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6
#55화
‘환장하겠네.’
혁무진은 눈앞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중소 문파의 제자들로 위장하고 있던 암살자들. 그리고 대장로의 배신. 여기까지만 해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이 인간은 왜 쓰러진 거냐고!’
난데없이 진태경이 정신을 잃었다. 정찰조원들이 돌아가며 뺨도 때리고, 멱살을 짤짤 흔들어도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분명히 숨은 붙어 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결국 부조장인 자신이 이 엄청난 일의 책임자가 되어 버렸다.
“너, 그리고 너.”
아직도 혼란에 빠져 있는 정찰조원들 중 두 사람을 지목한 혁무진이 말했다.
“너희 둘은 지금 당장 본가로 복귀해서 이 사실을 알려라.”
대장로.
가문의 웃어른이자 옛 정마대전의 영웅인 그가 어떤 이유로, 무엇을 위해 이런 암계를 꾸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 했다.
“나머지는 모두 본대로 이동한다. 서둘러!”
혁무진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진태경을 등에 업었다.
그렇게 한 시진 가량을 달리자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눈앞이 노래졌다.
‘죽겠네.’
조필의 무지막지한 일장(一掌)에 내상을 입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다. 진태경에게는 거의 다 나았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보름은 꼼짝없이 요양해야 할 상태였다.
“헉, 허억.”
온몸이 흠뻑 젖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냥 따라가도 뒤처질 판인데 건장한 체구의 진태경까지 업고 있으니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다.
‘아, 어머니. 아버지.’
이제는 멀쩡히 살아 계신 부모님이 손짓하는 환영까지 보인다. 두 분 옆에 선 아주머니는 법당에서 자주 본 얼굴이다.
‘관음보살님?’
– 중생아. 고생했다. 이제 쉬어도 좋다.
자애로운 미소에 혁무진의 마음이 스르륵 풀어졌다.
그래,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지. 조장이라는 인간은 정작 중요할 때 픽 쓰러지고. 조원이라는 새끼들은 내가 죽든 말든 대신 업겠다는 소리도 안 하고.
‘시벌, 모르겠다.’
혁무진이 정신을 놓으려던 그때였다.
“후우, 하아아.”
귓구멍을 파고드는 따뜻한 숨결. 누구인지는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혁무진은 반가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조장!”
진태경이 씩 웃으며 속삭였다.
“네 귀에 캔디.”
* * *
챙! 채챙!
“죽여! 죽여!”
“크아악!”
곳곳에서 피와 비명이 터져 나온다. 피를 뒤집어쓴 무인이 시체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간다.
아직 앳된 얼굴이 고통과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흐윽, 흐으윽.”
참으려 해도 터져 나오는 울음. 십 년을 절치부심하며 무공을 익혔지만 피 튀기는 전장에서는 무소용이었다.
든든하던 선배가, 형제 같던 동기가 죽었다. 사방에서 쏟아진 병장기가 배를 가르고 사지를 난도질했다.
“어머니, 어머니…….”
하염없이 어머니를 부르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푹-!
어느새 가슴팍에 돋아난 창날. 순간 부릅떠진 눈동자에서 이내 빛이 사라진다. 산적처럼 수염이 난 낭인이 녹슨 창을 뽑아내며 씩 웃었다.
“애새끼가 어딜.”
하지만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낭인도, 다음 순간 날아드는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서걱-
은빛 선과 함께 낭인의 목이 솟구쳤다. 무인을 죽인 낭인, 낭인을 죽인 또 다른 무인.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사방에서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다.
전장(戰場)은 그런 곳이었다.
‘그래, 이런 곳이었지.’
대장로는 상념에 젖은 얼굴로 전장을 바라봤다.
팔천협(八天峽). 수십 년 전 정마대전의 한 줄을 장식했던 격전지. 저 비좁은 협곡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 갔던가.
‘그때는 나도 젊었지.’
육체는 강인했고 가슴은 뜨거웠다. 협(俠)이라는 낯간지러운 글자가 크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정마대전을 겪으며 대장로는 변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에 지쳤고 죽음이 두려워졌다.
‘협의지사가 무슨 소용인가. 죽으면 귀신에 불과한 것을.’
그건 한 줄기 깨달음이었다. 마침내 그는 살아남아 영웅이 되었고, 기나긴 인고의 시간 끝에 이 자리에 섰다.
