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58
#557화
후우우.
후텁지근한 숲의 공기 사이로 내뱉은 숨이 섞여 들어간다. 나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중심은 낮게. 하체는 굳건하게. 공격을 시도할 때는…….’
강맹하며, 망설임 없이.
번쩍.
눈을 반개(半開)함과 동시에 그대로 땅을 박찼다.
파앙-!
발끝에서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감과 동시에 무지막지한 풍압(風壓)이 전신을 덮쳤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육체는 압력을 밀어 냈고, 비스듬히 기운 신형은 바람을 거스르며 포탄처럼 쏘아졌다.
쐐애애액!
머리카락이 세차게 흩날렸다. 맹렬한 바람과 함께 주위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같이 가자며 고래고래 외치는 스켈레톤 킹의 목소리가 파공성에 파묻히고.
깊고 끈끈한 늪과, 울창한 풀숲을 짓밟으며 진군하는 수백의 몬스터가 어느덧 코앞에 있었다.
– 그워어어어어!
수백여 그루, 혹은 마리.
엔트(Ent)라는 이름을 가진 저 괴물들을 무슨 단어로 헤아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이겨.’
이건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다. 마치 자신이 왕이라도 되는 양, 엔트들의 뒤에서 이쪽을 지켜보는 사이클롭스도 예외일 수 없다.
지금 내 전신을 타고 흐르는 삼 갑자의 강대한 열양지기가 확신의 증거고, 숱한 강적들을 쓰러트리며 이 자리에 있는 나 자신이 증인이며, 백염의 창날을 휘감으며 솟구친 청백색의 강기(罡氣)가 바로 판사다.
그리고 그 판결은 신속하고, 파괴적이었다.
‘지금.’
사아악.
푸른 불꽃이 주변의 습기를 증발시켰다. 찰나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짧은 순간, 백염의 투명한 창날은 이미 선두에 선 놈들을 비스듬히 스친 후였다.
슈왁!
요란한 폭발음도, 비명도 없었다.
단지 한 줄기 바람이 불었고, 창날에 서린 극양의 기운이 허공을 따라 미세한 선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 선은 마치 전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어떤 것의 일부를 닮아 있었다.
‘화룡신창. 일 초식.’
화룡일미(火龍一尾).
뒤에 마땅히 이어져야 할 네 글자를 마음속으로 뇌까리기도 전에, 허공에 그어진 희미한 선이 일렁였다.
잠들어 있던 청백색의 불꽃이 짧은 잠에서 깨어났다.
화륵.
작았던 불씨가 타오른다.
엔트의 몸통과, 가지와, 무성한 잎사귀를 장작 삼아 겁화(劫火)로 화한 불꽃이 선에 닿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 순간.
콰아아아아-!
청백색의 빛이 터져 나와 사방을 밝게 물들였다.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는 온통 그을리고 녹아버린 땅과 우뚝 굳어 버린 수백의 엔트. 그리고 어디선가 울려 퍼진 맑은 종소리뿐이었다.
띠링. 띠링. 띠링.
– 치명적인 일격!
– [Lv.95 타락한 엔트 대전사]를 처치했습니다!
– [Lv.90 타락한 엔트 선봉대]를 처치했습니다!
– [Lv.89 타락한 엔트 선봉대]를 처치했습니다!
.
.
.
– 처치한 대상과의 레벨 차이가 20 이상이므로, 획득하는 경험치가 감소합니다.
– 일격에 20개체 이상의 [타락한 엔트]를 처치했으므로, 보너스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 대량의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 알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띠링.
– 당신은 수많은 적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물러서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적들입니다.
– 칭호, [일기당천]의 칭호 효과가 발동됩니다!
– 확인된 적들의 숫자 : 281
– 다수의 적을 상대하게 되었으므로, 적의 숫자에 따라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 다수의 적과 전투를 치를 시, 전투 시 체력의 소모가 크게 줄어들며, 피로를 쉽게 느끼지 못합니다!
일기당천(一騎當千).
두 달 전, 아크 리치의 명령을 따르던 언데드 군단을 단신으로 쓸어 버리며 얻은 칭호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띠링. 띠링. 띠링.
