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56
#555화
철탑 같은 체격의 사내였다. 고저 없는 표정은 바위처럼 딱딱했고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리고…… 눈이 있었다.
붉게 핏발 선 한 쌍의 눈동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와 슬픔. 또 다른 여러 감정이 뒤섞인 사내의 눈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었다.
그것은 UN 상임 이사국이자 강대국으로 손꼽히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라 해도 예외일 수 없었다.
‘무슨 놈의 눈빛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칼날처럼 파고드는 시선에, 순간 흠칫한 국무총리는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비록 상대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지닌 헌터라지만 자신 역시 환갑이 되도록 정치라는 진흙탕에서 구른 몸.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한결 여유를 되찾은 국무총리가 사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이고, 여기 계셨군요. 석고준 씨.”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던 사내, 석고준이 악수 대신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장 총리님.”
한참 연장자에 대한 예의도, 자국의 국무총리를 대하는 태도도 아니다. 장 총리의 이마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맺혔다.
“……허허. 생각했던 것보다 상심이 크신가 보네. 내 그 기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해?”
석고준의 눈동자가 한층 붉어졌다. 지금 그가 어떤 심정인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너구리 같은 늙은이가 감히 웃으며 저딴 말을 지껄이다니.
까득.
말아쥔 주먹에서 뼈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한때는 말수가 적고 감정 표현이 드물어 석상 같았던 그는, 누구보다 존경하고 따랐던 이정룡의 죽음으로 인해 확연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크흠.”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장 총리가 아니다. 불안한 눈빛으로 석고준의 주먹을 바라본 그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내가 실언을 한 모양이군. 마음 상했다면 사과하리다.”
“……됐습니다. 저도 감정이 격해져 흥분한 모습을 보였군요.”
석고준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진정시켰다.
그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던 삼십여 년 전의 고아가 아니었다. 스승에게 물려받은 것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런데, 설마 총리님 혼자 오신 겁니까?”
드디어 올 게 왔다. 불쑥 흘러나온 석고준의 물음에, 장 총리는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소만.”
“그럼 대통령께서는?”
“어디 계신지는 이미 석고준 씨도 알 것 같은데.”
장 총리가 빈틈없이 막혀 있는 창밖을 힐끗 바라보았다.
비록 지금은 특수 처리 된 암막 커튼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저 커튼만 걷어내면 곧장 청와대가 보인다.
“각하께서는 지금 당장 처리하셔야 할 업무가 많아요. 세 시간 뒤, 정식으로 국가장(國家葬)이 시작되면 그때 오실 거요. 이미 비서실 측에서 전달한 것으로 아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장 총리의 모습에, 석고준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한 번 더 여쭤본 겁니다. 제가 전달받은 사안이 믿기지 않아서.”
“뭐요?”
“장 총리님. 아니…….”
스윽.
소파에 기대고 있던 상반신이 장 총리를 향해 기울었다.
석고준의 붉은 눈동자에 늙은 정치인의 모습이 비치고, 오싹한 음성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장택환 씨.”
“……!”
“헛짓거리 그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합시다. 당장 돌아가서 대통령 독대 주선해요. 아직 국가장 절차 시작까지 세 시간 남았으니까, 앞으로 한 시간 드립니다.”
“이, 이봐요! 지금 어딜 감히…….”
“감히?”
파스슥.
장 총리의 눈이 부릅떠졌다. 단단한 크리스털 잔이 석고준의 손아귀에서 고운 가루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뒤바뀐 어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래, 감히. 감히 당신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지금까지 걸어온 꽃길을 누가 깔아 줬는지 잊었나?”
“다, 당신…….”
늙은 정치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석고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수십 년 정치 인생에서 아레스 길드라는 이름은 지울 수 없는 얼룩이다.
장 총리가 흘린 오물을 치우고, 밑을 닦아 주고, 차 트렁크에 무거운 상자를 실은 것이 바로 그들이니까.
하지만…….
“그, 그건 이정룡 부길드장이었소! 당신이 아니란 말이오!”
“맞아. 모두 부길드장님께서 하신 일이었지. 아니, 내 스승님께서.”
석고준의 입가에 건조한 웃음이 맺혔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할 일이 되었고.”
“……!”
“착각하지 마. 그분이 돌아가셨어도 아레스 길드는 아직 건재해.”
아레스 길드는 굳건한 철옹성이다.
인류를 구원한 불멸의 영웅이자 구세주인 천태민이 주춧돌을 세웠고, 이정룡은 누구도 넘보지 못할 철벽을 구축했다.
“여의도에, 이 나라에 우리 손이 안 닿는 곳은 없다.”
자본주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매번 발표되는 포브스 잡지의 대기업 순위에는 세계 10대 길드 중 어느 곳도 포함되어있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거대 길드가 가진 힘과 막대한 부를.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아레스 길드의 영향력을.
그리고…… 그 힘은 죽은 자로부터 산 자에게 넘겨지게 될 것이다.
“내가 그분에게 물려받은 것이, 유지(遺志)뿐만이라고 생각하나?”
“뭐, 뭐요?”
장 총리의 눈이 커졌다. 국정원으로부터 전해 들은 정보에 의하면 이정룡의 유언장은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멋모르는 국민들이야 이래저래 말이 많았지만, 그는 그 정보를 굳게 믿고 있었다.
“그, 그럼 당신이…….”
순간. 석고준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당신이 아니라, 부길드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텐데.”
“……!”
늙은 정치인의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숨 막히는 침묵 끝에 장 총리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석고준 씨. 아니, 석 부길드장이 생각하는 것만큼 상황이 녹록지 않아요.”
