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4
#53화
띠링.
– 수면 모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빠, 오빠!”
헉, 헛숨과 함께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고시원 천장이 아니라 하연이의 얼굴이었다.
아, 맞다. 어제 집에 왔었지.
“악몽이라도 꿨어?”
“응?”
“아까부터 소리 지르던데. 땀도 엄청 흘리고.”
내가?
되묻기도 전에 깨달았다.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모래라도 삼킨 것처럼 목이 따끔거렸다.
‘몸 상태가 왜 이래?’
내가 가진 시스템은 깨어 있을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수면 모드는 숙면을 취하게 해 줌과 동시에 컨디션 최고로 끌어 올리는 효과가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은 무림에서도, 동기화가 된 이후에도 없었던 일이다. 게다가 악몽이라니.
‘무슨 꿈을 꾼 거지?’
하지만 머리만 지끈거릴 뿐, 꿈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내게 하연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없어, 그런 거.”
“있으면 말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네, 누나.”
“장난 아니거든.”
조그만 주먹이 가슴을 퍽 친다. 하연이의 진지한 표정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턱만 긁적였다.
“진짜 없어? 고민이나, 힘든 일.”
“없다니까.”
거짓말이다. 7년 전에도 있었고 7년 후에도 있을 것이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운 날도, 진호 형과 진탕 술을 퍼마시며 잊은 날도 있었다.
‘그걸로 충분해.’
어린 두 남매 키우느라 무릎 연골이 닳도록 일한 어머니, 이제 수능을 준비 중인 고3 여동생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혼자 버티고 극복하는 것. 이제는 익숙해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씩 웃어 보였다.
“이제 인생 펼 일만 남았는데 무슨 고민이 있겠냐? 아, 하나 있긴 하네. 앞으로 돈 어떻게 써야 하나, 뭐 그런 거?”
“허세는.”
분위기가 살짝 가벼워졌다. 나는 짐짓 얼굴을 구겼다.
“허세? 어제 기억 안 나냐? 돈다발 다시 보여 줘?”
“그건 인정. 재수는 없는데 할 말이 없네.”
“지금 내 27년 인생 그래프 꼭대기 찍었다. 별일 없으니까 너는 공부나 열심히 해.”
“내 성적 전국 0.1%거든?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셔.”
입을 삐죽 내민 하연이가 방을 나가려다 말고 멈칫, 다시 돌아선다.
“오빠, 그런데.”
“응?”
“진위경이 누구야?”
“……뭐?”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등장한 한 사람의 이름.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 * *
아삭.
갓 담근 총각김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엄마 음식이었지만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전, 하연이와 나눴던 대화 때문이다.
‘너, 그 이름 어디서 들었어?’
‘오빠한테. 아까 자면서 계속 그 이름을 부르더라고.’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아는 사람이야? 꿈에도 나올 정도면 친한가 보네.’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림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이상 찾을 이유도 없었다. 나는 현실로 돌아왔고, 진위경은 무림에 있으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진위경이 꿈에…….’
머리가 복잡했다. 무림에서의 후유증 때문일까? PTSD.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라는 단어도 떠올랐다.
‘미치겠네.’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은 모양이다. 엄마가 넌지시 물었다.
“입맛이 없니? 너 좋아하는 걸로 차렸는데.”
“아, 아니에요. 김치는 언제 담그셨어요? 된장찌개도 아주 제대로네.”
황급히 변명하며 수저를 들었다. 오랜만에 세 식구가 한 식탁에 모였다. 이 소중한 순간을 망칠 수는 없다.
‘별일 아니겠지. 별일 아닐 거야.’
후루룩.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수한 된장찌개에서는 약간의 쓴맛이 느껴졌다.
* * *
찜찜했던 마음 한구석은 금방 평소대로 돌아왔다.
가족들과 하루 종일 웃고, 떠들고. 낮잠까지 푹 자고 나니 저녁이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다.
“며칠 더 있다 가지. 내일 수육 하려고 했는데.”
“우리 김 여사님 또 시작이네. 나도 수육 먹을 줄 알거든?”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엄마의 말에 하연이가 구시렁거렸다.
“반찬도 잔뜩 챙겨 보내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저 정도면 반찬 가게를 열어도 되겠구만.”
“……그건 그래.”
현관문 앞, 엄마가 준비해 둔 쇼핑백들 안에는 반찬이 한가득했다. 이것도 겨우 설득한 끝에 얻어 낸 협의점이다.
