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78
#577화
딱딱하게 굳은 얼굴. 송천우를 응시하던 최민우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믿지 못하겠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송천우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지.”
“……!”
최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송천우를 결코 신뢰하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 마주한 눈앞의 노인에게서는 일말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정말로?’
순간 최민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느새 맺힌 식은땀 한 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굴러떨어진다.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간신히 끄집어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저는 그 누구에게도 그런 사실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외할아버님의 측근이셨던 김 집사님께서도…….”
최민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 송천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해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이다.”
“그렇다는 건…….”
“미안하구나.”
안 한 것과 못 한 것.
고작 한 글자 차이지만 그 차이는 크다. 말에 담긴 뜻을 깨달은 최민우가 송천우를 노려보았다.
“김 집사님께도 감췄던 겁니까. 그토록 중요한 사실을.”
칠순의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쩍 늙은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화종이. 저 친구는 언제나 충성스러웠다. 그리고 그 마음은 종전(終戰) 이후 태어난 한 생명에게 고스란히 이어졌지. 어린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겨진 어린아이 말이다.”
“……!”
“모든 것이 달라진 그 날에도, 그분의 가장 충실한 심복은 네 곁에 있었다.”
최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떨어진 눈밭에서 이곳을 직시하고 있는 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온다.
맹렬하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송천우의 목소리가 파묻히지 않았다면, 나는 듯이 달려와 배신자를 죽이려 들었을 충복이었다.
“이거였습니까? 단둘이 걷자고 한 이유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듣고 있었다면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을 테니까.”
“만약 그때 김 집사님께서 외할아버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면, 당신들은 이미…….”
언제나 침착하고 냉철하던 태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시퍼런 불길이 일렁이는 최민우의 눈빛에, 송천우는 감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그저 당황스러웠다. 그분이 금방 의식을 회복하시리라 생각하고 우선 극비에 부쳤지.”
사박.
힘없는 발걸음과 함께,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한 달. 반년. 그리고 일 년이 지나자, 문득 묘한 생각이 들더군. 어쩌면…… 그분께서는 영영 깨어나시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송천우와 이정룡.
처음만 해도 설마 했던 두 사람의 마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확신으로 굳혀졌고, 그 생각은 또 다른 감정으로 변화했다.
“다시 일 년이 흐르자, 우리는 서로가 가진 탐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감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던 절대자, 천태민이 남긴 빈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는 탐욕. 아레스 길드라는 거대한 성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욕심.
“숙청은 어느 날 은밀하게 시작되었다. 이미 아레스 길드와 멀어진 김화종과는 달리, 그분의 상태를 알고 있던 최측근들 몇이 게이트에서 죽음을 맞이했지.”
최민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진실을 묻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죽음이다.
이정룡과 송천우 역시 같은 길을 택했다. 아직 살아 있는 왕의 제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으득.
거스러미 하나 없이 매끈한 입술이 터지고, 붉은 선혈이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분노가 담긴 최민우의 발걸음이 새하얀 눈 위에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을 밟았다.
“그 와중에 지사장님은 용케 살아남으셨군요. 참으로 질긴 목숨입니다.”
최민우의 신랄한 어조에 송천우가 무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정룡의 입장에서도 날 제거하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아레스 길드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과정에서 사이좋게 오물을 나눠 묻힌 사이라 발설할 가능성도 적었다고 판단했겠지. 사실이기도 했고.”
진실을 아는 것은 죽을 이유가 되지만, 함께 진흙탕을 뒹굴었다면 살아남을 이유가 된다.
그리고 최민우의 눈에 비친 송천우는 마지막까지 이정룡에게 맞서 싸울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 협상의 대가가 유럽 총괄 지사장 자리였습니까?”
“그래. 덕분에 나와 가족들의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최민우는 크게 심호흡했다. 이제야 좀처럼 풀리지 않던 머릿속의 퍼즐이 완벽하게 짜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냉정하고 철저하던 이정룡이 왜 굳이 송천우를 살려 두었는지.
그리고 하나뿐인 혈육이자 세계의 상징이 되어 버린 외할아버지가 왜 이십 년이 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 쿠워어어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예티의 포효가 최민우의 심정을 대신하는 듯했다.
‘빌어먹을.’
까득.
온 힘을 다해 말아쥔 주먹에서 뼈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다. 왜 그랬느냐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짓을 벌였느냐고.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고, 멱살을 붙잡고, 허리춤에 매어 둔 검을 빼내어 앞서가는 저 노인의 등을 찌르고 싶었다.
하지만…….
스륵, 툭.
검파(劍把)를 향해 움직이던 손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송천우의 죗값을 받아 내는 것은 적어도 모든 사실을 확인한 후여야 했다.
세차게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힌 최민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외할아버님께서 쓰러지신 이유가 뭡니까?”
사박. 눈을 밟는 소리와 함께 앞서가던 송천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텅 빈 허공만이 펼쳐져 있었다.
