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49
#548화
“잘했다.”
대회의실을 나서자마자 진위경이 건넨 말에, 나는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왜 그러느냐?”
“글쎄요. 말하는 내용과 다르게 표정이 좋지 않아서?”
“아.”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풀린다. 하지만 진위경의 입가에 맺힌 웃음은 금방 꺼질 듯이 흐릿했다.
“사실 네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만큼 오늘의 너는…….”
“괜찮습니다. 사실 이런 반응이 당연한 거예요.”
말꼬리를 흐리는 진위경을, 나는 이해했다.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도 마찬가지였겠지.’
이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생각만큼 무겁지 않다.
현대의 살인 사건은 드물며 TV를 포함한 대중 매체로 알려지지만, 이곳에서는 빈번하게 목격되기 때문이다.
치안이 좋은 도시라면 그나마 낫다. 그러나 그 밖의 양민들은 위치에 따라 산적이나 마적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무림인은 말할 것도 없다.
‘칼끝을 걷는 삶.’
오죽하면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 하겠나.
그렇기에 그들은 늘 죽음을 각오한다. 투지를 불태우고 무공을 단련한다. 그리고 눈앞의 진위경 역시 한 사람의 무림인이었다.
문제는, 그를 포함한 모두가 자라난 환경이다.
무림에서는 죽이는 것도, 죽는 것도 사람이었다. 맹수와 영물(靈物)이 있었지만, 적어도 그것들의 정체는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그 괴물들이 이 세상을 뒤덮을 것이라는 주장을 피력했다.
사람과 괴물이 죽고 죽이는 싸움이 시작되리라 예견했다.
‘내가 했던 말이 얼마나 와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위기감은 충분히 느꼈겠지.’
내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누군가는 불신 어린 시선을 보냈고 누군가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당장 모두가 믿지는 않더라도, 귀 기울여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상대가 무림인들이고, 확실한 물증이 있어서 이 정도라도 먹힌 거지.’
늙은 선비들이 청중이었다면 공자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괴력난신 반대 시위를 벌였겠지만, 대회의실에 모인 이들은 그렇게까지 앞뒤가 꽉 막힌 족속들이 아니었다.
최소한 자신들의 눈앞에 팔 네 개 달린 괴물의 시체가 놓여 있는 상황에서는 그랬다.
‘수신룡의 사체도 마찬가지고.’
부위별로 분리 한 수신룡의 사체는 아직 극비리에 운송 중이다.
하지만 내 인벤토리에는 만일을 대비하여 슬쩍 해 두었던 부산물 일부가 있었고, 그것은 중요한 물증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막내야. 그건 어디서 난 것이냐? 분명 빠지는 것 없이 챙긴 것으로 아는데.”
“예?”
“그 왜. 호북에서 쓰러트린 이무기의…….”
“콜록, 콜록. 콜로로록!”
억지로 쥐어 짜낸 기침을 토해 내자,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청풍이 품 안을 뒤적거렸다.
“은인. 당과 드릴까요? 기침에는 당과가 최고예요.”
“……싫어. 최악이야.”
“네에.”
도대체 언제부터 당과가 기적의 신약이 됐냐.
단호한 실험 거부에 매드 사이언티스트 청풍이 시무룩한 얼굴로 당과를 제 입에 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위경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알겠다. 더 묻지 않으마.”
“음. 그럼 감사하고요.”
머쓱하게 턱을 긁적이는 나를,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던 진위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는 한다. 네가, 우리 막내가 내가 알던 그 아이가 맞는지.”
“……!”
“구태여 묻지 않겠다. 더 이상의 의문도 품지 않으마. 다만 지금껏 네게 말하지 못한 한 가지 바람은 있다.”
진위경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적절한 때가 오면, 네가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구나.”
말하지 못한 이야기라. 나는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언제쯤 그때가 올까.’
하지만 정말 진위경의 말대로 이 모든 것들이 마무리된다면. 그리고 마음의 준비가 끝난다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나만의 비밀을 직접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여기 있었군. 화룡각주.”
또각.
늙수그레한 목소리와 함께 둔탁한 소음이 울려 퍼진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무림맹 은영각주, 천면호리 송호가 있었다.
“회의는 이미 한 식경 전에 끝났을 터인데.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다니. 우연인가?”
그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무림맹에 남아 있던 것은, 비단 진위경과의 대화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필연일 겁니다.”
“필연이라. 그래, 그렇군.”
