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37
#536화
이룡각(二龍閣).
귓가에 닿은 단어는 처음 듣는 것이었고, 그만큼 낯설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이룡각의 주인들.’
그것이 나와 청풍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다음 순간, 매종학의 입술 사이로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열화신룡 진태경. 가까이 오라.”
말투도, 분위기도 다르다.
평소 친구라 부르며 내게 장난을 걸었던 모습은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상승검 종리추도, 검성 매종학도 아니다.
저벅.
크게 심호흡하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간 나는 무림맹의 맹주를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태원진가의 진태경, 맹주님을 뵙습니다.”
나를 응시하는 매종학의 눈동자에 빛이 서렸다.
“태원진가는 오랜 세월 의기(意氣)의 표상이었다. 굶는 이를 배불리 먹였고, 병든 이는 보살폈으며 중원이 위험에 처할 때면 언제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맞서 싸웠지.”
삼백 년. 자그마치 삼백 년이다.
태원진가의 뿌리는 명문가라 불릴 만큼 깊고 단단했다. 흔들릴지언정 뽑히지 않았고, 걸음이 휘청일지언정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그대는 이 년 전 겨울. 한 핏줄이자 가문의 대장로였던 화양검 진백양을 직접 베었다. 은영각주. 그 이유가 무엇인가?”
조용히 시립해 있던 은영각의 수장, 천면호리 송호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배반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암천의 뜻에 따라 움직인 그는 태원진가뿐만 아니라 무림의 배반자였습니다.”
“확실한가?”
“속하의 목숨을 걸지요.”
목숨을 걸 필요도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으니까.
아니, 무림의 소식에 조금이라도 귀가 밝다면 누구라도 그에 관해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이런 이야기에 왜 아까운 시간을 쓰는가.
나는 그 이유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알려 주기 위해서. 동시에 납득시키기 위해서.’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매종학의 목소리는 오롯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진짜 목표는 바로 이 드넓은 대회의실에 자리한 이십여 명의 거인들이다.
“일 년 전. 바로 이곳 하남에서 성라대연이 열렸고, 암천의 습격에 의해 소림의 경내가 피로 물들었지. 그대는 무엇을 했는가?”
매종학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싸웠습니다.”
“이유는?”
“그건…….”
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이유가 뭐냐고?’
순간적으로 찾아온 당황에 말문이 막혔다.
몰라서가 아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글쎄. 왜였을까.’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이기주의자에 속물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실익을 따질 틈이 어디 있겠나.
소림사가 피로 물들던 그 날, 내 머릿속에 물음표는 없었다. 오직 느낌표만이 가득한 채로 달려갔고, 그렇게 싸웠을 뿐이다.
나는 후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어째서인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내가 한 대답을 작게 뇌까린 매종학이, 미소 띤 눈으로 자신의 제자이자 의손주를 응시했다.
“풍아. 너는 어떠했느냐.”
“네?”
“죽음이 두렵지 않았더냐?”
맑은 눈동자로 멍하니 매종학을 바라보던 청풍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두려웠어요. 단 한 번도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없었거든요.”
“하지만 너는 소림으로 향했지. 그 이유가 무엇이냐?”
“……후회요.”
“음?”
“평생 후회했을 것 같아요. 그때 도망쳤다면.”
그때였다. 작게 웅얼거리던 청풍의 목소리가 또렷해진 것은.
“제 목숨보다, 더 큰 무언가를 잃게 될 것 같았어요.”
맞다. 혈주와 싸우던 그때에도 녀석은 그리 말했었다.
베이고, 찢기고, 엄청난 피를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뭐냐? 왜 이렇게까지 먼저 죽지 못해서 지랄들이냐는 말이다!’
그리고 의문과 분노를 담아 묻는 혈주를 향해, 청풍은 맑게 웃으며 대답했었다.
‘물러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그 후회. 뭔지 안다.
어쩌면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홀로 겪어야 할 후회의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후회. 후회라…….”
작게 중얼거린 매종학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는 어떤가?”
“저 말씀이십니까?”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처음 헌터 일을 시작하던 그때부터 변함이 없다.
피식 실소를 흘린 내가 대답했다.
“죽음은 항상 두렵죠. 저 죽는 거 무서워합니다.”
내가 너무 솔직했나?
크흠. 큼. 잠자코 상황을 주시하던 이들 중 몇몇이 불편한 기색이 담긴 헛기침을 토해 낸다.
하지만 어느새 매종학의 입가에 맺힌 웃음은 더욱더 짙어져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곤경에 처한 다른 이를 돕는 것. 그것이 바로 협(俠)이다.”
“……!”
흘러나오던 헛기침이 뚝 멎었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사방.
삐딱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 허나 그리 생각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천지 차이지. 그리고 너희 두 녀석은 망설임 없이 행하였다.”
목소리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나를 바라보는 화왕 적천강의 눈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인의(人意)니라.”
“……!”
인의와 협. 협과 인의.
