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47
#546화
“맹주께서 드십니다.”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차례대로 열리는 다섯 개의 문. 그리고 저 너머로부터 천천히 가까워지는 한 사람의 신형에,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구, 쩝쩝.”
“…….”
이 새끼 빼고.
‘보면 볼수록 상당히 미친놈일세.’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딱히 예의를 차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 정도는 있다. 기어코 남은 음식들을 전부 주둥이에 안전 보관 하는 청풍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도대체 왜 이래. 사회에 불만 있어? 무림맹이 마음에 안 들어?”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키며 일어난 청풍이 대답했다.
“하지만 음식이 남았는걸요, 은인.”
“아니, 그러면 먹는 걸 중단하면 되잖아.”
“그럼 만두가 식잖아요.”
“…….”
청풍 너란 새끼. 관운장 같은 새끼. 만두 식는 건 알면서 주위 사람들 시선이 차갑게 식는 건 하나도 모르는 새끼…….
‘하긴. 늘 이랬지.’
주위 시선을 신경 쓰면 청풍이 아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청풍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중얼거렸다.
“먹을 거 다 먹었으면 집중하자고. 우리 청룡각주(靑龍閣主)님.”
청룡각주. 그 네 음절에 입을 삐쭉 내민 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잔뜩 심통이 난 목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네에, 은인.”
이룡각(二龍閣)이라는 명칭은 그대로지만, 세부적으로는 내가 담당하는 화룡각과 청풍의 청룡각으로 나뉘었다. 함께 대회의에 소집되어 오는 길에 만난 청풍과 나눈 대화에 의하면, 그는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지만 문경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했다.
‘그 이름. 마음에 안 들어요.’
‘왜. 난 청룡각도 멋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조금 너무하긴 하네. 명색이 각주인데 이름 정도는 뜻대로 붙일 수 있는 거 아닌가?’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문 할아버지는 싫대요. 그런 이름이라면 차라리 때려치울 거라고 으름장을 놓으셨어요.’
‘그 정도였다고? 처음 생각한 이름은 뭐였는데?’
‘만두각이요.’
‘…….’
‘아니면 당과각.’
‘……어, 그래.’
‘후우. 문 할아버지가 미워요. 청룡각이 뭐예요, 청룡각이.’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고마워해야지, 미친놈아.
이럴 거면 차라리 김부각으로 하지 그랬냐.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이미 지난 일이라서가 아니다. 정파 무림의 최고 존엄께서 마침내 대회의장에 입장하셨기 때문이다.
저벅.
고요한 침묵 사이를 가로지르는 걸음걸이. 마침내 상석(上席)에 다다른 무림 맹주 매종학이 모두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다들 모이셨구려.”
지난번의 회동과 달리, 이번에는 맹주부 산하 핵심 조직의 수장들까지 함께한 자리다. 이는 무림맹 내부의 조직 개편이 완전히 끝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렇게 모이니까 꽤 많네.’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낯선 얼굴도 있고, 익숙한 얼굴들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이름과 별호만 들어 본 고수들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제법 있다.
“늦게도 오시는군. 엉덩이에 쥐 날 뻔했소.”
매종학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를 통째로 뒤집어 영혼까지 탈탈 털어도 손에 꼽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상석 바로 옆에 자리한 적천강이었다. 짝다리까지 짚은 그의 불퉁한 말투에 맞은편 중간 자리에 있던 진위경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적 대협.”
“왜.”
“그, 아시지 않습니까.”
“거참. 자네도 감투 쓰더니 이제 맹주 편을 드나?”
순간 멈칫한 진위경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불과 일 년 하고도 수개월. 가주 대행이라는 이름으로 태원진가의 사령탑에 앉아 서서히 몰락해 가던 가문을 무섭게 성장시킨 그는, 어느덧 이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게 아니라―”
“알았네. 알았다고. 이제는 형과 아우가 쌍으로 난리로군.”