도무지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노회한 눈동자에 묘한 빛이 스친다. 짧은 침묵 끝에 천면호리가 입을 열었다.
“따라오게, 화룡각주. 무슨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겠지?”
안다. 누가 나를 보고자 하는지도. 어떤 이유에서인지도.
그리고 이어지는 천면호리의 한마디는 짐작을 확신으로 바꿔 주었다.
“맹주께서 찾으시네.”
* * *
탁.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맹주전 내부에 마련된 집무실에는 이미 두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느냐?”
덤덤한 적천강의 물음에 이어 무림 맹주 매종학이 손짓했다.
“자리에 앉게. 그리고 자네들은 잠시 나가 있고.”
나나, 내 뒤를 따라 곧장 집무실로 들어온 천면호리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또 다른 이들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스윽.
매종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령처럼 사라지는 기척들.
항상 그의 주위를 지킨다는 비밀 호위들마저 자리를 비키자, 나는 비어 있는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수준이 엄청나네요.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던데요.”
“이 방에 출입하는 대다수는 그마저도 모르지. 그걸 알아챈 자네가 대단한 거야.”
“모르더라도 짐작은 하지 않을까요? 무림 맹주씩이나 되는 분께 호위 하나 없는 것도 이상하잖습니까.”
“아. 그것도 그렇군.”
또래의 청년처럼 턱을 긁적인 매종학이 문득 나를 바라본다. 맑고 깊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먼저, 자네가 대회의실에서 한 말들은 인상 깊게 들었네.”
“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전부 믿지는 않더라도, 경시하지는 못할 걸세. 내 약속하지.”
가볍게 건네는 말도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 대상이 무림맹의 맹주라면, 막강한 무게감이 실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내 주장에 한층 힘이 더해지겠군.’
나쁘지 않은 흐름이다. 자연스럽게 내 얼굴이 살짝 풀리자 매종학이 빙긋 웃었다.
“걱정했던 모양이군.”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말이 나왔으니 묻겠는데, 자네는 스스로의 주장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나?”
“오 할. 반반입니다.”
내 대답에 천면호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오 할이라고 했나?”
“예. 생각하신 것보다 너무 적어서 그러십니까?”
“빌어먹을. 그 반대지. 천하가 괴물로 뒤덮일 확률이 절반이나 된다는 소리 아닌가!”
천면호리의 탄식에는 짧은 욕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 역시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안도감이 들었다.
반응을 보니 최소한 이 자리에 모인 이들만큼은 내 주장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 할이나 되는 근거는?”
평정심을 잃지 않은 매종학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정해진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지금까지 암천을 상대하며 보고 느낀 전부입니다.”
그때, 말없이 차 대신 독한 화주를 홀짝거리던 적천강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네놈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
“평생 욕 오지게 먹어도 좋으니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이다. 차라리 내 예측이 완전히 빗나가서 사실 암천이 별것 아닌 놈들이고, 변이 몬스터 같은 놈들도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한 사람 욕먹는 정도로 해피엔딩을 볼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니까.
그러나…….
“미친 얘기 같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염병할. 미치겠군.”
“그 정도로 안 믿기십니까?”
“믿기 싫다. 네 녀석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게다.”
“……!”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감동 뭐야. 어쩔 거야, 이거.
탁.
그러나 감동이고 나발이고. 술병을 거칠게 내려놓은 적천강이 나를 노려보았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말해라.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한다면 화염신장 세 대 정도로 끝내줄 테니.”
“이 자리에서 제 불알을 걸고 맹세컨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화염신장 세 대 맞으면 저 죽어요.”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적천강이 매종학과 천면호리를 향해 입술을 뗐다.
“노부도 믿기 싫지만…… 저놈이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인 모양이오. 최소한 자기 불알을 걸 때만큼은 진심이거든.”
“…….”
진위 여부를 정하는 기준이 좀 이상하긴 한데, 어쨌든 내 진심이 제대로 전해지긴 한 모양이다.
그리고 우려가 현실로 나타남과 동시에 집무실에 내려앉은 침묵은, 잠시 후 들려온 매종학의 한 마디에 의해 깨져 나갔다.
“한 가지만 더 묻겠네.”
“두 개 물어보셔도 되는데요.”
“아니, 하나면 충분해.”
스윽.
매종학이 말과 함께 손가락을 까딱였다.
동시에 그의 등 뒤, 가득 쌓여 있는 죽간들 사이에서 커다란 두루마리가 날아와 우리가 앉아 있는 탁자 위로 펼쳐졌다.
