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50
#549화
나는 수천 명의 군단을 이끄는 장군이 아니다.
화룡각의 구성원은 나를 포함한다 해도 고작 여섯 명.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데에는 한 식경이면 충분했다.
“모두 주목.”
인사도, 존칭도 생략한 채 불쑥 꺼낸 한마디에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다섯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다.
아직 이들을 부르러 갔던 혁무진조차 전후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
의문이 서린 얼굴들을 차례대로 응시한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자면…… 한 가지 임무를 받았다.”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를 설명해 주었고, 간단한 브리핑은 일각도 채 흐르기 전에 끝났다.
그리고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한 사람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침착한 목소리의 주인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흑룡마문(黑龍魔門)의 소문주, 사마표가 나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남만으로 향한다. 이거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정정과 함께.
“정확히는 남만이 아니라, 남만야수궁(南蠻野獸宮)이지.”
남만야수궁. 영물과 독물을 비롯하여 수많은 동물들을 길들이고, 그것들의 움직임을 본 따 무공을 수련한다는 신비의 문파.
동물 보호 협회인지 학대 집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홍란. 아니, 남천마후(南天魔后)가 군침을 흘릴 만한 장소라는 거.’
두 번째 ‘균열’이 일어난다는 가정하에, 암천 입장에서는 남만야수궁만큼 적격인 곳을 찾기도 힘들다.
그야말로 동물의 왕국이요, 천하에서 가장 많은 영물과 독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니까.
유엽도(柳葉刀) 한 자루를 품에 안고 이야기를 듣던 송일섬이 중얼거렸다.
“고생길이 훤하군.”
녀석이 이런 말을 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남만야수궁이 자리 잡은 남만은 중원에서 운남(雲南)이라고도 불리는 곳.
위치상으로는 사천의 바로 아래에 붙어 있으며 귀주, 광서와 땅을 맞대고 있다.
이렇게 들으면 단지 거리가 멀 뿐,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남만 자체의 지리와 기후가 엄청나게 지랄 맞다는 거지.’
남만에는 푹푹 찌는 열대 기후에 밀림이 끝도 없이 늘어져 있다고 했다.
잘 정비된 가도(街道)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대신 잘 큰 맹수나 독충이 인간을 밥차 취급하는, 실로 거지 같은 동네라 할 수 있었다.
‘얼추 들은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실제로는 어느 정도일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천하를 그려 넣은 지도에도 어엿하게 들어간 남만이 왜 새외(塞外) 취급받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사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외국이 맞긴 하지.’
운남이 현대에서는 베트남과 미얀마던가. 그쯤 어딘가에 있을 텐데 세계지리 시간에 잠만 처자느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을 되짚고 있던 그때 혁무진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저기, 조장님. 질문이 있는데요.”
“말해.”
“진짜 갑니까?”
“그럼 가짜로 가냐?”
“그, 너무 위험할 것 같은데요.”
“뭐 어때. 지금까지도 항상 위험했는데.”
“……당연하게 말씀하시니까 할 말이 없네요.”
“할 말 없으면 입 다물고 짐이나 싸.”
“언제 출발하는데요?”
“아, 내가 말 안 했나?”
중요한 걸 깜빡했군.
다른 사람들도 목적지와 그 이유에 대해 집중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차례차례 바라본 나는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오늘 당장.”
“……!”
“……!”
작은 파문이 순식간에 번져 나간다. 그중에서도 특히 혁무진과, 호거아(虎巨兒) 태산이 그랬다.
“농담이시죠?”
“지금 같은 상황에 농담할 것 같냐?”
“말도 안 돼. 당장 챙겨야 할 옷이나 물자는요?”
“말 돼. 우리가 언제부터 의식주 철저하게 따졌다고. 그냥 벽곡단이나 챙겨.”
후욱, 훅!
깜짝이야. 열양지기인가.
놀라울 만큼 뜨거운 콧김을 뿜어낸 태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안 된다! 태산이! 오늘 저녁! 고기 먹기로 했다!”
“고기? 고기 좋지.”
나는 혁무진을 향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들었지? 육포도 챙겨라.”
“육포! 맛없다!”
“……그냥 닥치고 아무거나 처먹어.”
젓가락도 뜯어 먹게 생긴 놈이 입맛 까다로운 것 보소.
내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사마표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태산. 네 이 녀석.”
“주, 주군.”
“언제까지 그리 천방지축으로 굴 테냐. 만약 계속 생떼를 쓴다면…….”
“태산이. 안 그러겠다. 용서해 줘라. 주군.”
저 덩치 큰 놈이 얼마나 기가 죽었는지, 나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앞으로 태산에 관한 일은 사마표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송일섬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너도 불만 있냐?”
“물론. 다른 곳도 아니고 남만이니까.”
작게 혀를 찬 송일섬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없는 것으로 치지. 애석하게도 이미 선금을 두둑이 받아 버렸거든. 열 배나 되는 위약금을 지불할 자신도 없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한데. 마음에 들어.”
“한 번 맺은 계약은 지킨다. 그러지 않았다면 추혼객(追魂客)이라는 이름도 없었어.”
강한 신념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한 마디를 툭 내뱉은 송일섬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최종 결정은 내가 아니라 고용주가 하는 거고. 그렇지 않소?”
당연하게도 마지막 물음은 내게 던진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무 말 없이 어떤 생각에 잠겨 있던 한 사람, 은비화(隱匕花) 주화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떤 대답을 할지.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귓가를 파고드는 나긋하면서도 맑은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었고 송일섬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제기랄, 남만이라니.”