한편으로는 같지만 다르고, 짧지만 무거운 의미가 담긴 두 단어가 좌중을 짓눌렀다.
사람들은 말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진짜 무림인이라고.
하지만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인의와 협을 행하는 이를, 세상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협객(俠客)…….”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중얼거림이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진 그때. 희미한 미소를 띤 반백의 장년인이 입을 열었다.
“협객이라. 그것참, 썩 마음에 드는 단어로군.”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크고 두꺼운 손. 나는 그제야 장년인의 정체를 깨달았다.
‘권왕(拳王) 언화평.’
이제는 낡고 케케묵은 까마득한 과거. 정파 간의 세력 다툼으로 처참히 몰락한 진주언가의 마지막 후손.
이름 없는 험산의 봉우리에서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던 그는 십만의 마병이 중원을 침공했다는 소식에 망설임 없이 무림맹에 합류했다고 했다.
‘권왕이 왜 대단한 놈인 줄 알아?’
‘저야 모르죠.’
‘한때 노부가 물었었지. 정파 놈들 때문에 태어나기도 전에 가문이 몰락했는데 배알도 없냐고. 여기 모인 놈 중에 인의와 협을 아는 놈들이 몇이나 되겠냐고.’
‘진짜 눈치가 없으시네요.’
‘닥치고 들어라. 이다음에 그놈이 한 대답이 걸작이니까.’
‘뭐랬는데요?’
‘상관없다더군.’
‘네?’
‘노부가 한 말 그대로다. 아무것도 상관없고, 자신은 그저 돕기 위해 왔다는 거야. 그리고 정마대전이 끝나자마자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은 진짜였어. 으허허.’
바로 그 권왕 언화평이 지금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행하는 것. 두려움을 이겨 내고 나아가는 것. 그게 바로 협객이지. 그렇고말고.”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권왕뿐만이 아니다.
곳곳에서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와 청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그중 낯익은 몇몇 인물이 보내는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만독수라(萬毒修羅) 당사독.’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지,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었음에도 자세는 꼿꼿하고 눈동자에 서린 녹광은 또렷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주름진 입꼬리를 슬쩍 끌어당긴 그가 돌연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사천당가의 가주로서 한 말씀 올릴까 합니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시선이 집중된다. 매종학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쉭쉭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림맹의 각주는 막중한 무게를 지닌 중책입니다. 뛰어난 무공은 물론 그에 따른 경륜도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불혹은커녕 이립도 되지 않은 젊은이들이 맡기에는 무리지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순간 작은 동요가 퍼져 나갔다. 동시에 몇몇 사람의 안색이 가볍게 바뀌었다.
누군가는 기쁨, 누군가는 불쾌함 따위의 감정이 낯빛을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 건 한국말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지.’
그리고 다음 순간 이어진 당사독의 말은 내 짐작을 확신으로 바꿔 주었다.
“허나, 열화신룡 진태경과 화산신룡 청풍. 이 두 사람만은 논외입니다. 그들은 산서에서, 하남과 사천에서, 호북에서 암천과 싸웠고 인의와 협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이 늙은이와 가문 역시 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지요.”
그 말에 곳곳에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림을 종횡하며 개인적으로, 혹은 적천강이나 태원진가를 통해 인연을 맺은 문파와 가문의 수장들이다.
아무런 접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 또한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반응에 힘입은 만독수라 당사독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들이 무림맹의 중책을 맡는다고 하여 그 누가! 감히 자격을 의심할 것이며 맹주의 명에 토를 달겠습니까.”
유난히 강한 힘이 실린 부분에, 몇몇 사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종남파의 장문인인 풍운검군 역시 그중 하나였다.
녹광이 어린 눈빛으로 천천히 훑어본 당사독이 포권을 취했다.
“보시다시피 아무런 잡음도 일지 않을 터이니, 맹주께서는 괘념치 마시고 명하시면 될 것입니다.”
누군가 불만을 표하기도 전에 논란을 종식시켜 버리는 화술.
심지어 상대는 무림의 대표적인 노빠꾸 종족인 사천당가의 가주다.
비록 사천혈사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사천당가가 오대세가의 일원이며 무시하지 못할 저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으음…….”
누군가가 흘린 무거운 침음성.
그리고 짧은 침묵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열화신룡 진태경. 그리고 화산신룡 청풍.”
따뜻한 눈빛으로 나와 청풍을 응시하던 매종학이 말을 이었다.
“정작 그대들에게는 묻지 않았구나. 이룡각에 속할 뜻이 있는가?”
그 순간이었다.
띠링.
무림맹에 입맹(入盟)하시겠습니까?
눈 앞에 펼쳐진 알림.
나도, 청풍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시선을 마주친 우리가 한 목소리처럼 대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하면 정식으로 명한다. 지금 이 시간 부로 두 사람은 무림맹주의 명만을 받드는 맹주부 직속 이룡각(二龍閣)에 속할 것이며, 각각 한 사람의 각주가 되어 필요한 인원을 선별할 수 있는…….”
이어지는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