촤르륵.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아니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한 내가 중얼거렸다.
“이건…….”
“보는 그대로일세. 천하의 전도(全圖)지.”
매종학의 말처럼 그건 천하 곳곳의 지리와 지형, 거기에 더해 지명을 표기한 지도였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무림에서 봤던 어느 지도보다도 크고, 특별한 차이가 있었다.
“각 문파의 위치까지 표시되어 있군요.”
“무림맹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럼 묻건대…….”
매종학의 덤덤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자네는, 암천의 다음 목표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확신할 수 없습니다.”
“천하의 그 누가 미래를 확신할 수 있겠나. 단순한 짐작으로도 충분하네.”
단순한 짐작이라…….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불현듯 손을 들어 지도의 한 부분을 짚었다.
쿡.
“이곳입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적천강은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고, 천면호리의 눈동자에는 기광이 번뜩였으며, 매종학은 나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곳을 택한 이유는?”
“만약 호북에서 벌어진 일이 반복된다면, 암천의 입장에서는 이곳만큼 적격인 곳을 찾기 힘들 겁니다.”
“바로 그 ‘균열’을 말하는 게로군.”
“예.”
“자네는 균열이 다시 한번 일어나리라 확신, 아니 짐작하고 있나?”
“가능성은 차고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암천이 계획하고 벌인 일이었으니까요.”
최초는, 두 번째가 있기에 만들어진 수식어.
수신룡의 기억을 잠시나마 엿본 것은 오직 나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 있게 제시할 물증도, 확신도 없었지만 암천이 ‘그곳’을 노릴 확률은 농후했다.
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당장 암천이 무슨 일을 벌일지는 저도 모릅니다. 바로 다음 목표가 이곳이 아닐 수도 있죠.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이미 그곳을 향해 움직였을 겁니다.”
“남천마후(南天魔后).”
매종학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온 한 사람의 별호를 듣는 순간, 호북에서 목격한 수많은 시신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맞습니다. 남천마후라면…… 반드시 그곳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겁니다.”
“이번에도 단순한 짐작인가?”
“짐작입니다. 확신에 가까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얼마 전부터 뇌리를 떠나지 않던 한가지 생각이, 상당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매종학이 한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찌 생각하나? 은영각주.”
“화룡각주의 의견에 속하도 한 몫 거들지요.”
즉각 대답한 천면호리 송호가 말을 이었다.
“이미 전서를 보낸 지 칠 주야가 넘었습니다. 답신이 도착하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빠르군.”
“예. 미리 선별해 둔 외당(外堂)의 병력을 이동시킬 수도 있겠지만, 자칫하면 늦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전서? 미리 선별해 둔 병력?
내 표정에 담긴 의문을 읽은 천면호리가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은영각의 눈과 귀는 천하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네. 이와 같은 짐작을 한 것은 자네뿐만이 아니야.”
“……이미 ‘그곳’을 염두에 두고 계셨군요.”
“정확히는 호북성에서 일어난 일의 정황을 보고받은 직후였지. 다만 균열이라 불리는 그 괴이한 현상은 나와 본 각의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어.”
나는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눈앞의 늙은 무림인은 사십여 년 전에도, 지금도 은영각의 수장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자리에는 그와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화룡각주 진태경.”
평소와 다른, 묵직한 목소리가 집무실 내부를 울린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라 불리는 위대한 무인이자 작금 무림의 정점에 선 자. 매종학이 맑고도 푸른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자네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네.”
* * *
쉬이이익!
내딛는 걸음을 따라 맹렬한 바람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의 이목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신법까지 발휘하여 처소로 도착한 나는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콰앙!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별채 안에서 빈둥거리다가 벌떡 일어난 혁무진은, 나와 박살 난 문을 번갈아 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오셨습…… 이야. 주인장이 피눈물 흘리겠구만. 저거 교체한 지 한 식경도 안 된 건데.”
하지만 지금은 주인장의 슬픔에 공감할 만한 여유가 없다.
나는 잘 다녀왔다는 인사 대신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전부 소집해.”
“예?”
혁무진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짜고짜 그게 무슨. 아니, 그 전에 뭘요?”
“화룡각(火龍閣).”
“예에?”
“임무다. 지금 당장.”
“잠깐. 잠깐만요! 조장님, 갑자기 왜요? 어디로 가는데요?”
눈이 화등잔만 해진 채 떠드는 혁무진을 향해,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만(南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