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85
#584화
구구구구궁!
불기둥이 솟구쳤다. 산이 흔들렸다. 반경 수백 미터에 달하는 공간이 초고온의 열기로 들끓고 눈과 흙, 바위가 녹아 내린다.
용암이 흘러넘치는 죽음의 땅. 모든 것이 증발해 버린 그 위에 첱탑처럼 우뚝 선 두 존재가 있었다.
– 인. 간. 따. 위. 가. 감. 히!
검게 그을린 채 분노하는 신화 속 마수를, 반백의 노집사는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헬 파이어(Hell Fire).
지옥에서 불러온 겁화조차 베히모스를 쓰러트리지 못했다. 거대한 엄니 하나가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고, 전신이 검게 그을렸지만, 놈은 여전히 건재했다.
하지만…….
“더럽게 단단한 놈이로구나.”
김화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매직 스태프(Magic Staff)를 힘주어 붙잡았다.
화륵.
짧고 가느다란 형태의 스태프가 불길에 휩싸였다. 화염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더욱 굵고, 길어진 스태프가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혼란했던 대격변의 시기. 수많은 몬스터를 잿더미로 만들며 주인에게 겁화(劫火)의 마법사라는 이명을 붙여 주었던 애병이다.
김화종은 붉은빛이 감도는 스태프를 베히모스에게 겨누며 뇌까렸다.
“멈추어라. 네놈은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 노. 옴!
베히모스가 울부짖었다. 동시에 자욱하게 내려앉은 검은 안개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여 김화종을 향해 쏘아졌다.
쉬이이익!
그것은 전신을 옭아맬 밧줄인 동시에, 피륙을 찢고 부술 칼날이었다.
그러나 김화종은 사방을 에워싸고 들이닥치는 안개를 침착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피 묻은 손에 들린 스태프가 지면을 찍었다.
쿠궁!
깊은 울림과 함께 파동이 퍼져 나갔다. 김화종을 중심으로 피어오른 불꽃이 하나의 고리가 되어 주위를 에워쌌다.
화륵, 콰아아아!
불은 파괴의 상징이기 이전에, 정화(淨化)의 힘.
그를 향해 쏘아지던 검은 안개가 불길에 닿은 순간 잿더미처럼 사그라들었다.
지상을 굽어보는 마수의 거대한 눈동자에 우뚝 선 인간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 이. 게. 무. 슨?
그것은 베히모스에게도 뜻밖의 상황이었다.
상대는 한낱 인간. 그러나 저 자그마하고 하찮은 존재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것으로도 모자라, 공격을 무효화시켜 버렸다.
– 너. 인. 간. 이. 여!
강력한 피어(Fear)가 담긴 포효가 온 사방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불길이 일렁이는 눈빛과 달리 김화종의 마음은 지극히 평온했다.
눈앞의 마수는 한 가지를 오판했다.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는 두려움이, 지금 마주한 늙은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입니다. 도련님.’
닿지 않을 중얼거림과 함께 김화종은 빙긋 웃었다. 그의 유일한 두려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재앙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 아이, 최민우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설령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마수의 발에 짓밟혀 으스러져도, 엄니에 꿰인 채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절명해도, 마나와 육신을 한계까지 쥐어 짜낸 끝에 잿더미처럼 스러진다 하여도 괜찮다.
‘도련님께서 무사하시다면,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렇기에 김화종은 기쁜 마음으로 스태프를 쥐었다.
불그스름한 빛이 감도는 애병의 끄트머리로, 이미 한계를 벗어난 막대한 마나가 밀려들었다. 열기를 띤 마나가 화염이 되어 터져 나왔다.
“휩쓸어라.”
파이어 웨이브(Fire Wave).
짧은 영창과 함께 불의 파도가 넘실거리며 뻗어 나갔다.
그 끝에 선 존재, 베히모스가 노한 외침과 함께 코끼리의 그것처럼 길고, 그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코를 휘둘렀다.
화아악!
강맹한 파공성과 함께 일어난 바람이 불의 파도를 덮쳤다. 초고온의 열기가 단번에 사그라들고,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이 날아들어 사방을 할퀴었다.
쉬쉬쉬쉭! 서걱!
종잇장처럼 갈라지고 찢겨 나간 지면. 그러나 김화종은 이미 아슬아슬하게 그 자리를 벗어난 후였다.
베히모스의 측면을 향해 쇄도하는 노집사의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쏘아져라.”
블레이즈(Blaze).
퍼엉!
그가 내디딘 발끝을 따라 화염이 터져 나왔다.
순간적인 폭발과 함께 한 줄기 불꽃이 되어 쏘아지던 김화종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후우웅!
“……!”
