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34
#533화
앞서 소란이 일어난 삼 층은 이미 싹 비워진 지 오래였다.
무림인들 간의 싸움으로 난간이며 벽면까지 무너진 흉흉한 상황에,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기울일 만큼 간 큰 이들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고월루에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풍족하고 신분 높은 무림인들은 객잔이 아니라 주루를 찾기 마련.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도 웃고 있는 불청객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림인.’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다.
많이 쳐 줘야 이제 이립이나 되었을까 싶은 사내는 시원시원한 미남형이었고 허리춤에는 거무튀튀한 색을 띤 도갑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기세.’
나는 내심 탄성을 흘렸다.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힘과 기세는 지금껏 내가 만난 십봉룡의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심지어 폐관에 들어가기 전의 진무경보다도.
‘그럼 설마?’
아직 만나지 못한 누군가의 이름이 뇌리를 스친다.
일기천룡(一騎天龍) 모용영휘. 모용세가의 대공자이며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열 명의 용과 봉황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자.
‘기감으로 이름을 확인해 봐야 하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그때, 똥 마려운 표정으로 다가온 혁무진이 입을 열었다.
“그, 여기는 제 지인입니다. 조장님을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해서…….”
나는 사내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무진아.”
“예?”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거 믿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지?”
“흡.”
“사실대로 고한다. 실시.”
“……바지에 똥을 지렸는데 저자가 도와줬습니다.”
“대충 알 만하네. 넌 이따가 보자. 옆으로 빠져 있어.”
혁무진이 자살 마려운 표정으로 물러나자 사내의 입가에 맺힌 웃음이 짙어졌다.
“이거 참. 생각 이상으로 눈치가 빠르군.”
“눈치랄 것까지야. 포목점 아들놈한테 이런 친구가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니까.”
“흠, 그건 몰랐는데. 사실은 그다지 큰 기대도 안 했지만.”
“그런데 초면에 자기소개가 늦으신데. 누구?”
“지나가던 과객이라네.”
“말도 짧으시고.”
“듣기 뭣하면 그쪽도 말 놓지 그러나. 편하게.”
묘한 놈이다. 지금까지 만난 녀석들과도 느낌이 달랐다. 나는 느슨하게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럼 그러지 뭐. 편하게.”
그런 내 모습에 사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열화신룡에 대해서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듣던 것보다 재미있는 성격이로군.”
“이쪽 입장에서는 엄청 재미있는 상황은 아닌데. 그나저나 자기소개는 여전히 지나가던 과객으로 할 생각인가?”
“날 모르는 모양이군. 이미 벌써 몇 사람은 아는 눈치인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내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주화란과 궁기방, 그리고 송일섬이 있었다.
불과 촌각 전만 해도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던 주화란이 딱딱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소문주.”
소문주?
나도 모르게 의문 섞인 목소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주 소저. 아는 사이입니까?”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감숙성(甘肅省)에서.”
“감숙이라면…….”
정마대전 당시 청해, 사천과 더불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구파일방 중에서는 공동파가 위치한 땅이기도 했다.
나는 물끄러미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공동파 도사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내 눈이 잘못된 거면 지금 말해.”
“아니, 제대로 봤네. 오히려 그 반대지.”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나 같은 사마외도(邪魔外道)와 엮인 걸 알면 공동파가 기분 나빠할걸. 물론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사마외도?”
“흑룡마문(黑龍魔門)이라고 들어 봤는지 모르겠군.”
흑룡마문. 기억 속에서 그 네 글자를 떠올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들어 보긴 했지.”
언제였던가, 감숙성을 주름잡는 사파 문파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제아무리 공동파의 위세가 구파일방 중에서도 가장 약한 축에 든다 해도, 세인들로부터 배척받는 사파가 그렇게까지 힘이 있다는 이야기에 상당한 신선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야 알겠네. 왜 이놈이 십봉룡에 들지 못했는지.’
함께 자리하고 있는 송일섬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주위에서 천하 무림, 무림 동도를 부르짖어도 결국 그들만의 리그가 존재하는 법.
사람들, 아니 정파 무림인들은 재물에 검을 파는 낭인과 예비 범죄자나 다름없는 사마외도를 십봉룡에 끼워 넣기 싫었던 거다.
“그래서, 그 흑룡마문의 소문주씩이나 되는 분이 여긴 무슨 일로?”
내 물음에 사내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그게 끝인가?”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그건…….”
“아, 더 말하고 싶으면 별호나 대 봐. 까먹을 수는 있지만 일단 알고는 있어야지.”
“……흑룡도(黑龍刀) 사마표.”
“이름은 안 물어봤는데. 뭐, 일단 알겠다.”
“…….”
“그나저나 이름 멋있네. 혹시 사마의랑 무슨 관계냐?”
“뭐?”
“뭐긴 뭐야, 사마의라고. 삼국지 나오는 그 사마의.”
사내, 아니 사마표가 당혹감에 물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성씨만 같을 뿐,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래? 아쉽네. 제갈세가랑 철천지원수면 내가 아는 놈 하나 소개해 주려고 했는데.”
“……그렇다고 제갈세가와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지.”
“어. 그건 그러네. 그럼 용건이나 말해 봐.”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마표가 입을 열었다.
“수하를 데리러 왔다.”
“수하?”
“그래. 저기 앉아 있는 저 곰 같은 녀석.”
