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17
#516화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몇 배로 힘들어지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열흘 밤낮 동안 혹사한 몸뚱어리는 더 이상 쥐어 짜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부지, 지금 갑니다.’
간만의 부자 상봉을 이렇게 하게 되나. 발버둥 치던 팔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던 그 순간이었다.
덥석!
서서히 흐려지던 눈앞이 또렷해졌다.
내 손목을 굳게 틀어쥔 누군가의 손. 물이 하도 들어가는 바람에 먹먹해진 귓가로 한 사람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노부보다 먼저 갈 생각을 하다니. 이런 고얀 놈을 보았나.”
도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 나루터로부터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다가온 적천강이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비로소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전신의 긴장이 탁 풀렸다.
“……어흐.”
참았던 숨을 토해 내는 내 모습에 적천강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래도 숨은 붙어 있구나.”
“신기하네요. 저 아직 살아 있습니까?”
“이놈 보게. 오냐, 살아 있다.”
“그럼 보지만 말고 올려 주십쇼. 진짜 골로 갈 것 같은데.”
“엄살하고는. 아직 백 년은 이르다.”
촤아아악. 투둑.
강한 힘이 내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퉁퉁 불어 있던 몸뚱어리에 달라붙어 있던 수초(水草)가 강물과 함께 쏟아져 내린다.
“보이느냐?”
“누구요, 하느님?”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기진맥진한 채 눈을 깜빡였다. 저 멀리 나루터에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과,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팔을 붕붕 휘두르고 있는 청풍, 눈을 동그랗게 뜬 궁기방과 혁무진. 거의 통곡하는 중인 진위경.
그리고……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문경.
– 하남(下南)에 온 것을 환영한다.
짤막한 전음을 마지막으로, 나를 끌어안은 적천강의 발이 지면에 닿았다.
동시에 귓가를 파고드는 맑은 종소리가 있었다.
띠링. 띠링. 띠링.
– [가짜 무림인 2단계]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희귀한 업적, [일위도강一葦渡江]을 달성하셨습니다!
– 놀라운 끈기와 노력을 보여 준 대가로, 그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 [공력]의 수발이 한층 자유로워집니다! 무공의 위력과 효율이 상승합니다!
– 모든 능력치가 소폭 상승합니다!
– 보너스 포인트 50을 획득했습니다!
–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 업!
연이어 울리는 시스템 알림. 그리고 허공을 가득 메운 홀로그램 창.
나는 레벨 업 메시지와 함께 가벼워지는 몸을 느꼈다. 동시에 파도처럼 밀려드는 졸음도.
“……노야.”
“응?”
“저, 깨우지 마세요.”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무거워진 눈꺼풀과 함께 찾아온 수마(睡魔)가 나를 덮쳤다.
* * *
여기가 어디지?
눈을 뜨자마자 처음으로 든 생각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는 사방.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자 비로소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늪.’
그래, 이곳은 늪이다.
인간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모를 백골이 곳곳에 널려 있었고 헛구역질이 날 만큼 끔찍한 악취가 풍겼다.
더욱 지랄 맞은 사실은, 이런 와중에도 내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거다.
철벅.
신발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 끈적한 진흙을 밟았다. 멈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보지만 내 몸은 이미 통제를 벗어났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몸이 서서히 늪 깊숙이 가라앉던 그때였다.
솨아아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늪지대에 숲을 이루고 있던 앙상한 나무들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짙은 어둠 너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빛이 솟구쳤다.
‘……저건.’
불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누군가의 눈동자에 가까웠다.
한 줌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소름 끼치는 안광(眼光)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올 수 있으면 와 보라는 듯이.
흔한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안간힘을 쓰며 기어가겠지만…….
‘니가 와, 새꺄.’
클리셰 좆 까.
이미 사이즈 파악을 끝낸 후다.
척 보아하니 요즘 고생을 하도 해서 악몽을 꾸고 있는 모양인데, 굳이 장단 맞춰 줄 필요는 없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저 붉은 안광을 마주한 순간 오줌이 마려웠겠지만, 나는 화염신장이 마려운 사람이다.
단지 아주 약간,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철벅. 철벅.
