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20
#519화
쿠웅!
불길에 휩싸인 커다란 객잔. 검게 그을린 목제 기둥이 쓰러지고 잿가루가 피어오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마귀의 얼굴은 너무 익숙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이게 다 뭐 하는 짓거리냐?”
“…….”
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 나를 바라보는 무명의 시선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작게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전음(傳音)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 왜, 왜 적 시주께서 저기에서 나오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암천 아니었습니까?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데, 그건.
– 아미타불. 혹시 암천이십니까?
아니,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우리가 암천이면 넌 바티칸 교황청 소속이냐.
무명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전음 도청에 일가견이 있는 적천강의 얼굴은 이미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뭐? 노부가, 암천?”
“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지금 사소한 오해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해를 풀고자 한 내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무림맹 창설을 앞두고 한껏 전의를 불태우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무림 십자군이 용납하지 않았다.
“암천!”
“마두가 스스로 암천이라고 밝혔다!”
키워드 입력.
“잠깐 기다려 보시오. 열화신룡과 아는 사이 같은데.”
“당연히 아는 사이겠지! 열화신룡이 암천과 싸운 것이 한두 번인가!”
“그렇군. 암천의 마두다!”
기적의 논리.
“마귀 같은 놈! 생긴 것도 흉신악살이 따로 없구나!”
“머리카락도 죄다 시뻘건 것이, 세상을 피로 물들일 상이로다!”
외모 비하.
“일단 죽여라!”
“놈을 잡으면 영웅이 된다!”
중세 십자군식 결론 도출.
이 모든 전개가 찰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짧은 시간 만에 이루어졌다. 어느덧 천여 명에 달하는 무림 십자군의 집단 광기에, 넋이 나가 있던 나와 무명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미타불! 모두 멈추십시오! 저분은 소승의 스승님이신 굉도 선사의…….”
무명의 외침에, 비교적 가까이에 있던 무림인들이 눈을 부릅떴다.
“헛.”
“그게 사실이오?”
이제야 좀 말이 통하겠는데요.
딱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무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허어. 그냥 마두도 아니고 굉도 선사를 해한 흉수라니!”
“예?”
“천인공노할 마두 같으니! 저놈의 사지를 찢어 죽여라!”
“…….”
시벌 못 해 먹겠네, 진짜.
이 무림인이라는 새끼들은 사람 말을 끝까지 들으면 주화입마에 걸리기라도 하는지, 도무지 알아 처먹으려고 하질 않는다.
그리고 이 집단 광기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서 모습을 드러낸 낯선 인물이었다.
“멈추어라, 악적! 감히 하남에서 이런 참혹한 짓을 벌이다니!”
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을 입을 벌린 채 바라보던 적천강이 참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것들이 죄다 제정신이 아니군. 우선 노부의 말부터 듣고…….”
“문답무용! 이 월미도(月美刀)가 네놈을 용서치 않으리라!”
“……일단 맞자.”
그래, 적천강 성격에 저 정도면 오래 참았다.
쉬익. 파팡!
월미도 디스코팡팡 잘 가고.
빛살처럼 쇄도하던 월미도의 신형이 포탄처럼 도로 튕겨 나가 잔해 깊숙이 처박혔다. 이 자리에 모인 무림인들의 입장에서는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었던 일권(一拳). 그 엄청난 무위에 주위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워, 월미도가 단 일 격에……!”
“아아, 마두의 무공이 하늘에 닿았구나!”
무공은 둘째 치고 분노가 하늘에 닿은 것 같은데. 그리고 굳이 내가 아니어도 지금의 적천강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는 듯했다. 마두를 쓰러트려 이름을 알리고는 싶지만, 쓰러지기는 싫은 것이 사람 심리 아닌가.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모두가 잠잠해진 지금이 오해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나는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하던 그때였다.
“심각한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기 계신 분은 마두가 아니라…….”
“갈(喝)! 모두 길을 터라!”
“아이, 씻팔!”
돌아 버리겠네. 어떤 새끼야, 또.
하지만 홍해처럼 갈라지는 인의 장막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방해꾼은 내가 새끼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벽력도왕(霹靂刀王)께서 오셨다!”