이성보다 본능이 반 박자 빨랐다. 파이어 실드. 소리 없는 무영창 주문과 함께 김화종의 머리 위로 불의 방패가 겹겹이 덧씌워졌다.
그리고 찰나라고 부를 만큼 짧은 시간, 이십여 개로 중첩된 불의 방패 위를 엄청난 압력이 짓눌렀다.
콰드드드득!
모든 것이 부서지고, 흩어진다.
압도적인 힘과 무게. 거기에 더하여 도무지 끝을 짐작할 수 없는 강대한 마력(魔力)은 중첩된 불의 방패를 깨트리고 시전자의 마나를 뒤흔들었다.
푸우웃!
김화종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마법이 흩어진 여파로 인하여 순간 아득해지는 시야. 하지만 그는 제 자리에서 허물어지는 대신, 이를 악문 채 넘어지듯 신형을 날렸다.
콰직! 푸푹!
방어 마법이 벌어 준 찰나의 시간.
아슬아슬한 차이로 스쳐 지나간 베히모스의 코가 지면을 부수었다. 동시에 사방으로 튄 수백 개의 파편이 김화종의 종아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불에 덴 듯한 고통. 그러나 노집사는 고통에 찬 신음 대신,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고.”
순간, 그의 손에 쥔 스태프가 초고온의 열기를 내뿜었다. 허공으로부터 생성된 화염의 구(球)가 크기를 부풀렸다.
김화종이 울컥, 핏물을 토해 내며 뇌까렸다.
“터트려라. 불의 포화여.”
플레임 캐논(Flame Cannon).
완성된 주문과 함께 눈부신 광염(光焰)이 터져 나왔다.
그 어떤 대포보다 빠르고 강대한 힘이 실린 최상위의 화염 마법이 향하는 곳에는, 앞서 최민우에 의해 반쯤 잘려 나갔던 마수의 두 앞발이 있었다.
– 놈……!
화악, 퍼어어어엉!
다음 순간. 사방을 떨어 울리는 굉음에 베히모스의 외침이 파묻혔다.
공간을 지우며 날아간 화염은 미처 아물지 않은 상흔(傷痕)을 터트리고 내부를 휩쓸었다.
치지직. 숯처럼 검게 타들어 간 앞발로부터 전해지는 끔찍한 통증에, 베히모스가 고통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 그아아아아아아!
쿠우우웅!
마침내 굽혀졌다. 두 개의 앞발이.
심연을 거슬러 현세에 강림한 신화 속 마수는 신전이 무너지는 것처럼 두 앞발을 꿇었다.
엄청난 무게가 땅을 뒤흔들고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베히모스를 무릎 꿇린 한 인간은 피를 토해 내며 웃고 있었다.
“으하! 으하하하!”
그것은 한때 최고의 화염 마법사라 불렸던 헌터의 웃음이었고, 자신의 책무를 다한 집사의 후련함이었다.
‘이것으로 됐다. 이것으로.’
네 개의 다리 중 절반을 불능으로 만들었다.
이제 날개를 만들어 달지 않는 이상, 베히모스는 최민우를 쫓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로 인해 살아남을 생명도 적지 않을 터였다.
김화종은 미소 지은 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짙은 그림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아쉽…….’
뻐억! 쐐애애액!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김화종은 전신을 덮치는 엄청난 충격과 통증을 느끼며 포탄처럼 쏘아졌다.
꽈앙!
굉음과 함께 단단한 암석에 틀어박힌 등이 부서지고, 막을 수 없는 무언가가 내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쿠에에에엑!”
노집사는 꺼질 듯한 눈빛으로 자신이 토해 낸 핏물을 내려다보았다. 검붉은 피 웅덩이에 작은 내장 조각이 섞여 있었다.
고막이 터져 나갔는지 귀가 먹먹했고, 흐릿한 시야 속에서는 오래전. 어느 날의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화염 마법의 위력이 대단하던데. 혹시 전직이 방화범이었나?’
‘……이건 또 뭔 미친 소리야. 도와줄 거 아니면 꺼지쇼.’
‘다행히 안 꺼져도 되겠군. 자네와 여기 있는 사람들을 도와줄 거거든.’
‘흠. 그렇다면 약간 얘기가 달라지지. 이름이?’
‘천태민.’
처음 만났을 때는 알지 못했다. 나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젊어 보이는 그가, 평생토록 충성을 바칠 우상이 될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일 년, 이 년, 오 년……. 길고도 끔찍했던 대전쟁이 끝났을 때. 김화종은 천태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전 이제 뭘 해야 합니까?’
다른 이들에게도 그랬지만, 대격변은 김화종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사건이었다.
그 시절, 그토록 기다렸음에도 마침내 찾아온 평화에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우상은 담담하게 되물었다.