‘아, 시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은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늪 깊숙이 가라앉은 하반신으로 자맥질하듯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나아간다 해도 영영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저 안광의 주인을 만나기도 전에 내 몸이 늪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 빨리 끝내자.’
그렇게 반쯤 체념한 그 순간이었다.
콰득!
‘흡!’
목을 조여 오는 정체불명의 무언가.
부릅뜬 눈동자에 매끄러운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몸뚱어리가 보인다. 낮게 쉭쉭거리는 울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뱀?’
아니, 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니 구렁이라고 해야 맞겠다.
굵은 몸뚱어리가 내 목을 시작으로 두 팔까지 칭칭 묶어 버렸다.
‘흐읍.’
젠장. 요즘은 꿈도 그래픽 패치를 하나. 왜 이렇게 생생해?
썩은 진흙은 이미 목까지 차올랐고, 콧속을 파고드는 악취에 헛구역질이 절로 나온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늪으로 가라앉던 나는 붉은 안광과 눈이 마주쳤다.
‘……!’
등골을 타고 솟구치는 서늘한 기운.
순간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선명한 두려움이 엄습한다. 이게, 이런 게 단순한 악몽일 리 없다.
동시에 소름 끼치는 위화감이 나를 감쌌다.
‘이 느낌…… 왠지 모르게 익숙해.’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였을까. 기억해 내기 싫은 기억을 헤집던 내가 전신을 부르르 떤 그 순간.
파앗!
어디선가, 눈부시도록 환한 빛이 폭발했다.
불길하리만치 음습한 기운을 흩뿌리던 붉은 안광이, 사방을 집어삼켰던 어둠마저 깨져 나가고 서늘한 한기가 사라진다.
전신을 감싸는 따사로운 온기를 느끼며, 나는 눈앞까지 다가온 빛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덥석!
……응?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빛이 왜 덥석 잡혀. 그리고 왜 이렇게 촉감이 좋아. 분명히 꿈에서 깼는데 왜 아직도 만져져.
문질문질.
진짜 뭐지, 이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슬쩍 감았던 눈을 떴다.
환한 빛, 아니 반질반질한 누군가의 머리가 그곳에 있었다.
이마에는 승려들이 찍는 계인(契印)이 보였다.
“크리링?”
크리링, 아니 난생처음 보는 승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진 시주.”
“실례지만 누구……?”
“빈승은 정호라고 합니다.”
정호가 누구야.
잠깐 고민하던 나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더듬더듬 물었다.
“혹시 가람중학교 3학년 6반 박정호……?”
“예?”
“너 언제 스님 됐냐.”
“족히 사십 년 정도…… 아니, 잠깐 제 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시주.”
“어, 그러고 보니까 이 새끼. 신부 할 거라고 하더니 언제 갈아탔대. 배교자네, 배교자. 순복음교회 십자군한테 얻어맞았나 얼굴 폭삭 늙은 것 봐라. 어디 절에 취직했어?”
간만에 만난 동창 녀석이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림에서 계율원주를 맡고 있지요.”
“소림?”
“예, 소림. 소림사를 말씀드린 겁니다.”
“잠깐 있어 봐, 소림사면.”
엇. 시벌. 뭐야 이거.
그제야 정신이 확 든다. 황급히 고개를 흔들어 잠을 털어낸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순간 잠이 덜 깨서.”
“이해합니다.”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대답한 중년의 승려, 정호가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빈승의 머리에서 손을 좀 떼 주시겠습니까. 아까부터 계속 만지고 계시는데…….”
“어이쿠.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이 양반, 표정이랑 말이 전혀 매치가 안 된다.
마음 같아선 한소리 하고 싶은데, 그래도 받은 도움이 있어서 참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왜 눈 뜨자마자 소림사 계율원주가 옆에 있지.’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한 번에 열 명도 묵을 수 있을 만큼 큰 방. 반쯤 열린 창밖으로 스며들어온 햇빛이 정호의 이마를 받아 번쩍거리고, 익숙한 얼굴들은…… 바로 내 주위에 널려 있다.
‘꿈은 꿈인데, 절반은 현실이었구만.’
어쩐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다고 했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가장 먼저 발치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덩어리를 걷어찼다.
퍽!
“핫. 오늘 점심은 고기만두!”
“…….”