투덜거리는 적천강을 향해, 매종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그러지 마시오, 적 대협. 아니, 이제 오왕전주(五王殿主)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
“……끄응.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그만하시오. 보는 눈도 많은데.”
“이거, 바쁜 사람들을 불러 놓고 흰소리를 했구려.”
매종학만큼 바쁜 사람이 있겠냐 싶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자리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단체를 움직이는 중요한 기관이자 톱니바퀴니까.
‘이전(二殿), 삼당(三堂), 오각(五閣), 오원(五園), 십단(九團).’
무림맹주 매종학이 이끄는 맹주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적천강이 수장으로 부임한 오왕전뿐이고, 그 아래에 내당(內堂)에 속한 삼당과 오각이 있으며 오원, 그리고 십단은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차지했다.
‘그 외에는 더 많고.’
놀랍게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전부가 아니다. 외당(外堂)에 속한 단주며, 대주들까지 더한다면 이 넓은 대회의실로도 자리가 부족해서 연무장을 써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무림맹의 규모가 거대하다는 증거였고,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나와 청풍이 무림맹의 핵심 수뇌부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뭐, 그래 봤자 딱히 실권은 없는 명예직이지만.’
직위(職位)와 직급(職級)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명목상의 직위는 각주지만 사실상의 서열은 이 중에서도 말석에 가깝다. 물론 내 나이 또래에 이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아, 청풍을 제외하고도 한 명이 더 있긴 했지.’
일기천룡(一騎天龍) 모용영휘. 불과 이 년 전만 하더라도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리던 천재. 모용세가의 소가주이자 최근 무림맹의 외당 단주로 임명받은 그는 가주인 아버지를 따라 하남에 오는 대신, 요녕에 남아 가문의 방비를 맡았다고 들었다.
‘이제야 얼굴 한번 보나 싶었는데.’
하긴, 하남에 참석한다고 본진을 비우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방비를 끝마쳤을 터였다.
슥.
그때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매종학이 입을 열었다.
“자, 다들 편히 앉으시오. 이렇게 예의를 차릴 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하지만 사람들은 도로 자리에 앉지 않았다. 아니, 앉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매종학이 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아직 열려 있는 문 너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두둥실 떠올랐기 때문이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을 어찌 저리 손쉽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천에 덮여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척 봐도 커다란 크기에 상당한 무게를 지닌 듯한 물체였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이동시키는 매종학의 공력에 대한 탄성이 묻어났다.
그러나 몇몇 사람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물론 내 얼굴 역시 그랬을 것이다.
‘공력이 문제가 아니야. 저건…….’
오감(五感)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코, 바로 후각이다. 감각이 발달된 무림인조차 곧장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미세한 냄새였지만, 나는 그 악취를 맡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은인. 이 냄새는 혹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청풍을 향해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시취(屍臭)야.”
“……!”
시취는 말 그대로 시체 썩는 냄새를 뜻한다.
현대와 무림, 두 세계를 오가며 수없이 맡아 본 악취였기에 이번만큼은 누구보다 확신할 수 있었다. 동시에 시체의 정체에 대한 어떤 짐작이 뇌리를 스쳤다.
‘만약 내 예상이 옳다면, 저건…….’
그리고 다음 순간, 검붉은 피로 물든 천이 벗겨짐과 동시에 대회의실의 모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음성을 흘렸다.
“흐읍.”
“도, 도대체…….”
“매, 맹주님. 이것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경악이 서린 목소리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이도, 모르고 있던 이도 지금만큼은 같은 충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천에 가려져 있던 ‘그것’의 모습은 끔찍했다.
‘괴물.’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었다. 언뜻 보면 사람의 체형을 하고 있으나 기형적으로 길고 굵어진 뼈마디가 전신 곳곳에 흉측하게 튀어나왔고, 부릅뜬 채 빛을 잃은 눈동자는 어린아이의 주먹만큼이나 컸다.
심지어 괴물의 기괴한 점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뿌, 뿔이 있소.”