“팽 대협께서 친히 마두를 단죄하고자 오셨다!”
저벅. 저벅.
용기백배한 분위기 속에서 걸음을 옮기는 거대한 덩치의 노인. 딱 벌어진 어깨와 부리부리한 눈. 어깨에 엄청난 크기의 도를 걸친 벽력도왕의 모습에 적천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상대가 왔군.”
동감이다.
벽력도왕이라면 적천강과 티격태격하기는 해도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이다. 오랜 앙숙이라고 쓰고 친우라고 읽을 수 있는 상대이기도 하다. 그라면 어렵지 않게 적천강의 정체를 알아차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적천강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벽력도왕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이야기하자면 길어. 우선 사람들부터 물려라.”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라.”
“응?”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마두 새끼가 여기서 뭐 하냐고.”
“……!”
“……!”
적천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 * *
다그닥. 다그닥.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말발굽 소리만 울려 퍼진다. 말없이 마차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거구의 노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사실 보자마자 눈치챘지. 모를 수가 없었어.”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벽력도왕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적발에 적염이라면 누가 봐도 화왕이지. 다른 사람들은 적가가 반로환동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겠지만,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어.”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내가 물었다.
“그런데 왜 다짜고짜 도를 휘두르신 겁니까?”
“그건…….”
“아, 한 수 교환하고 후달리시니까 전원 총공격 명령하신 이유에 대해서도 추가 설명 요구합니다.”
“후달려? 허허허.”
또다시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불신 가득한 눈빛을 마주한 벽력도왕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건, 실전을 경험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아. 실전이요.”
“곧 벌어질 암천과의 싸움을 위한 초석이랄까. 상대가 화왕 적천강이라면 모두에게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느냐.”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그 경험이라는 게, 사후 세계 경험 말씀하시는 겁니까?”
“…….”
벽력도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양심이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의방으로 실려 간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스무 명에 달한다. 그중 대부분이 화왕과 벽력도왕, 두 십왕(十王)이 주고받은 공격의 여파에 휘말린 삼류 무인이었다.
‘그 정도로 끝난 거면 다행이긴 한데.’
일제강점기의 윤동주 시인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면, 그들은 휘몰아치는 칼바람에 존나 아파했다.
“그……래도 다들 무사하다고 들었는데.”
“무사하죠. 최소한 앞으로 보름 동안은 무사할 겁니다. 의방에만 누워 있을 테니까.”
사후 체험의 결과는 확실했다.
아무리 칼끝에서 살아가는 무림인이라고 해도 PTSD는 무시 못 한다. 의방에 들러 피해자들을 만나 봤더니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말도 못 하더라.
특히 월미도인지 하는 낭인은 심각했다. 얼마나 몸을 떨어 대는지, 하남이 아니라 남극 세종기지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팽 대협께서 총공격 명령만 안 내리셨어도 이런 일까지는 안 일어났습니다.”
계속되는 내 맹비난에 벽력도왕이 고리눈을 치켜떴다.
“그러는 네놈은?”
“저요?”
“그래. 네놈 말이다! 인근에 있는 무림인들을 싹 다 긁어모아 온 것이 네놈 아니냐!”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불가항력이었어요. 안 그래요?”
내 물음에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공범, 무명이 염주를 어루만졌다.
“진 시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설령 석가모니께서 빈승과 같은 처지셨다고 해도 멸마(滅魔)를 부르짖으며 달려가셨을 겁니다.”
“보리수나무 뽑아서 마두 대갈통 으깨기 가능?”
“아미타불. 가능.”
“…….”
적천강 못지않게 한 성깔 하는 벽력도왕이지만 무명만큼은 대놓고 핍박하지 못했다. 절친한 벗이었던 법왕 굉도가 남긴 유일한 제자는 그에게 있어 아픈 손가락이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흘린 벽력도왕이 나를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그런데 이놈이 아까부터!”
“뭐요. 왜요.”
“너, 나랑 친하냐?”
“안 친한데요.”
“그럼 하북팽가가 우스워?”
“그게 왜 또 그렇게 됩니까? 괜히 할 말 없으시니까 논지를 흐리시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자꾸 아까부터 따박따박 말대꾸를…….”