크레바스(Crevasse). 설산과 빙하지대에서 나타난다는 균열은 거대했고, 도무지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내부는 심연처럼 어두웠다.
“이유. 이유라…….”
발 앞에 펼쳐진 어둠을 바라보던 송천우가 낮게 뇌까렸다.
“모른다.”
“확실히 하십시오.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고 싶은 것인지.”
“나나 이정룡이 무슨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다른 누구도 아닌 그분께?”
“그건…….”
최민우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외조부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천태민. 인류가 낳은 불멸의 영웅. 지구에 강림한 수많은 몬스터와 그들의 군주, 마왕 아스모데우스를 쓰러트린 최초이자 최후의 헌터.
살아남은 인류는 자신들을 구한 영웅에게 슬레이어(Slayer)라는 이명을 붙여 주었고, 그것은 헌터들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자에게 바치는 경의이기도 했다.
“나는 그분을 존경했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건 이정룡도 마찬가지였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몇 년 동안이나 그분이 깨어나시길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맞다.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천태민이 쓰러진 후에도 송천우와 이정룡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그들이 탐욕을 드러내기까지는 2년이라는 시간과 천태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수많은 실험. 그리고 약간의 불안감이 섞인 확신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등 뒤로 들려오는 혼란스러운 목소리에, 송천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이유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겠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분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시다는 것.”
이 다음으로 묻고자 했던 질문의 답이 송천우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은 최민우가 물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뭡니까.”
“그분께서 돌아가셨다면, 이정룡이 굳이 지금까지 나를 살려 둘 리 없을 테니까.”
“……!”
“다만 그분을 어디에 모셔 두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A구역이 의심될 뿐이지.”
“A구역…….”
낮게 뇌까린 최민우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크레바스 앞에 선 채 거대한 균열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는 송천우의 등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뭐든지 물어보거라.”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최민우가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유?”
“그렇습니다. 하필이면 지금 모든 것을 털어놓는 이유. 지금은 협력 관계지만, 곧 머지않은 미래에 또 다른 경쟁자가 될 제게 이런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준 이유가.”
적의 적은 동지. 최민우와 송천우는 그런 관계였다.
석고준을 끌어내리기 위해, 아레스 길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에 최민우는 더더욱 송천우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변했어.’
마지막으로 비밀리에 만남을 가진 것이 고작해야 일주일 전이다.
그때만 해도 송천우의 태도는 조심스러웠고, 말과 행동에서는 희미한 경계가 묻어 나왔었다.
한때나마 이정룡과 정적(政敵) 관계에 놓였던 사람답게, 이 일시적인 동맹이 성공적으로 목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깨진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천태민의 신변에 관한 정보는 극비 중의 극비요, 훗날의 대립을 생각한다면 최민우를 물러나게 할 수도 있는 중요한 무기다.
단순히 한순간의 감정에 사로잡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스륵.
최민우의 손끝이 검자루에 닿은 그때. 묵묵히 까마득한 허공을 내려다보던 송천우의 신형이 천천히 돌아섰다.
“이유라.”
노인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침착했다.
처음 게이트 앞에서 만날 때만 해도 머뭇거리고 잘게나마 떨렸던 음성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최민우가 그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향했다고 느낀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속죄(贖罪)라고 해 두는 것이 좋겠구나.”
최민우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물었다.
“무엇에 대한 속죄입니까.”
“늦었지만 언젠가 말하고 싶었다. 그분과, 그리고 네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이십 년도 더 늦었군요.”
“그래, 늦었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변명입니다.”
최민우가 단호하게 대답한 그 순간이었다.
구구구구궁!
온통 새하얀 눈에 파묻힌 설산(雪山)이 몸을 떨었다. 수십 미터의 폭을 지닌 크레바스 너머에서 눈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거칠게 굽이치는 눈의 파도 위에, 털로 뒤덮인 거인들이 있었다.
– 쿠워어어어어!
– 카우우!
흉포한 포효가 설산을 떨어 울렸다.
언뜻 보기에도 수백 마리에 달하는 예티의 돌진에, 최민우가 문득 중얼거렸다.
“희한한 일이군요.”
“뭐가 말이냐?”
“예티는 보통 십여 마리 전후로 모여 무리 생활을 합니다.”
“그래, 그랬었지.”
사박. 스르릉.
크레바스를 등진 송천우의 걸음이 앞으로 나아갔고, 최민우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검이 뽑혀져 나왔다.
죽어서도 본분을 다했던, 어느 영웅이 남긴 검이었다.
“좋은 검이구나.”
낮게 뇌까린 송천우가 다시 한 번 걸음을 내디뎠다.
최민우의 어깨너머에서는 이미 한 사람이 쏘아지고 있었다.
“도련님!”
늙은 충복의 외침을 들으며, 송천우가 중얼거렸다.
“이해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눈보라가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