이제 결실을 맺어야 할 때. 대장로는 노회한 눈으로 옆에 선 한 사람을 응시했다.
‘아깝구나. 아까워.’
진위경은 뛰어난 인재다. 젊고, 무공도 상당하며 무엇보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위엄과 판단력을 지녔다. 간혹 정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 덕인지 가문 내에서 인망도 두터웠다.
‘능히 본가를 일으킬 수 있는 재목이다.’
만약 진위경이 태원진가의 가주가 된다면. 그리고 각기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두 아우가 뒤를 든든히 받쳐 준다면…….
대장로는 문득 자신의 생각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란 말인가. 심지어 진태경은 이미 죽어 고혼이 되었을 텐데.
“나도 늙었군.”
작은 중얼거림에 진위경이 반응했다.
“뭐라 하셨습니까?”
“별것 아니오. 원래 늙으면 혼잣말이 늘거든. 그보다 소가주가 보기에는 어떻소?”
“전황은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만…….”
진위경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병력의 질과 지형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는 하나 피해는 꾸준히 누적되고 있었다.
가솔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소가주. 그 마음은 알지만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대장로는 엄중한 어조로 충고했다.
“우두머리는 나설 때를 알아야 하는 법, 전투가 길어질수록 조급해지는 것은 놈들이니 그때를 노려야 하오.”
“곧 항산검문에서도 총력으로 부딪쳐 오겠군요.”
“절정 고수들을 앞세우겠지. 문주인 이천백이 직접 올 수도 있고.”
“그때 모든 게 결정 나겠군요.”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가주와 나, 위팽이 적들의 수뇌부를 막고 절벽 위에서 화살비가 쏟아지면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질 거요.”
“화공을 못 쓰는 것이 아쉽습니다. 하늘이 원망스럽군요.”
팔천협의 좁은 지형은 화공에 안성맞춤이지만 며칠 전 내린 폭설로 인해 사방이 눈 더미였다.
그러나 하늘이 그의 편을 들어 주었다 해도 진위경이 기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절벽 위에서 활시위를 당길 이들은 대장로의 명령을 따를 테니까.
“나도 하늘이 원망스럽소.”
대장로의 말은 진심이었다.
기다린 세월이 너무 길었다. 이제야 찾아온 천명이 원망스러웠다.
* * *
“네 귀에 캔디.”
“조장!”
“꿈처럼 달콤했니.”
“……미쳤어요?”
못생긴 혁무진의 얼굴을 보자 반가움이 솟구쳤다. 내가 깨어났다는 말에 몰려든 다른 정찰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장님 깨어나셨다!”
“무슨 일입니까? 몸은 괜찮으세요?”
“죽은 거 아니었어?”
방금 말한 새끼는 나중에 손봐 줘야겠다. 나는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둔 다음 모두에게 씩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네. 잘들 있었냐?”
“예?”
“그게 무슨 말이래?”
“혹시 머리 다치신 거 아냐?”
“머리, 머리를 보자!”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한 번쯤 하고 싶었던 인사이기도 했다.
……미친놈 취급 받았지만.
“뭐 인사는 여기까지 하고. 나 기절한 지 얼마나 됐어?”
혁무진이 털썩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반 시진은 확실히 넘었고, 한 시진은 좀 안 됐을 겁니다.”
현실에서 2주를 보냈으니 얼추 시간이 맞아떨어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나 숨은 쉬었냐?”
“갑자기 왜 그래요, 진짜?”
“시간 없다. 빨리 대답해.”
“숨 쉬고 있었으니까 일어나신 거죠. 아니면 죽었게요?”
그것도 그러네.
로그인, 혹은 로그아웃 시 다른 한쪽은 가사 상태에 빠지는 모양이다.
‘암살자들 처리하기 전에 로그아웃했으면 돌아올 몸도 없었겠군.’
이 부분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당장 급한 문제는 따로 있다.
“본대는?”
“안 그래도 그쪽으로 이동 중이었습니다. 두 명은 따로 빼서 가문으로 돌려보냈고요.”
“잘했어. 거리는 얼마나 남았지?”
“적어도 한 시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한 시진이라.”
“저, 조장.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혁무진은 물론이고 정찰조원들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최악의 경우가 뭘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도 생각해 봤고.’