누굴 향한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중에 단 한 명도 없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팔척장신의 거한은 엄청난 덩치가 무색하게도 잔뜩 몸을 수그린 채 사마표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태산(太山). 일어나라.”
저놈도 흑룡마문이었어?
그나저나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이름 한번 기똥차게 어울리네.
사마표의 부름에 그야말로 산 같은 떡대를 지닌 거한, 태산이 어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군. 나, 태산이 아니다. 사람 잘못 봤다.”
“…….”
쟤는 진짜 지력 스탯 좀 찍어야 할 것 같은데.
사마표가 끌끌 혀를 찼다.
“사고뭉치 녀석 같으니. 내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사고를 치는구나. 그만하고 일어나거라.”
“안 된다. 아직 음식 안 나왔다.”
“이런 곰 같은 놈을 보았나. 그렇게 먹고도 모자란단 말이냐?”
“오늘. 여섯 끼. 겨우 먹었다.”
“뭐라? 여섯 끼?”
사마표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겨우 여섯 끼라니. 내상이라도 입은 게냐?”
“…….”
“…….”
시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오네.
나를 포함한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사이, 잠시 고민하던 사마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먹고 가자.”
“식사! 좋다! 태산이 여기 있는 음식 다 먹을 거다!”
내가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제발 태산인지 금수강산인지 하는 저놈 데리고 꺼져 주면 안 될까.”
어딜 이 미친놈들이 은근슬쩍 합석하려고.
내 단호한 태도에 사마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박하군.”
“맞다! 야박하다! 그런데 주군. 야박한 게 뭔가?”
“태산아. 그건 야이씨박새끼들의 줄임말이란다.”
햇님반 어린이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준 나는 계단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제발 가라. 씨박새끼들아.”
“……!”
순간 묵직한 공기가 주위를 짓눌렀다.
주화란은 숨을 뱉으며 허리에 찬 연검에 손을 가져갔고, 느슨한 자세로 앉아 있던 송일섬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이처럼 갑작스러운 그들의 경계심은 단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사마표.’
하지만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눈동자가 조금 커졌고, 알 수 없는 생각이 담긴 눈빛으로 날 응시할 뿐이다.
이내 굳게 다물어졌던 입술이 열리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선하군. 감숙에서, 아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겪지 못했던 경험이야.”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워. 앞으로 많이 해 줄 테니까 걱정 마.”
“앞으로도 많이?”
“내 생각에는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 아니면 말고.”
“확실히 다르군. 달라. 그렇지 않으냐?”
마지막에 덧붙인 물음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퉁방울만 한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고 있던 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 맞다. 저 사람. 다르다.”
“그래, 그런 듯싶구나.”
도통 뜻을 알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마표가 한참 위에 있는 태산의 목덜미를 붙잡고 끌어올렸다.
“환영받지 못하는 자리에 오래 있기는 힘들겠다. 이만 가자, 이 녀석아.”
“태산. 아쉽다. 하지만 주군 따른다. 말 잘 듣는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다음에 또 보자고. 열화신룡. 그리고 주 소저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객잔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주화란의 굳어 있던 얼굴이 살짝 풀렸다.
“후우.”
나지막한 한숨. 이어 송일섬 역시 바로 세웠던 허리를 등받이에 느슨하게 기댔다.
“전보다 더 강해졌군. 아니, 위험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 말을 듣자 아까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 더 깊어졌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저쪽과 일면식은 물론 어떤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뭐지?’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누군가가 탁자 아래로 내 발을 건드렸다.
툭. 툭.
볼 것도 없이 궁기방이다. 신호를 전달한 녀석이 거스러미가 가득한 입술을 달싹였다.
– 아무 말도 하지 마. 묻지도 마.
– 왜?
– 그냥 하지 마. 시발 새끼야.
이 자식이 미쳤나. 도대체 뭐길래 이래?
하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뻔하다. 굳이 당사자에게 물어보진 않아도, 그 사실을 아는 누군가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듣고 싶어지는 것이다.
– 뭔데 그래.
– 싫어. 안 말해 줄란다.
– 왜?
– 들어 봤자 좋을 것 없으니까.
그때 궁기방의 바로 옆자리, 나와 곧장 마주 보는 위치에 앉아 있던 주화란이 웃는 얼굴로 접시를 건넸다.
“이거 드셔 보세요. 진 대협.”
“아, 예에.”
웃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웃음이 안 나온다.
나는 주화란에게 받은 음식을 쑤셔 넣으며, 계속해서 전음을 보냈다.
– 말해.
– 싫다니까.
– 말하라고.
– 싫다고.
이 새끼가 그런데 진짜.
차라리 아는 척이라도 하지 말든가. 하도 철벽처럼 꿈쩍하지 않으니 부아가 치민다.
그리고 내가 재차 전음을 날리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 진 대협. 깜빡하고 말씀을 못 드린 게 있는데.”
“좋게 말할 때 뭔지 말하라, 예?”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입에 가득 음식을 넣은 채 고개를 든 내게, 주화란이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이요. 흑룡마문의 소문주.”
“사마표요?”
“음. 네.”
“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일이라면 일이고. 아니라면 아닌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화란이 한 마디를 던졌다.
아니, 그건 폭탄이었다.
“저 사람. 한때 제 정혼자였어요.”
“푸우우우웃!”
“꺄아아아악!”
“으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