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45
#544화
주화란이 떠났다.
창밖 너머,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송일섬과 함께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은 가녀리면서도 당당했다.
“멋있네요, 주 소저.”
등 뒤에서 들려오는 혁무진의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그랬지.’
문득 처음 주화란을 만났던 그 날이 생각난다.
수백여 명의 적들에게 포위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물러나지 않던 모습, 그 눈빛이.
어쩌면 그녀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무인(武人)에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기도 하고요.”
“그래, 어깨에 진 짐이 많아. 아직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도 계시고…….”
“그거 말고요.”
“응?”
고개를 돌리자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혁무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공을 세울 목적이었다면 다른 선택지도 많죠.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겠습니까?”
이유라.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헛숨을 삼켰다.
“헛. 설마?”
“예, 바로 그 설마입니다.”
“더욱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됐습니다. 드러워서 못해 먹겠네, 진짜.”
한 대 쥐어박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혁무진을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따, 시원하다.”
측간에 간 지 한 식경 만에 적천강이 나타났다.
순산의 기쁨이 상당한지, 싱글벙글 웃으며 술병부터 집어 든 그가 혁무진의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네놈은 왜 그렇게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느냐?”
“적 대협. 그게…….”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시작한 혁무진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적천강이 눈을 크게 떴다
“표왕의 손녀가 왔었다고?”
“예.”
“허어, 한창 힘주고 있을 때 범상치 않은 기세가 둘 정도 지나갔었는데, 그중 하나였던 모양이군.”
적천강이 검붉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노부가 사경을 헤맬 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리 이어진 것을 보니 제법 질긴 연이다.”
“그런데 다른 선택지를 놔두고 조장님을 찾아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적천강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걸 굳이 노부의 입으로 말해야겠느냐?”
“그렇죠? 역시 적 대협이십니다.”
혁무진의 얼굴이 LED 전구처럼 환하게 밝아진 그때,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엄청 큰 공을 세울 수 있어서겠지.”
“…….”
어, 전구 꺼졌네.
순식간에 한밤중처럼 안색이 어둑해진 혁무진으로부터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심이십니까.”
적천강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파로부터 상당한 재물을 보상받았다고는 하나, 향후 표국을 지키며 이끌기 위해서는 무림에서의 명성과 실력이 필요하지. 노부가 보아하니, 표왕의 손녀가 제법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구나.”
“저기, 적 대협.”
“왜?”
“외람되지만, 혹시 지금까지 정인(情人)을 사귀신 적이 있으십니까?”
혁무진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던 적천강이 대답했다.
“물론 있다.”
“언제쯤인데요?”
“그때가 열 살 무렵이었으니까. 백 년도 더 되었지, 아마.”
“…….”
“왜 그러느냐?”
“그, 아닙니다. 제가 면벽 수련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
“진짜 벽이다. 벽. 통곡의 벽.”
해탈한 고승처럼 중얼거리는 혁무진에게서 시선을 뗀 적천강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네놈은 어쩔 생각이냐?”
“음.”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 같아 묻는 게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귀신이시네요. 아직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들어 보니 과히 나쁘지 않다. 네놈이 턱도 없는 괴물이라 그렇지, 그 연배에 절정의 경지라면 뛰어난 성취고 어릴 적부터 표국 일에 관여했다면 경험도 적지 않을 테니.”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송일섬이라는 호위는 실력만으로도 큰 전력이 될 거고요.”
당시에 사경을 헤매고 있던 적천강은 두 사람을 직접 겪어 본 적이 없지만, 깨어난 후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터라 이해하는 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광동진가의 마지막 핏줄이라. 노부가 측간에서 느낀 바로는 상당한 경지였지.”
“……약간 더럽긴 한데, 저도 동의합니다.”
적천강은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른 초절정 고수. 그가 상당하다고 평할 정도니 송일섬의 무위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수준이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또 한 명의 천재.’
일찍이 혈육을 여의고 홀로 세상에 버려졌다. 낭인의 검동(劍童) 노릇을 하며 전장을 떠돌았고, 마침내 스스로 검을 뽑았다.
송일섬은 온실 속 화초가 아닌, 모진 풍파를 견디며 살아온 잡초였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인 추혼객(追魂客)은 낭인들 사이에서도 전설로 남은 이름이다.
‘청풍과 문경만큼은 아니겠지만, 충분한 전력감이지.’
아쉽긴 해도 불만은 없다. 그동안의 라인업이 너무 화려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사실 지금부터라도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다.
초절정 고수는 불리한 전황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존재. 사방으로 번지는 전화(戰火)의 불길을 막기 위해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매종학도 그런 의미에서 나와 청풍을 따로 나누었을 것이고.’
불길은 여러 개인데 소방차가 한 곳에만 집중될 수는 없는 법이다.
암천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또한 더욱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리고…… 나는 함께 이 불길을 진압하기 위한 팀원을 꾸려야 한다.
이제는 냉철한 판단과 이성으로 결정을 내릴 시간이다.
‘어쩔 수 없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이 최선이다. 아니, 최선이 아니라 해도 차선(次善)의 선택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혁무진.”
혁무진은 늘 둔한 것 같으면서도 눈치가 빨랐다.