석고준의 눈에 서려 있던 붉은 빛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가 뒤를 이었다.
“압니다. 그러니 우리 장 총리님께서 더 애쓰셔야죠. 다른 분들과 함께.”
“후우.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소문도 있고.”
“소문이라면…….”
“진태경 헌터. 아니, 그에 관하여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오. 물론 그와도 상당한 연관이 있지만.”
진태경이라는 세 글자에 즉각 반응하는 석고준에게 황급히 변명한 장 총리가 말을 이었다.
“석 부길드장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평화 길드의 그 젊은 팀장 말이오. 이름이 아마 최민우라던가.”
“……계속하십시오.”
“이정룡 전 부길드장께서 작고하신 이후로 주위에서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아요. 아무리 뒤를 이을 사람이 있다고 해도…… 아레스 길드가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이정룡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천태민의 곁에서 대격변을 잠재운 영웅인 동시에 전 세계를 통틀어도 수위에 꼽히는 S급 헌터.
그가 죽었다고 해서 아레스 길드가 한순간에 붕괴하는 것은 아니지만, 길드의 전력과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는 것은 당연했다.
‘빌어먹을.’
석고준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장 길드 내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잡음과 반발이 바로 그 증거였고, 과거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태도를 취한 장 총리가 증인이었다.
‘스승님이었다면. 스승님이 살아 계셨다면…….’
석고준의 혀끝에서 맴도는 중얼거림은 입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더 이상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마음속으로 다짐한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장 총리님께서는 걱정도, 시간도 많으신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아레스 길드 측에서 해결할 일입니다. 장 총리님께서는 해야 할 일을 하셔야죠.”
“아니, 그게 아니라.”
변명하려는 장 총리를 물끄러미 바라본 석고준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오십 분 남았습니다.”
“오, 오십 분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아까 말씀드린 한 시간에서 십 분 지났으니, 오십 분. 이제 앉아 있을 시간이 없으실 것 같은데. 제 말이 틀립니까?”
“……!”
어떻게 해서든 국가장이 시작되기 전, 대통령과의 독대를 성사시키라는 뜻이 담긴, 명백한 축객령이다.
곧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 돌아선 장 총리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닿았다.
“한 가지 더. 그분…… 길드장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뒷말 나오지 않게 잘 단속하세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까.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장 총리가 밀실을 빠져나갔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졌다. 말없이 텅 빈 자리를 응시하던 석고준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왼팔을 향했다.
두 개의 검은 줄이 표시된 완장. 마땅한 혈육이 없는 이정룡을 위해 상주(喪主)가 된 그였다.
‘스승님. 그곳에서는 평안하십니까.’
부모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정룡의 얼굴은 사무치게 그립다.
아마 그는 평생토록 자신의 스승을 잊지 못할 것이다.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두 사람의 이름도.
“……진태경. 최민우.”
스승을 죽인 자. 그리고 스승이 이룩한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자.
악문 잇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뜨거웠고,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분노로 몸을 떨던 석고준은 문득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차륵.
손가락 끝에 닿은 차가운 금속의 촉감.
석고준은 군데군데 도금이 벗겨져 흉한 모습을 한 목걸이를 풀어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스승님.’
그도 안다. 이 목걸이는 이정룡이 아니며 이정룡이 남긴 유품도 아니라는 걸.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한때 아크 리치의 본거지였던 폐허 속에서 운 좋게 형태를 유지한 것은 이게 유일했다.
비록 단순한 잡동사니에 불과하지만, 석고준으로서는 조사단장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빼돌릴 만한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석고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 성대한 장례식의 상주다.
문밖에서 그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세계 각지의 언론에 얼굴을 비춰 아레스 길드의 새로운 실세가 누구인지 알려 주어야 했다.
달칵.
문을 열자 복도에 나란히 도열한 수십여 명의 남녀가 고개를 숙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A급 헌터라는 것을 증명하듯, 눈빛은 강렬했고 자그마한 동작에도 힘이 가득했다.
이들이 바로 석고준의 새로운 손발이다.
“가자.”
석고준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발걸음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 * *
아레스 길드의 전(前) 부길드장. 이정룡의 국가장은 5일간 성대하게 치러졌다.
세계 각지의 언론과 거물들이 대한민국을 찾았고, 수십만에 달하는 국민들 역시 국가장이 진행되는 동안 거리에 나와 애도를 표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장 오늘이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누군가의 죽음은 그리 크게 와닿지 않는 법이다.
촤악!
푸푸푸푹!
“죽여, 지금 찔러!”
“간격 유지! 야! 이 새끼야! 나가지 마!”
– 키에에에엑!
습하고 어두운 동굴 내부.
찢어지는 고성이 울려 퍼지고, 일부러 진흙을 발라 광택을 죽인 병장기는 쉴 새 없이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해 움직인다.
쉬쉭, 푹!
“성하야!”
“야, 이 몬스터 새끼들아!”
– 키룩. 키리리릭!
헌터와 몬스터의 전투는 치열했고, 한편으로는 처절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색을 지닌 두 종족의 핏물이 사방에서 솟구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구구구구궁!
지축이 흔들리고 동굴 천장의 종유석이 떨어진다.
동시에 어디선가 뿜어져 나온 강대한 마력(魔力)이 게이트 내부를 휩쓴 순간, 인간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변이 게이트!”
“이런 씨발……!”
하급 게이트에서 나올 수 있는 마력이 아니다. 최소 중급. 아니 상급.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이, 이건.’
‘끝이다.’
죽음. 그 단어와 함께 모두의 눈앞에 절망이 내려앉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시벌. 옛날 생각나네.”
누군가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컴컴한 동굴 내부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