아니, 저 기상 구호 뭔데.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벌떡 일어난 청풍이 졸린 눈으로 입을 열었다.
“아, 은인. 안녕히 주무셨어요?”
“주무시긴 했는데, 안녕하진 못했어.”
“왜요? 그럼 더 주무세요.”
“……장난해? 헛소리 그만하고 이놈이나 얼른 떼어 내.”
“앗, 미미야! 이리 와!”
뒤늦게 내 목을 휘감고 있는 애완 뱀을 발견한 청풍이 외치자, 두꺼운 몸통이 스르륵 가슴을 타고 내려간다.
아니, 잠깐. 두꺼운 몸통?
나는 흡사 구렁이가 되어있는 천년독각사의 모습에 입을 딱 벌렸다.
“청 소협. 그놈 원래 그렇게 컸었어?”
“아뇨. 요즘 부쩍 자랐어요. 한창 클 때잖아요.”
“몇 살인데.”
“당씨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아직 백 살도 안 됐대요.”
“……어, 그래.”
“이러다가 저보다 커질지도 몰라요. 아, 나도 빨리 더 커야 하는데.”
“이미 다 컸어. 기다려 봤자 더 안 자라.”
“아니에요. 미미도 나이 먹을수록 더 커지는걸요. 저도 계속 자랄 거예요.”
“……?”
그럼 시바, 적천강이나 문경은 키가 최소 삼 장은 넘어야 하는 거 아니냐.
착잡하게 청풍을 바라보던 나는 설득을 포기했다. 대신 바로 옆에서 끔찍한 악취를 풍기고 있는 주둥이를 후려쳤다.
빡!
“어억!”
“내가 이 닦고 자랬지. 이 거지 새끼는 아가리가 아주 그냥 늪이야, 늪.”
“흐어. 흐어어.”
강제 기상한 궁기방이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봤다.
“왜 맨날 나만 갖고 그러나!”
“너만 갖고 그러진 않지. 이놈도 똑같이 처리할 거니까.”
사람은 평등해야 하는 법.
잠시 후, 내 한쪽 다리를 부여잡은 채 쿨쿨 잠들어 있던 혁무진에게도 비슷한 운명이 찾아왔다.
빠악!
“악! 왜 저만 갖고 그러십니까!”
“너희 대사 정해 놨냐? 아니면 어릴 적 헤어진 형제, 뭐 그런 거 아냐?”
“저만 때리지 말고 궁 소협도, 어. 깼네.”
“……후, 웬수 같은 놈들.”
나는 작게 투덜거리는 혁무진을 뻥 걷어차 침상 아래로 떨어트렸다.
이놈들 때문에 평소에는 잘 꾸지도 않는 꿈까지 꿨다. 그것도 찝찝하기 짝이 없는 악몽을.
‘그 안광.’
다시 떠올려 봐도 섬뜩한 붉은 빛.
꿈속에서 느꼈던 정체 모를 위화감을 다시금 되짚어 보려던 그때. 소란을 틈타 잠시 자리를 비웠던 정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진 시주.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예.”
정호의 말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남의 머리를 볼링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문질러 댔으니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말씀하십시오. 스님.”
“다름이 아니라, 빈승의 사숙께서 시주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
“사숙이요? 혹시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분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다고…….”
어쩐지. 느껴지는 기척이 왜 두 개인가 했다.
그나저나 정호의 사숙이라면 소림의 고승(高僧)인 건 확실한데,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고 싶다니.
‘누구지? 저렇게 말하는 것 보면 틀림없이 구면일 텐데.’
소림에 나와 그 정도 인연을 쌓은 사람이 법왕 말고 또 있던가.
의아함도 잠시,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그리고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미간을 좁혔다.
“실례지만 누구…….”
호리호리한 체구에, 드러난 피부 위로는 흉터가 빼곡하다. 난생처음 보는 인상파 승려의 입술 사이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행입니다. 비록 하늘을 흐려졌으나, 북쪽에서 떠오른 신성(新聲)은 더욱 밝아진 듯하군요.”
“……!”
“잘 지내셨습니까. 시주.”
그제야 깨달았다. 눈앞의 승려가 누구인지.
나는 너무나도 달라진 분위기와 겉모습에 쉽게 떠올리지 못했던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무명(無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