적어도 내가 성과 이름을 함께 붙여 부를 때만큼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 조장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선택은 내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각자의 선택이 모여 하나의 뜻이 된다.
하지만 내가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혁무진이 재빨리 대답했다.
“함께 가겠습니다.”
“뭐?”
“조장님을 따르겠다고요. 그거 물어보려고 하신 것 아닙니까?”
“……맞아.”
“그럼 됐습니다. 물어보실 필요도 없어요. 바늘이 가는 곳에 실이 따라가는 건 당연한 거죠. 아, 물론 궁 소협 같은 배신자는 예외. 이래서 다른 방파에 속한 외인(外人)은 안 된다니까요. 뭐 그리 사정이 많은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혁무진을 말없이 응시하던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너, 후회 안 해?”
“후회요?”
“그래. 후회.”
“조장님. 그거 아십니까?”
혁무진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조장님을 만난 이후로 제 인생이 후회였습니다.”
“개새끼야.”
“그런데, 후회 몇 번 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더라고요.”
어깨를 으쓱한 혁무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텅 빈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 어딘가를 더듬는 듯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저를 혁가 포목점 아들내미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쾌풍검(快風劍)이라고 하더라고요. 열화신룡의 오른팔이라고도 하고. 저는 그게 참 마음에 듭니다.”
“무진이, 너…….”
“헤헤. 감동받으셨어요?”
“아니, 그거 말고. 넌 오른팔이 아니라 새끼발가락이야.”
“와, 조장님도 어지간하시네. 제가 여태껏 그 고생을 했는데도 아직 새끼발가락입니까?”
억울해하는 녀석의 표정을 보자 피식 실소가 흘러나온다. 이제 좀 승급을 시켜 줘야 하나.
“그럼 새끼손가락.”
“……왼손 새끼손가락?”
“오른손.”
“오른손이라.”
잠시 생각하던 혁무진이 조심스럽게 협상안을 제시했다.
“그럼 오른손 받고, 엄지 어때요.”
“다음 생에 노려 봐라.”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엄지 말고 검지.”
“턱도 없지.”
“젠장. 오른팔 되려면 일평생을 바쳐야겠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 평생 걸릴 테니까 그때까지 옆에 있어라. 죽지 말고.”
“……!”
괜한 말을 한 건가.
목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몸이 간질간질하다. 괜히 애꿎은 턱만 긁적인 나는 손을 내밀었다.
“조, 조장님.”
촉촉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혁무진이 내가 내민 손을 굳게 맞잡았다.
덥석.
“조장님의 오른쪽 새끼손가락 혁무진. 충심을 다하여…….”
“너 뭐 하냐.”
“예?”
“누가 손을 달래? 아까 받은 거 가져와.”
“……아.”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혀를 찬 혁무진이 아까 내게 넘겨받은 죽간 두 개를 품에서 꺼냈다.
죽간을 묶은 끈에는 작은 글씨로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은비화(隱匕花) 주화란.
추혼객(追魂客) 송일섬.
하지만 내가 받아야 하는 죽간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직도 내민 손을 거두지 않는 내 모습에, 무언가를 짐작한 듯 혁무진의 안색이 떨떠름해졌다.
“조장님. 진심이십니까?”
“그래.”
“후우. 이게 옳은 결정인지 모르겠습니다.”
한숨과 함께 두 개의 죽간이 더해진다.
나는 끈에 적힌 이름과 별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흑룡도(黑龍刀) 사마표.
호거아(虎巨兒) 태산.
이것이 옳은 결정인지 모르겠다는 혁무진의 말이 귓전에 어른거린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선택이 최선인지에 대해서는 나 역시 의문이 남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들려온 적천강의 목소리는 망설이는 내게 마지막 확신을 심어 주었다.
“무엇을 망설이느냐. 그저 나아가면 그만인 것을.”
복잡하던 머릿속이 맑아진다.
작게 심호흡한 나는 마음속 깊숙한 어딘가를 향해 속삭였다.
‘주화란, 송일섬, 사마표, 태산…….’
그리고 마지막. 혁무진.
단번에 다섯 사람의 이름을 흘려보낸 뒤 명령어를 입력한다.
‘이룡각(二龍閣) 가입 승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한 마디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띠링.
– 가입 승인 절차를 진행합니다.
– 확인되었습니다. [은비화 주화란]. [추혼객 송일섬]. [흑룡도 사마표]. [호거아 태산]. [쾌풍검 혁무진].
– 위 다섯 명을 이룡각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대답은 정해져 있다.
내가 승낙의 뜻을 담아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경쾌한 알림과 함께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이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바뀌었다.
띠링.
– 퀘스트, [너, 내 동료가 돼라!]의 조건 중 하나가 완료되었습니다.
– 최소 5명 이상의 동료 확보 (완료)
– 최소한의 인원을 모두 선별하였습니다!
– 정식 각주가 되기 위한 마지막 절차가 남았습니다. 당신이 맡게 된 각(閣)의 새로운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이름이라.’
새롭게 구성된 조직에 어떤 이름을 부여할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지금 막 뇌리를 스친 이것보다는 못할 것이다.
‘화룡각(火龍閣).’
띠링. 띠링. 띠링.
축포처럼 터져 나오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힘찬 시스템 알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