연달아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근력], [체력]을 포함한 모든 능력치가 소량 상승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일기당천]의 가장 큰 효과 중 하나는, 한 가지 스탯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 [위압]이 대폭 상승합니다!
– 들불처럼 일어난 위엄과 기세가 적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 당신의 [위압]에 적들이 크게 위축됩니다!
– 당신의 [위압]에 아군의 사기가 크게 상승합니다!
‘위압.’
적을 억누르고, 아군을 북돋는 힘. 나 한 사람을 넘어 전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능력. 시스템이 알려 준 정보는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어느덧 사방에서 좁혀 오던 포위망이 주춤거리고, 두껍고 난폭하게 움직이던 나뭇가지는 우뚝 멈춰 있었다.
– 그우우우…….
엔트. 거대한 나무에 깃든 악한 정령들이 위축된 울음소리를 흘렸다.
단단한 나무껍질 사이로 보이는 수백 쌍의 까만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려움.’
익숙한 감정이다. 한때는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마주하는 적들의 것이 되어 버린.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차오르는 고양감을 느끼며, 나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 그워어어어.
– 그륵. 구우우.
구구구궁.
내가 나아가는 만큼 엔트가 물러선다. 아니, 밀림 전체가 움직였다.
놈들이 한데 뭉쳐 흘리는 마력은 내 전신으로부터 뿜어지는 기파과 위압에 짓눌렸다.
‘힘. 기세.’
전투를 결정지는 두 가지 요인 중 어느 것 하나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싸우지 않을 이유가 없고,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물론 그럼에도 단 하나의 변수는 있었다.
– 크아아아아아!
사이클롭스(Cyclops).
바위보다 거대한 외눈을 지닌, 신화 속 거인의 포효에 온 밀림이 들썩인다.
주춤거리며 뿌리로 뒷걸음질하던 엔트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띠링.
– [거인의 포효]가 발동되었습니다!
– [위압]의 효과가 미약하게 해소됩니다!
– 일부의 적들이 [위압]의 압박에서 벗어납니다!
이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다운 능력이다.
하지만 그런 사이클롭스도 내 압박을 완전히 걷어낼 수는 없었고, 나 역시 놈에게 충분한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아니다. 정정한다. 내가 아니라, 우리다.
“하아압!”
콰드드드득! 퍼버벅!
힘찬 외침과 함께 허공에서 쏘아진 뼈의 창이 엔트들을 꿰뚫는다.
어느새 내 뒤를 따라 도착한 스켈레톤 킹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내질렀다.
“다 덤벼라! 이 하찮은 몬스터들아!”
“…….”
이 새끼,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는데.
그 와중에 [일기당천]의 효과를 톡톡히 봤는지, 잔뜩 고양된 스켈레톤 킹은 앞뒤 보지 않고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감히 존귀한 이 몸에게 대적하려 드느냐! 죽어! 죽어! 다 죽어어어!”
파파파팟!
스켈레톤 킹이 약간 맛이 간 놈이긴 해도, 한 단계의 진화까지 거친 네임드 몬스터다.
녀석이 지닌 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고, 땅과 허공에서 솟구친 뼈들은 쉼 없이 나뭇가지를 부수며 엔트의 몸통을 꿰뚫었다.
퍼버벅!
“어딜 감히 이 몸 앞에서 앙증맞은 잎사귀를 흔드느냐!”
와지끈!
“네깟 놈들이 아무리 덤벼 봤자 뼈에 계란 치기다!”
– 구워어어!
구슬픈 비명이 울려 퍼지는 산림 파괴의 현장.
스켈레톤 킹의 난입과 동시에 텅 비어 버린 길을 따라, 나는 화살처럼 쏘아졌다.
쉬이이익! 서걱!
바람처럼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창날로 사방을 내리긋자, 허공을 가로지르는 불꽃과 함께 엔트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소멸한다.
띠링. 띠링. 띠링.
귓가를 시끄럽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몸을 틀었다. 맹렬한 기세로 쏘아진 나무줄기가 옆구리를 스치며 지면을 꿰뚫는다.
