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51
#550화
모두가 떠난 뒤. 혁무진이 필요한 것을 챙긴다며 부산스럽게 사라지자 홀로 남게 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퀘스트 창 오픈.”
띠링.
퀘스트
[남만행(南蠻行)]무림 맹주 매종학이 화룡각에 첫 번째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남만으로 향하여 혹시 모를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당신과 화룡각의 앞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상황.
늘 주위를 경계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행동하십시오.
등급 : 절정
제한 : 진태경 및 화룡각 인원
임무 : 남만 진입 (미완료)
보상 : 연계 퀘스트
???
실패 : 칭호, [남만을 못 가] 획득
명성 및 신뢰도 대폭 하락
[남만행]은 매종학에게 임무를 받으며 생성된 퀘스트였다.설명이나 임무 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번에는 시스템도 딱히 이렇다 할 힌트를 던져 주지 않았다.
‘제한 시간도 없고.’
그만큼 시간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으로 해석되는 건 결코 과민 반응이 아닐 것이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퀘스트 창을 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다행이긴 한데…….’
만약 일이 터진다면 걷잡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화룡각의 인원들을 이끌고 신속히 사태를 진압, 무사히 귀환해야 한다.
혼자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책임자가 되다니. 새삼 각주라는 두 글자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그때였다.
“저어…….”
불쑥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웬 보따리를 든 청풍이 반쯤 부서진 문 앞에서 멀뚱멀뚱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은인, 들어가도 돼요?”
“……누가 들으면 항상 허락 맡고 들어온 줄 알겠네.”
문 멀쩡할 때는 노크도 안 하고 벌컥벌컥 잘도 들어오던 녀석이, 박살 난 문 앞에서 저러고 있으니 기도 안 찬다.
실소를 흘린 나는 청풍을 향해 손짓했다.
“그냥 들어와. 안 그래도 한 번 보러 가려고 했는데, 잘됐네.”
“굳이 허락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들려온 대답은 당연하게도 청풍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유령처럼 나타난 문경을 보며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청 소협한테 한 말이었는데요.”
“그래서 말했을 텐데. 네놈 허락은 필요 없다고.”
아무렇지 않게 별채 안으로 들어선 문경이 탁자 위에 놓인 잔과 흐트러진 의자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누가 왔다 간 모양이군. 네놈과 혁가를 포함해서 총 여섯. 그중 한 명은 여인이고.”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보면 안다.”
건조한 문경의 대답에, 청풍이 천진난만한 어조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분들이 떠나는 거 보고 왔어요. 사람 없을 때 찾아와야 할 것 같아서.”
“…….”
“…….”
뭐여, 시벌.
불신이 가득 담긴 내 눈빛에 문경이 뭐 어쩔거냐는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보면, 안다.”
“그 보면 안다는 게, 진짜 눈으로 봐서 아는 거였습니까?”
“이런 것 따위 굳이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먼 산 보지 마십쇼. 어차피 주위에 건물만 가득해서 산도 안 보이는데.”
“대신 네놈의 앞날이 보이는군.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이 방에 혈향이 가득 찰 것 같은 기분이야.”
“…….”
빌어먹을 노인네. 이러면서 본인은 의생이니 어쩌니 코스프레나 하고 있다니.
악랄한 폰의생의 만행에 치를 떤 나는 청풍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작별 인사를 드리려고요.”
“뭐?”
청풍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아까 맹주전 앞에서 저한테 먼저 가라고 하셨을 때, 왠지 은인께서 곧 떠나실 것 같았거든요. 헤헤.”
직접 말한 적도 없는데, 청풍도 내심 어느 정도 짐작을 했던 모양이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임무야.”
“아앗. 그럼 어디로 가세요?”
“남만.”
“남……만이요?”
내 대답에 청풍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뭔가를 생각하던 문경이 나직하게 뇌까렸다.
“남만이라면, 야수궁?”
“예.”
“그 괴이한 현상. 균열 때문이로군.”
“맞습니다. 두 번째 균열이 일어난다면, 아무래도 암천 입장에서는 그곳만큼 적격인 장소를 찾기 힘들 테니까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중원과의 거리가 멀고도 험하니, 남만야수궁이 당한다면 운남(雲南)을 시작으로 혼란이 들불처럼 번져 나갈 테고.”
나 역시 문경의 생각과 같다.
만약 정말 암천이 남만에서 흉계를 꾸미고 있으며,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전화(戰火)의 불길은 운남성 한 곳에서 멈추지 않는다.
‘맞닿아 있는 귀주(貴州), 광서(廣西). 그리고 지난번 전투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사천(四川)까지 옮겨붙겠지.’
귀주성과 광주성은 특히나 기반이 취약한 곳이다.
각 성에 존재하는 문파와 무림인들의 숫자가 다른 지방보다 적고, 그 세력이 지닌 힘 역시 떨어지니 더 빠르게 타오를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만행이라, 험난한 여정이 되겠군.”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면 다행이고, 아니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 내야죠.
“고작 여섯이서 말이냐?”
“무려 여섯이죠.”
“……?”
“제가 소문에 듣기로는 그중에 화왕과 살성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젊고 잘생긴 초절정 고수가 하나 있다라고요. 혹시 들어 보신 적 없습니까?”
“못 들어 봤다. 특히 잘생겼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아, 예.”