‘넣을 곳도 없는데.’
3평짜리 고시원 방에 냉장고까지 들여놓으면 정말 발 디딜 곳이 없을 것이다. 아니, 들여놓을 자리도 없다.
이미 냉장고만 한 캡슐이 있으니까.
‘슬슬 이사라도 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어젯밤 미리 싸 놨던 배낭을 어깨에 멘 순간이었다.
“……?”
뭐가 이렇게 묵직해? 넣은 거라곤 기껏해야 어제 샀던 옷 몇 벌이 전부인데.
의아함에 배낭을 내려놓자 다급해진 건 가족들이었다.
“아들, 내일부터 바쁘지? 빨리 가서 씻고 푹 자.”
“……아까는 며칠 더 있다가 가라면서요?”
“오빠, 차 시간 늦겠다.”
“택시 타고 갈 건데?”
“야간 할증. 야간 할증 붙잖아.”
이쯤에서 대충 감을 잡았다.
“언제 넣었어?”
“뭐, 뭘?”
“돈.”
표정이 곧 대답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했잖아요. 두고 필요할 때 쓰시라니까.”
“…….”
“저 돈 많이 벌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사실과 거짓을 반반 섞었다.
C급 헌터 평균 연봉이 5억이다. 최 팀장이라는 후한 고용주를 만나 상상치도 못한 거액을 보너스로 받았지만, 시스템이 사라진다면 모든 게 물거품으로 사라질 거다.
그래서 더 가족에게 주고 싶었던 건데…….
“네가 목숨 걸고 벌어 온 돈이잖아. 너 위해서 써. 응?
“엄마.”
“아들.”
다음 순간, 조용히 흘러나온 엄마의 한마디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무리하지 마. 다치지도 말고. 엄마는 그거면 돼.”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잠시 후, 나는 여름밤의 습한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반찬이 든 쇼핑백과 돈다발이 가득한 배낭을 메고서.
부우웅.
택시를 타고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엄마의 마지막 말과 그 온기를 떠올렸다.
‘살아남아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란 말이다. 그게 네 임무다.’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 속 누군가의 목소리도.
* * *
촤아악-
핏물이 솟구쳤다. 몬스터의 녹색 피가 아닌, 인간의 붉은 피다. 타는 듯한 허벅지의 통증을 느끼며 리자드맨 족장의 가슴에 창을 쑤셔 박았다.
“키이…….”
띠링.
– [Lv.50 리자드맨 족장]을 처치했습니다!
–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게이트 클리어. 숨이 끊긴 리자드맨 족장의 시체 위에 밖으로 통하는 마력장이 생성됐다.
최 팀장이 나무에서 등을 뗀 것도 그때였다.
“세 번.”
“예?”
“진태경 씨가 오늘 다친 횟수입니다.”
단단하고 길쭉한 손가락이 내 몸 곳곳을 가리켰다.
이미 포션으로 치료된 목덜미와 팔, 그리고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허벅지.
“괜찮아요. 스친 정도라 하급 포션으로도 충분히…….”
“안 괜찮습니다.”
단호한 어조로 말을 잘라 낸다. 평소에도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의 최 팀장이지만 이번만큼은 뭔가 달랐다.
확실한 건 저 표정에서 묻어 나오는 감정이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는 거다.
“지난주에는 한 번도 부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같은 게이트, 같은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이렇다면 이유는 하나죠.”
그의 투명한 눈이 나를 향했다.
“진태경 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 * *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났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나흘째 되는 날엔 다섯 군데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지금 상태로는 안 됩니다. 퇴근하세요.’
최 팀장의 말을 뒤로하고 고시원으로 향하는 길, 머릿속이 복잡했다.
‘뭐가 문제지?’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었다. 시스템은 사라지지 않았고, 내 계좌에는 은행에 맡긴 3억 상당의 돈이 예치되어 있다. 이제는 C급 헌터로서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는데…….
‘빌어먹을 꿈.’
그때부터였다. 본가에서 보낸 첫날 밤 이후부터 나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악몽 속 장면은 점점 또렷해졌고 꿈이 끝나면 땀에 흠뻑 젖어 깨어났다. 운기조식으로 몸 상태를 끌어 올려 놔도 정신이 불안정하니 실수만 늘었다.
‘이대로라면 곤란한데.’
몸은 현실에 있지만 정신은 아직도 무림에 붙잡혀 있는 상황. 정신과라도 가 봐야 하나 고민하며 고시원 방에 도착했다.