‘뭘 하고 싶은데?’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키시는 것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럼 길드에 들어와라. 네가 필요해. 정룡이와 천우도 받아들였다.’
‘그, 평화 길드인가 하는 그거요?’
‘그래.’
‘이름이 너무 구린 것 같은데요. 차라리 아레스 어떠세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 아레스.’
‘아레스라, 나쁘지 않네. 그럼 네 말대로 할 테니까 길드에 들어와. 노후 걱정은 안 하게 해 주마.’
‘……제가 사무직은 영 적성에 안 맞는데.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지난 오 년 동안 형님으로 부르라고 오천 번쯤은 말한 것 같은데. 넌 도무지 변하지 않는구나.’
그때 했던 말처럼, 김화종은 변하지 않았다.
신뢰하는 전우이자 절친했던 두 의형(義兄)과의 관계가 희미해지고, 천태민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평화가 찾아와도 불같은 성격은 여전했고 입에는 늘 욕을 달고 살았다.
그가 변하기로 결심한 것은, 모두의 축복 속에 탄생한 한 아이가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은 직후였다.
‘안녕.’
‘……안녕하세요.’
몇 사람만 모인 장례식장에서, 이제 고작 네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사내아이는 외로워 보였다.
이제 유일한 가족이 된 외할아버지의 다리를 붙잡고 어두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던 그 모습이, 조금씩 늙어 가던 김화종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며칠 뒤 찾아온 천태민의 제안을 선뜻 수락한 것은.
‘민우를. 그 아이를 맡아 줄 수 있겠나?’
인류의 상징이 되어 버린 불멸의 영웅은 늘 바빴다.
김화종은 대격변이 끝난 직후에도 마치 뭔가에 쫓기는 듯 살아가는 그를 대신하여, 홀로 남겨진 한 아이의 가족이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머리와 복장은 단정하게. 목소리는 부드럽게. 입가에는 미소를.
대격변의 한 페이지를 불태웠던 겁화(劫火)의 마법사는 그렇게 김 집사가 되었다.
‘도련님. 뛰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 다치시면, 어이쿠.’
‘도련님. 편식은 몸에 안 좋습니다. 어서 드세요.’
‘도련님. 울지 마십시오.’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
시간은 강물처럼 흘렀다.
아이는 자라 청년이 되었고, 김화종의 머리에는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천태민이 종적을 감춘 이후에도 김화종은 변함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의 도련님은 더이상 성급하게 뛰지도 않았고,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었으며, 일찍 떠난 부모를 생각하며 울지도 않았다.
그리고 장성한 청년의 얼굴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한 어느 날이었다.
‘길드를 만드신다고 하셨습니까.’
‘예. 죄송하지만 김 집사님께서 길드장을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런데 길드 이름은 무엇으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평화 길드. 평화 길드로 하겠습니다.’
‘……!’
‘김 집사님 표정이 왜…… 그렇게 별로인가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순간 떠오르는 많은 생각에 망설이던 노집사는, 이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더랬다.
‘아닙니다. 평화 길드. 참 멋있는 이름이군요.’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만났다.
김화종은 평화 길드가 설립된 이후 하루하루를 기쁨과 추억에 젖은 채 마주했다.
차갑고 딱딱한 가면을 쓰고 있던 도련님은 난생처음으로 ‘동료’를 만나 부드러워졌고, 평화 길드는 나날이 성장을 거듭했다.
좋은 일만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쭉. 영원히.
성장해 가는 도련님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분명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는데.’
쿨럭. 김화종은 내장 조각이 섞인 핏물을 토해 내며 웃었다.
죽어 가면서도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오늘 들었던 한 마디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제 유일한 가족이 되어 주셔서.’
그리고 또, 도련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더라.
‘항상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 그러셨었지.
김화종은 기침을 토해 내며 고개를 들었다. 꺼질 듯한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검은 안개가 자욱했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안개 너머 어딘가에,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두려움이 살아남아 이곳을 떠나고 있을 것이다.
“뵙고…… 싶은데.”
피에 젖은 입술 사이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음을 앞둔 노집사의 모습에 신화 속 마수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가리를 벌린다.
화아아아악.
거대한 돌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미처 꺼지지 않은 불길도, 땅에 널브러진 누군가의 사지와 핏물. 암석도 함께.
토네이도처럼 빨려 들어간 모든 것들이 베히모스의 입 안에서 회오리쳤다.
“도련……님.”
아니. 아니다. 비록 닿지는 않겠지만, 이건 그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였다.
주름진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민우야.”
꺼질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바로 그 순간.
쐐애애애액, 번쩍!
허공으로부터 터져 나온 섬광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