칼같이 자르는 것 보소. 내 헛소리를 단번에 틀어막은 문경이 청풍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대신 다른 소문은 들어 봤지. 만두에 환장하는 어느 놈이 젊은 의생 하나를 붙잡고 눈대중으로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
“어?”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생각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다. 내 표정을 본 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네놈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게 맞을 거다.”
“정말입니까?”
“사실이다.”
“아니, 왜 킹갓검성을 놔두고 굳이 성격도 더러운…… 죄송합니다. 말이 헛나왔네요.”
나는 어느새 소매에서 소검(小劍)을 꺼낸 문경의 스산한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청풍을 바라보았다.
“만약에 협박당하는 거라면 눈을 두 번 깜빡여.”
“이런 쳐죽일…….”
“헤헤. 전부 사실이에요, 은인.”
청풍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아. 나도 농담 한번 해 본 거야.”
굳이 듣지 않아도 안다. 녀석이 왜 문경을 찾아갔는지. 그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강해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맞춰 변하기 위해서.’
일 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객잔으로 향하는 내게, 거지꼴을 한 웬 젊은 놈이 다가와 대뜸 당과 하나만 달라고 부탁한 것은.
나는 혁무진의 만류에도 그에게 모든 당과를 주었고 그렇게 청풍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많이 달라졌지. 나도, 저 녀석도.’
가문의 수치라 불리던 태원진가의 삼공자는 무림을 격동시키는 초절정 고수가 되었고, 무공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겪는 크고 작은 일들이 마냥 좋았던 젊은 천재는, 어느 날부터인가 단단한 심지를 품게 되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진다.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청풍의 변화를, 나를 비롯한 극소수의 주변인들은 알고 있었다.
툭.
문득 손을 뻗어 청풍의 어깨를 두드리자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은인?”
“그냥. 힘내라고.”
빤히 나를 바라보던 청풍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네. 은인도요.”
“당연히 내가 더 힘내야지. 그나마 청 소협은 믿을 만한 구석이라도 있지, 이쪽은 비빌 수 있는 언덕도 없거든.”
말없이 나와 청풍의 대화를 지켜보던 문경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언덕이 보이지 않는데.”
“그 언덕은 하남에 남고, 저와 다른 사람들만 떠납니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군. 화왕, 그자가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낯간지럽지만 대의(大義)라고 해 두죠. 지금 상황에서는 더 많은 손이 필요하니까요.”
대답하는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이 공허했다.
아마도 적천강을 처음 만난 이후, 그와 떨어져 움직이게 되는 것이 처음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천강이 오랜 시간 동안 의식을 잃었을 때도 우리는 늘 함께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
적천강의 품 안은 크고 넓었지만, 그 안에 계속 머무르기에는 내가 너무 일찍 성장해 버렸다.
그리고 격변하는 상황은 우리 두 사람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문득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로변을 오가는 얼굴들은 온통 낯설고 흐릿하다.
기다리는 사람은 끝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거, 너무하시네.’
그래도 마지막인데 얼굴 정도는 보러 와 주지.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한 마디.
임무를 받고 집무실을 떠나기 전 미리 작별 인사를 하긴 했지만, 섭섭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헌터이며 무림인이기 전에 한 명의 사람이기에.
“……뭐, 금방 다시 보겠지.”
“그게 무슨 소리냐?”
“별것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내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창밖에서 눈을 떼려던 바로 그때, 저 멀리서 자그마한 짐 마차 한 대가 덜컹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비단 하남이 아니어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마부석에 변복(變服)으로 신분을 숨긴 절정 고수가 앉아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송일섬.’
드디어 왔군.
호언장담대로 반 시진 안에 모든 준비를 끝마친 주화란이 은밀하게 하남을 빠져나갈 마차를 보낸 것이 틀림없다.
이미 아래층에서는 계단을 올라오는 혁무진의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슬슬 떠날 때인가?’
이 별채도 제법 익숙해졌는데, 이번 생에는 역마살이 제대로 낀 모양이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나는 두 사람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늦기 전에 이만 가 봐야겠네요. 여기까지 찾아와 줘서 감사합니다. 청 소협도.”
머뭇거리던 청풍이 줄곧 손에 들고 있던 봇짐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요, 은인.”
“이게 뭐야?”
“만두요. 하남에서 제일 맛있는 가게에서 샀어요. 먹고 싶었는데 은인 생각하면서 꾹 참았어요.”
문경이 조용히 덧붙였다.
“오는 길에 족히 다섯 개는 처먹었다. 꾹 참은 게 그 정도지.”
“앗, 아아앗…….”
이미 냄새로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감동은 감동이다. 설령 다섯 개를 빼먹었어도 그 감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럼 이만.”
피식 웃으며 봇짐을 받고 돌아선 그때, 귓가를 파고드는 한 줄기 전음(傳音)이 있었다.
– 그거 아느냐? 지금까지 내 가르침을 받은 놈들은 모두 죽었다.
“……!”
– 그러니 헛되이 죽지 말거라. 네놈이 남만에서 죽어 버리면, 내가 지금까지 참은 것이 아까워지니까.
참으로 살벌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손에 들린 만두처럼 그 마음이 확실히 전해졌다는 것이다.
우뚝 선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저벅.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진, 힘찬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