“계약 내용을 다시 상기시켜 드릴 필요는 없을 거라 믿어요. 송 대협.”
앓는 소리를 흘리는 송일섬을 뒤로한 주화란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신비한 빛을 띤 검푸른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꼭…….
“진 대협?”
“아, 네.”
방금 뭐였지. 잠깐 졸았나.
주화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나는 내심 중얼거렸다.
‘안 되지. 안 돼.’
벌써부터 이러면 곤란하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언제나 냉정한 상태에서 상황에 임해야 했다.
몇 번이고 뇌까리며 마음을 다잡은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됐네요. 안 그래도 물어볼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말을 이으려던 그때였다.
“남만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과 필요한 것에 대해서겠죠? 좋아요.”
“예?”
“왜요? 제 생각이 틀렸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너무 정확해서 깜짝 놀랐다.
뭐야, 이거. 설마 독심술이라도 익힌 건가? 관심법. 뭐 그런 거야?
말문이 막힌 채 눈을 깜빡이는 나를 향해, 주화란이 싱긋 웃어 보였다.
“놀라실 것 없어요. 아까부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
“저도 정식으로 화룡각의 일원이 되었으니,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한 사람 몫을 해내야겠죠.”
톡. 톡톡.
그녀 역시 한 사람의 검수(劍手)라는 것을 알려 주듯, 새하얗지만 거친 손가락이 일정한 속도로 탁자 위를 두드린다.
그리고 이어 흘러나오는 목소리.
“우선 진 대협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물자는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좋겠네요. 의복은 필요 없고, 식량도 건량으로 이틀 치면 충분해요.”
“건량이라니! 그것만은 제발! 태산이 죽는다!”
태산의 통곡에 주화란이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육포도요.”
“저 새끼 보호자 뭐 하냐. 아, 주 소저는 계속 말씀하세요.”
“네. 그럼…….”
골칫덩이를 치워 버린 주화란은 막힘 없이 말을 이어 갔다.
필요한 물품부터 남만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까지.
다행히도 그녀는 수년 전 남만에 표행을 갔던 경험이 있었고, 조부인 표왕이 남긴 기록을 통해 곳곳의 지형과 숨겨진 길 역시 알고 있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천하를 방랑하는 낭인의 삶을 살았던 송일섬조차 놀라움을 표할 정도였다.
“그런 길이 있었단 말이오?”
주화란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할아버님의 기록에 따르면 확실해요.”
“나 역시 그곳에 일 년 정도 머물렀던 적이 있소.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할아버님의 기록에 따르면 확실해요.”
“아니, 그건 아는데. 내 말은.”
“할아버님. 기록.”
“이보시오. 내 말도 좀.”
“표왕.”
“……믿겠소. 믿을 테니까 계속하시오.”
표왕이 누구인가. 자그마치 십만의 마교도가 천하를 뒤덮은 와중에도 그 전설적인 만리행을 성공시킨 레전드 중의 레전드.
바로 그 P왕의 의지를 이은 주 P. 화란은 물 만난 고잉메리호처럼 막힘 없이 나아갔고, 불과 한 식경이 지나기도 전에 남만으로 향하는 모든 경로 계획을 수립하는 기염을 토했다.
“후, 우선은 여기까지네요. 질문 있으신 분?”
후웅!
트롤의 것으로 의심될 만큼 굵은 팔이 번쩍 솟구쳤다.
“네, 뭐든 물어보세요.”
호거라 태산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태산이. 육포 이후로 아무것도 이해 못 했다.”
“…….”
“…….”
어떤 새끼가 노키즈존에 애를 데려왔냐.
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사람을 쏘아보았다.
“야, 보호자.”
“미안하군.”
텁.
“읍. 읍!”
내 일갈에 즉각 태산의 입을 틀어막은 사마표가 주화란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미안하오.”
“……괜찮아요.”
말투는 덤덤하지만, 가라앉은 목소리만큼은 숨길 수 없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아니, 당연한 일이지.
‘아무리 정략혼이라고 해도 명색이 약혼까지 했던 사이니까.’
얼음 계열 마법만큼이나 쿨하다는 할리우드 코쟁이 놈들이라면 모를까. 내가 살던 현대의 대한민국이나 무림은 유교 걸과 유교 보이들이 수두룩하다.
보는 나까지 어색한데 주화란은 오죽할까.
‘나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자세히 모르고.’
문득 그리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왠지 모르게 피부에 닿는 옷감의 질감이 거슬리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작고 얇은 바늘로 쿡쿡 찌르는 느낌이다.
“조장님?”
“음?”
짧은 상념을 깨트린 것은 혁무진의 부름이었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할 필요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은 나는 애써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우선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대로 움직인다. 물품은 최소한으로. 주어진 시간은…….”
내 시선을 받은 주화란이 대답했다.
“반 시진. 넉넉잡고 반 시진이면 충분해요. 눈에 띄지 않게 필요한 말과 마차를 수배해야 하니.”
“어디에서 집결하는 게 좋겠습니까?”
“음. 진 대협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건 공개된 임무가 아니다. 최대한 빠르면서도, 동시에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인파로 들끓는 인근을 조용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일단 흩어진 뒤 2차 집결지를 결정해야 했다.
“대별산(大別山). 그곳에서 다시 만나죠.”
“좋은 생각이에요.”
고심 끝에 나온 대답에, 주화란을 비롯한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