금처럼 넋 놓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할 말을 잃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보게,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나도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디.”
“내 눈에는 저 청년이 사어에, 그러니까. 어. 일종의 고삐를 씌워 몰고 있는 것 같은데,”
“몰러, 저게 뭐여. 무서워…….”
어부들의 대화처럼 다섯 마리의 사어에는 일종의 고삐가 물려 있었다.
다섯 개의 주둥이를 칭칭 휘감은 것은 은은한 빛이 감도는 밧줄로, 청년의 손에 꽉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좌로 꺾어!”
청년이 외침과 함께 손목을 당기면.
콰아아아아!
사어들이 동시에 좌측으로 이동하고.
“우로 꺾어!”
다시 손목을 반대편으로 돌리면.
콰아아아!
그에 따라 사어들의 방향도 틀어진다.
쉽게 지치지 않는 체력과 빠른 속도를 지닌 다섯 마리의 사어가 정면에서 물살을 가르고, 청년은 두 발로 강물을 지탱하며 따라갔다.
앞서 지나간 쾌조선에 비해 빠르면 빨랐지, 결코 부족하지 않은 속도.
“……시방 저게 뭐시여.”
누군가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 순간. 눈 깜짝할 새에 코앞까지 치달은 청년이 어부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부 어서 오고.”
“……!”
“초면에 죄송한데, 길 좀 물을게요. 혹시 아까 배 두 척 안 지나갔어요? 아마 반 시진에서 한 시진 전이었을 것 같은데.”
놀잇배 습격을 계획하던 어부가 작살을 내리며 엉거주춤 대답했다.
“봐, 봤는디요. 쾌조선 말하는 거 아뇨?”
“맞는데요. 장강수로맹. 후미에 딱 봐도 성격 개같이 생긴 어린애 하나 서 있고.”
“그, 그건 모르겠고. 쾌조선이라면 저기 저짝으로 갔소. 한 반 시진쯤 전에.”
“반 시진이요? 거의 다 따라잡았네. 후우, 시벌 거. 피똥 쌌다.”
“……?”
뱃사람 못지않은 찰지고 걸쭉한 단어 선택에 어부가 멈칫한 그때, 청년이 손에 묶인 기이한 밧줄을 슬쩍 풀었다.
뒤늦게 사어 한 마리가 풀려난 것을 알아챈 어부들이 기겁했다.
“으헉!”
“사, 사어가 풀려났다!”
“뒤로! 뒤로! 노 저어!”
하지만 어부들이 우려하는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어는 붕어처럼 온순하게 눈을 깜빡이며 청년을 바라볼 뿐이었고, 청년 역시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어? 아, 상어 말씀하시는 거구나.”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오!”
“뭘 걱정하시는지는 아는데, 우리 애는 안 물어요.”
“우리 애?”
“시범 보여 드릴게요, 자. 지느러미.”
어부들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청년이 손을 내밀기 무섭게, 눈을 뒤룩뒤룩 굴리고 있던 사어가 제 지느러미를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보세요. 말 잘 듣죠? 착하다니까요.”
착한 게 아니라, 착해진 것 같은데.
어부들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켰다.
너덜거리는 사어의 지느러미와 벌벌 떨리는 몸체는, 그냥 기분 탓이다. 기분 탓이어야 한다.
청년은 어부들이 자신의 근육을 바라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애가 원래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데, 저한테 처맞은 뒤로는 조절 잘하니까 괜찮을 겁니다. 이런 기회 또 없을 테니까 저한테 한 마리 분양받으세요.”
“예, 예?”
“답례요, 알려 주신 답례. 어차피 이제 슬슬 놔줘야 해서. 대신 먹을 것 좀 있습니까? 삼시 세끼 회만 먹었더니 배 속이 어항이 된 느낌이라.”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뭘 해야 신상에 이로울지는 본능적으로 안다.
어부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품에 넣어두었던 요깃거리를 건네주었다.
“여, 여, 여기 있소.”
“아, 예. 가, 가, 감사합니다.”
밍밍하게 간을 맞춘 주먹밥을 받아 든 청년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그럼 많이 잡으세요.”
콰과과과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순식간에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일인사어(一人四魚)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어부들은, 그가 남기고 간 유일한 흔적을 바라보았다.
흠칫!
괜히 사람 하나 잘 못 건드렸다가 호되게 처맞고 이제는 사람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 사어. 아니, 흰철갑상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이 된 어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이거면 쾌조선 없어도 되겠네.”
수적계의 새로운 신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장담하건대, 현대와 무림을 통틀어 나처럼 자연친화적인 수상스키를 경험해 본 사람은 없을 거다.
촤아아악!
“4번 상어. 자세가 흔들린다.”
흠칫!
“그래, 방금 움찔한 놈. 너. 개인주의냐?”
스스슥!
“그래, 지금처럼만 해라. 너 혼자 가는 거 아냐. 친구들이랑 지느러미 맞춰서 함께 가는 거야.”
물론 폭력을 좀 쓰긴 했다.
주먹 몇 대 맞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계속 덤벼들기에 지느러미도 좀 다져 주고, 이빨도 몇 개 뽑았다.
환경 단체가 봤다면 천인공노할 자연 파괴범이요, 죽어서도 고통받을 어류 학대범이겠지만 처음부터 신경 안 썼다.
‘내가 뭐 샹크스도 아니고.’
덤벼드는 상어가 배고파 보인다고 팔 한 짝 내주는 대인배는 고전 만화책에서만 등장하는 거다.
나는 한 놈을 붙잡아 정신 교육한 뒤 동족을 불러왔고, 상어 수상스키단을 창단했다. 일명 잡으리 양식.
‘그래도 이 녀석들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지.’
나는 흐뭇한 눈빛으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해 준 수상스키 단원들을 바라보았다.
한나절 간 휴식과 이동을 반복하며 한때 바닥을 쳤던 공력도 어느 정도 보충했고, 쾌조선과의 거리도 상당히 좁혔다. 열심히 일한 노동의 대가는 자유다.
“자, 다들 가라.”
녀석들의 주둥이에 묶은 밧줄, 아니 지난번에 꿍쳐 두었던 [수신룡의 힘줄]을 풀어준 그때였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나는 불쑥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깊은 어둠 너머, 수면을 밟으며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