“그뿐만이 아니오. 팔이…….”
이마 정중앙에 솟은 검은 뿔과 상반신에 튀어나온 네 개의 팔. 싸우는 과정에서 잘려 나갔는지 각각 길이도, 굵기도 달랐으나 그것이 사람의 팔이라는 데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으음.”
“어찌 이런 일이.”
사람들 사이에서 연신 탄식이 흘러나오던 그때, 누군가가 불쑥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빈도도 처음에는 그러했소.”
목소리의 주인은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수염과 깊은 눈동자를 지닌 노도사, 바로 무당파 장문인이었다. 순간 그를 향해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에 의문이 어렸다.
“처음에는……이라니요?”
“그 말씀은 혹시…….”
무당파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이미 몇몇 분은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저자. 아니, 저것은 본래 장삼이라는 이름의 어부였소.”
앞서 은영각(隱映閣)에서 들었던 정보가 노도사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남들과 다를 것 없던 흔한 이름의 어부가 실종된 지 한 달 만에 호북성을 떠들썩하게 만든 살귀(殺鬼)이자 괴물로 나타났다는 이야기였다.
“처음 발견했을 당시의 무공은 삼류에 불과했으나, 저것이 지닌 힘과 움직임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고 했소. 그리고 다시 나타날 때마다 더욱 외관이 괴이해지고 강해졌지. 마치…….”
잠깐의 망설임 끝에 무당파 장문인이 탄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을 해하고 그 정기(正氣)를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오.”
“……!”
보이지 않는 충격이 대회의실을 휩쓸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좌중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미간을 찌푸린 적천강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은, 저 염병할 괴물이 흡정마공(吸精魔功)이라도 익혔다는 소린가?”
무당파 장문인이 고개를 저었다.
“무량수불. 빈도 역시 쉬이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 저것이 암천이 의도한 결과물이며 실제로 흡정마공을 사용할 수 있다면…….”
말꼬리를 흐리는 노도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대회의실에 모인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도 하지.’
흡정마공은 마교에서도 이미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극악의 마공이자, 정파 무림인들에게는 악귀가 만들어 낸 무공으로 취급받는다.
그런데 암천이 그 흡정마공을 부활시켜 자신들이 만들어 낸 괴물들에게 익히도록 했다면…….
‘재앙. 그 자체.’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당파 장문인의 짐작은 틀렸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렇다.
‘대부분의 몬스터는 빠르게 성장한다.’
오크가 성인 개체가 되기까지 한 달이 걸린다고 했나.
대부분의 몬스터가 강해지는 방식은 두 가지다. 처음부터 강력한 힘을 지닌 개체로 태어나거나, 혹은 다른 몬스터로부터 마력을 흡수하거나.
‘인간을 잡아먹는다면 약간의 힘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놈에게 희생된 건 양민이 대부분이고 이, 삼류 낭인들뿐.’
인간과 몬스터는 타고난 기운의 성질 자체가 다르다. 만약 상호간에 그런 작용이 가능했다면 이미 현대의 몬스터는 정력제나 보신용으로 팔리고 있었을 거다.
‘변이체라서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아니, 차라리 그러길 바란다. 인간의 기운을 그대로 흡수하는 괴물이 쏟아져 나온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바로 그때. 매종학의 조용한 목소리가 대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진 각주.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진 각주를 찾아 고개를 돌린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멈칫했다.
‘잠깐만. 진 각주면…….’
시벌, 나네.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깜빡했다.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바로 자네의 의견을 묻고 있네.”
“글쎄요. 이게. 참.”
머뭇거리는 내게, 매종학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네. 무슨 말이든 해 보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자네 식대로 하면 되네. 간단명료하게.”
간단명료하게라. 나는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제 생각으로는 약간, 아니 어쩌면 상당히…….”
“상당히?”
수십 쌍의 뜨거운 눈빛을 응시하며, 내가 대답했다.
“좆 된 것 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