콰앙!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진흙. 나는 재차 휘둘려지는 나무줄기를 밟으며 가볍게 몸을 튕겼다.
타닥. 스윽.
문경의 가르침을 받은 이후 더욱 부드럽고 정교해진 움직임.
깃털처럼 나아간 신형은 어느새 유난히도 큰 거목(巨木)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Lv.102 타락한 엔트 장로]– 인. 간! 죽. 어. 라!
높은 것은 레벨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상당한 지능까지 갖추었는지 언어를 구사하는 엔트 장로를 향해, 나는 망설임 없이 창날을 비스듬히 내리그었다.
“치코리타 어서 오고.”
– ……!
쉭, 서걱!
방어를 위해 황급히 끌어모은 수백 개의 나뭇가지도. 나를 향해 쏘아 보낸 가시도 전부 소용없다.
창날이 스친 궤적을 따라, 둘레만 수 미터에 이르는 거목이 스르륵 분리된다.
쿠웅! 화륵!
굉음과 함께 쓰러진 거목이 활활 타오른다.
빽빽한 나이테가 새겨진 나무 밑동을 밟고 솟구친 나는, 마침내 허공을 가린 거대한 존재와 마주할 수 있었다.
[Lv.130 ‘붉은 눈’ 사이클롭스]놈이다. 이 밀림의 주인. 수백의 엔트를 종으로 삼은 흉포한 외눈의 거인.
비로소 확인된 놈의 정체는 소격변 당시 아크 리치의 휘하에 있던 어느 몬스터보다도 레벨이 높으며, 이명(異名)마저 붙어 있는 네임드 몬스터였다.
‘이런 하급 게이트에 네임드 몬스터라…….’
문득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생각은 다음으로 미뤄야 한다. 까마득한 허공으로부터 내리꽂히는 거대한 그림자 때문이었다.
후웅!
지름만 십여 미터에 달하는 바위. 아니, 운석에 가까운 그것이 바람을 뭉개며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것은 회피가 아닌 정면 돌파였다.
‘속전속결.’
나는 아래에서 위로 쏘아지고. 바위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힌다.
피할 수 없는 격돌의 순간, 나는 백염에 깃든 열양지기를 창날의 끝으로 쏟아부으며 바위의 정중앙을 향해 내질렀다.
그리고…….
서걱.
마치 뜨거운 칼로 치즈를 가르듯, 부드럽게 바위를 파고 들어간 창날이 회전했다.
콰드득.
정확히 일점(一點)을 돌파한 뒤 내부를 찢어발기는 막강한 강기에, 거대한 바위의 표면에 선명한 균열이 아로새겨진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앙!
우레와 같은 굉음과 함께 수백, 수천 개의 파편으로 나뉜 바위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 ……!
하나뿐인 붉은 눈동자를 부릅뜬 사이클롭스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해 몸을 휘청였다.
쿠궁. 콰직!
– 그워어어어!
거인의 움직임에 지면이 부서지고 작은 체구의 엔트들이 짓밟혀 비명을 내지른다.
그러나 사이클롭스도, 나도 지상의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눈앞의 적을 쓰러트리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 이이이인. 가아아안…….
사이클롭스의 포효가 0.1배속을 한 것처럼 느리다.
느려진 세상 속,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을 밟으며 다시 한번 솟구쳤다.
파앙!
허공답보(虛空踏步). 발끝에서 압축된 공기는 폭발과 함께 나를 멀리, 그리고 높게 밀어냈고.
후우웅.
위기를 느낀 사이클롭스가 뒤늦게 휘두른 주먹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퍼엉!
무시무시한 파공성. 그러나 거인의 일권이 텅 빈 허공을 후려쳤을 때. 나는 이미 그곳을 지나 놈의 정수리 위로 솟구친 후였다.
고오옹.
강대한 열양지기를 머금은 창날 위로 푸른 불꽃이 번진다.
예리하면서도 파괴적인 힘.
유서 깊은 노빠꾸 문파. 열화문의 삼백 년 마초 정신이 집약된 열화신창(火龍神槍)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초식.
‘천격(天格).’
푸른 불꽃이, 거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슈화아아악,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