달칵.
“어, 왔어?”
인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잘못 들어왔나 헷갈릴 정도다.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물었다.
“뭐 하냐?”
진호 형이 대답했다.
“분해 및 조립.”
드라이버를 들고 캡슐 앞에 앉아 있는 모습에 순간 눈앞이 노래진다. 이 인간이 지금 설마…….
“미쳤어? 비켜!”
“야, 야.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진호 형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뭐?”
“나도 막 들어왔다고. 진짜야.”
표정을 보니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멀쩡한 캡슐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내 반응에 진호 형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작동도 안 되는 고물 캡슐 하나에 왜 이렇게 난리야? 짐짝처럼 내다 버릴 때는 언제고.”
“그때는 그때고.”
동기화에 관한 일을 진호 형이 알 리 없다. 그에게는 고물 캡슐로 보이는 저 정체불명의 물건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아무튼 절대 건드리지 마. 알았어?”
“아주 때려죽일 기세네.”
“찢어 죽일 거야.”
“…….”
황당한 얼굴의 진호 형을 무시하고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잠깐의 해프닝에 몸 안의 기운이 쭉 빠져나간 기분이다.
“무슨 일 있냐?”
“일은 무슨.”
“요즘 너 때문에 민원 장난 아냐. 오늘도 옆방 아저씨가 난리 치는 거 겨우 달래서 보냈다.”
뭐 때문인지는 짐작이 간다.
진호 형이 바닥에 늘어놓은 공구를 주섬주섬 챙기며 말을 이었다.
“밤새 끙끙거리니까 미칠 것 같대. 아, 그리고 진위경이 누구냐는데?”
또 나왔다. 저 이름.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냥 여자 친구라고 해.”
순간, 멍키 스패너를 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여자 친구 생겼냐? 이런 배신자 새끼.”
“…….”
“예뻐? 몇 살? 사진 보여 주라.”
저 인간이 서른이라니.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근데 이름이 좀 이국적이네. 조선족이셔? 아니면 중국인?”
“……중국인.”
틀린 말은 아니지, 뭐.
“이 새끼 C급 헌터 됐다고 벌써 글로벌하게 노네. 아무튼 여자 소개 좀. 나 중국 좋아해. 니하오마. 워아이니. 또 뭐 있더라.”
“니씨팔롬아.”
“병신. 성조랑 발음 다 틀렸다. 그래서 100일이나 채우겠냐? 따라 해 봐. 니 취팔러마.”
“니씨팔롬아.”
“다시. 니 취팔러마.”
“니씨팔롬아.”
“……아니 이 새끼가?”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분노하는 진호 형을 무시하고, 나는 문을 가리켰다.
“나가.”
제발 혼자만의 시간 좀 갖자.
* * *
조용해진 방,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캡슐로 다가가 낡고 때에 찌든 캡슐 표면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너, 뭐 하는 놈이야?”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심 기대했는데, 아쉽다.
‘시스템도 현실에 동기화된 마당인데 기계가 말할 수도 있지 뭘.’
사실 진짜 기계인지도 의문이다. 아무리 현실이 판타지가 된 지 오래라지만 이건 새로운 장르 아닌가.
만약 지금 내 상황을 소설로 쓴다면 장르를 어떻게 정해야 할까. 판타지? 게임 소설? 그것도 아니면.
‘차원 이동?’
푸흐흐.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원 이동이라니, 내가 점점 미쳐 가는구나.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가능할 리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능하잖아.’
차원 이동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남아 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침공, 그리고 게이트가 그 증거다.
우리는 게이트를 통해 현실을 오고 갈 뿐이지만, 수십 년 전 몬스터 군단은 거길 통해 또 다른 차원에서 지구로 넘어왔다.
‘마계(魔界).’
악의 땅. 몬스터들의 고향. 마왕의 영지.
인간 중 그 누구도 발을 디디지 못한, 엿볼 수도 없는 미지의 차원. 인류는 그렇게 정의 내렸다.
그런데 만약 눈앞의 이 캡슐이 또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일종의 게이트라면, 무림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차원이라면…….
‘무림은 또 하나의 현실이다.’
그곳에서 보고 겪은 모든 것들이.
물, 흙, 바람. 그리고 사람까지도.
‘NPC가 아니었어.’
나는 빛바랜 캡슐 표면 위에 비친 얼빠진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