“어우. 틀니 딱딱.”
틀니가 정확히 뭘 뜻하는지는 몰라도, 말에 담긴 감정은 제대로 전해진 것이 분명했다.
“이놈이 감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벽력도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그때,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고정하시오, 팽 대협.”
“시끄럽다. 전부 주둥이 닫아라.”
전혀 다른 목소리와 분위기. 어쩌면 십왕(十王)이라는 두 글자만이 두 사람을 이어 주는 유일한 공통점일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경솔했던 것 같소. 오랜만에 피가 끓어올라서 그만.”
담백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창천검왕(蒼天劍王)을 뒤따라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노부는 하나도 잘못한 것 없다. 네놈들이 경솔했던 거지.”
“…….”
그래, 이래야 우리 노야지.
늘 푸른 상록수가 따로 없다. 벽력도왕이 이게 사람인가, 하는 표정으로 적천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적가야. 네놈은 죄책감이 조금도 안 느껴지나?”
“노부가 죄책감을 왜 느껴? 무인들끼리 만나면 푸닥거리 한번 할 수도 있지. 객잔 들어갔을 때도 이미 치고받고 싸우는 놈들 있더만.”
“남궁 대협이 때마침 나서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느냐!”
벽력도왕의 말대로, 사태를 수습한 평화의 비둘기는 바로 창천검왕이었다. 적천강과의 짧은 공방 끝에 약간의 내상을 입은 그는 공력을 가라앉힌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는데, 군웅 사이에 포함되어 있던 남궁세가의 식솔 하나가 그를 알아본 것이다.
‘어어, 어어어! 태상 가주니임!’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비명이었지.
암천이라는 두 글자에 눈깔이 뒤집혀 있던 다른 무림인들도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남궁세가도 암천이었냐고 묻는 미친놈도 있긴 했지만, 우리의 자랑스러운 무림 십자군 구성원들은 다행히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실 적천강이 반로환동만 안 했어도 알아볼 사람들이 몇 명 정도는 있었을 거다.
“하마터면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팽가 네놈 눈깔이 개눈깔이라 그런 일이 벌어진 거지.”
“객잔이 무너지고! 사람이 다치고!”
“크흠.”
본인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헛기침을 내뱉은 적천강이 이내 뻔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적당히 힘 조절 했어. 기껏해야 무너지는 잔해에 조금 부딪힌 정도인데 그 정도면 침 바르면 낫지. 객잔 주인에게는 충분히 보상할 거고. 노부가 봐도 좀 많이 타긴 했더군.”
“……구화산 태워 버렸다고 마교도 천 명을 죽인 그 인간이 하는 말이 맞나? 듣다 보니 가슴이 웅장해지는군.”
“그건 당연히 죽여야지. 그 썅노무 새끼들은 처음부터 보상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
뭘까. 말도 안 되는 억지인데 나름대로 논리정연한 이 느낌은.
순간 말문이 막힌 벽력도왕이 중얼거렸다.
“……반로환동으로 뒤집어쓴 가죽만 바뀌었지, 알맹이는 여전하군. 여전히 성격이 지랄맞아.”
“팽가 네놈은 얼굴 가죽이라도 좀 바꿔 봐라. 반로환동도 못 하고 나이만 처먹은 놈이 무슨.”
“뭣이!”
“어허. 반로환동 못 한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모양이군.”
“적가 네놈이 감히!”
“응? 뭐라고? 반로환동도 못 한 무명소졸이 하는 말이라 잘 안 들리는데?”
광역 딜 야무지게 넣는 것 보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봤다. 마차 창가 자리에서 어깨를 움찔거리는 창천검왕의 모습을. 그때,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입술이 불쑥 열렸다.
“두 분, 이제 그만하는 것이 좋겠소.”
처음에는 단순히 화제를 돌리려나 싶었던 나는, 이내 창천검왕을 따라 창밖의 풍경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어. 확실히 그러시는 게 좋겠네요.”
내 시선 끝에는 길게 늘어선 성벽과 수많은 인파가 있었다. 그리고 철문 위의 거대한 현판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적혀 있는 세 글자도 함께.
무림맹(武林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