곽준이 죽기 직전 했던 말에 따르면 이번 배신은 오래전부터 철두철미하게 계획된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엔 딱 한 가지 오류가 있다.
‘바로 나.’
대장로는 나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아니, 한편으로는 과대평가일지도 모르겠다. 자그마치 일류 고수 수십 명을 붙여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나는 살아남았다.
‘실수한 거지.’
거기에 더해, 곽준은 처음 본색을 드러내며 그런 말도 했다. 슬슬 움직여야 시간에 맞출 수 있다고.
그러니까…….
“아직 안 늦었어.”
조원들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맞추며 단호하게 말했다.
“최악의 경우는 생각하지 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그 결과를 바꿀 테니까.”
“조장…….”
“그러니까 무진아.”
나는 울컥한 표정의 혁무진에게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당장 일어나.”
“힘들어 죽겠습니다.”
“맞아 죽고 싶냐?”
“…….”
“이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뛰렴. 마라톤 정신 몰라?”
“모르는데요.”
아. 여기 무림이지.
“아무튼 빨리 일어나. 반 시진만 더 가면 된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던 혁무진이 고개를 갸웃한다.
“반 시진이요?”
“응, 반 시진.”
“말씀드렸잖아요. 최대한 빨리 가도 한 시진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반 시진.”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무진아.”
“예?”
소처럼 순박하게 눈을 끔뻑이는 혁무진에게, 나는 더더욱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근성이라는 말, 들어 봤냐?”
한 시진이든 두 시진이든 상관없다.
무조건 반 시진 안에 간다.
“존나 뛰어. 그럼 돼.”
“헉.”
정찰조 전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 *
“가로막혔습니다.”
“피해가 상당합니다. 문주님, 부디 조치를.”
이어지는 보고에도 항산검문주, 혈랑검 이천백의 눈은 뜨이지 않았다.
‘성급했다.’
급박하게 시작된 전쟁, 그만큼 준비도 미흡했다. 군량이 빠르게 소진되고 사기가 떨어지자 탈영하는 자도 속출했다.
‘놈들에게 전부 읽혔어.’
아들을 잃은 분노와 상황에 대한 조급함에 판단력이 흐려졌다. 수하들의 조언도 무시하고 가장 빠른 길을 찾았다.
그래서 결국 팔천협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좁은 협곡에서 태원진가 놈들과 맞닥트렸다.
“문주!”
수하의 외침에 이천백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절정 고수의 가공할 안력(眼力)이 전장을 꿰뚫었다.
“끄아아악!”
“쓸어 버려라! 오합지졸들일 뿐이다!”
일천이 훌쩍 넘어가는 아군은 좁은 입구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선두에 세운 낭인들과 마적들은 머릿수만 많았지, 개개인의 기량은 태원진가의 평무사보다도 떨어졌다.
‘고작해야 칼받이 정도인가.’
내심 혀를 차던 그때, 수십여 명의 낭인들이 갑자기 전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중 선두에 선 중년 낭인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대로는 개죽음이다! 혈우단(血雨團)의 형제들은 모두 후퇴하라!”
그것이 중년 낭인의 유언이 되었다.
사아악-
가벼운 바람. 낭인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어느샌가 혈랑검 이천백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는 사실도, 수하 낭인들이 모두 공포에 질려 발걸음을 멈췄다는 사실도 몰랐다.
다만 문득, 목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어…….”
깨끗하게 잘려 나간 목이 툭 떨어진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몇 걸음을 비틀거리더니 썩은 고목처럼 무너졌다.
“혈우단이라고 했나?”
이천백이 굳어 버린 낭인들에게 검을 겨눴다. 그의 검신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돌아가.”
절정 고수의 살기가 칼날처럼 쏘아졌다. 낭인들은 왔던 것보다 더 빠르게 선두를 향해 돌격했다.
눈앞의 절정 고수에게 덤비느니 선두에서 싸우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들.”
이천백이 그 뒤를 쫓았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은 태원진가의 수뇌부가 있을 저 어디를 향하고 있었다.
“문주께서 앞장서신다!”
“모두 돌격! 태원진가를 쓸어 버려라!”
이천백이 나서자 항산검문의 핵심 전력도 그 뒤를 따랐다.
세 명의 절정 고수와 수십 명의 일류 고수들이 선두를 향해 짓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