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98
#597화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에는 숱한 죽음과 비명이 내리깔려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어느 때보다 지금처럼 조용하고 숨 막히는 슬픔을 느낀 적은 없었다.
툭. 투두둑.
고요함 너머로 세찬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해야 할 이야기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났지만, 단둘만이 있는 방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고개를 돌린 채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최 팀장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일곱 살 때였을 겁니다. 김 집사님께서 제게 오신 것이.”
기억마저 흐릿한 어린 시절. 그로부터 자그마치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갑작스럽게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는 청년이 되었고, 집사의 머리에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이제는 부모님의 목소리마저 흐릿한데, 그분과의 기억은 모든 것이 선명합니다.”
부모가 죽고, 하나뿐인 외조부조차 모습을 감췄을 때, 그의 곁에는 언제나 김 집사가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가 받아 온 그 헌신의 크기와 무게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그런데…….”
흐릿해지는 말꼬리와 함께 최 팀장이 고개를 돌린다.
오랫동안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아서일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어느새 빗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제는 돌려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툭. 투둑.
그를 알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먹먹하게 가라앉은 음성과 함께, 볼을 타고 굴러떨어진 눈물이 새하얀 이불 위로 떨어진다.
아니, 이건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진태경 씨.”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김 집사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최 팀장이다. 앞서 내가 느꼈던 슬픔은, 지금 그가 품고 있을 감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족이 죽었으니까.’
최 팀장에게 있어 김화종은…… 집사가 아니라 가족이었다. 홀로 남겨진 아이의 곁에 남아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가족.
그러니 왜 그를 살리지 못했냐며 나를 원망해도 좋고, 멱살을 잡고 욕을 퍼부어도 괜찮다.
지금은 그래도 된다. 차오르는 것을 말없이 눌러 담는 것보다 넘치는 만큼 쏟아내는 것이 좋다.
나는 최 팀장이 목 끝까지 차오른 감정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최 팀장의 한 마디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감사합니다.”
“……!”
“그분의 마지막을 지켜 주셔서, 제가 하지 못한 일을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문득 말문이 막혔다. 뭐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속에서 차오른 무엇인가가 목에 자물쇠를 채운 기분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최 팀장을 바라보다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최 팀장님.”
말을 잇기도 전에 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고, 알면서도 속아 줄 수밖에 없는 거짓말이었다.
달싹이려던 입술을 굳게 닫은 내게 최 팀장이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못 볼 꼴을 보여 드린 것 같아 민망하군요. 잠시 혼자 시간을 가져도 괜찮겠습니까?”
지금의 그에게 무슨 말을 더 해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최 팀장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혈육이나 다름없던 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 그리고 그의 시신을 마주할 용기를 얻는 시간이.
“그럼 푹 쉬고 계세요. 대기 중인 인원들이 있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호출하시고.”
애써 밝게 대답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고리에 손을 얹는 순간, 그에게 해 주고 싶은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최 팀장님.”
“네?”
“가끔은 흔들려도 괜찮습니다. 소리 내서 울어도 아무도 듣지 못할 겁니다. 그분을 제외하고는.”
“……!”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미 돌아서 있던 탓에 내 말을 들은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다행이었다.
달칵.
방을 나와 문을 닫은 그 순간, 그 틈새 너머로 미약한 흐느낌이 들려왔으니까.
그건 내가 지금껏 들은 것 중 가장 조용하고 슬픈 흐느낌이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한 사람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태경아, 최 팀장 상태는 어떻…….”
한 사람의 흐느낌은 나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방에서 빠져나온 내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던 임꺽정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와 함께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아. 피곤해. 커피나 한잔 마셔야겠다.”
기지개를 쭉 켠 송송이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고, 나와 눈이 마주친 스켈레톤 킹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 몸도 그, 뭐냐. 커피나 마시러 가야겠다. 요새 통 잠을 못 잤더니 쓰러질 것 같아서…….”
“어? 어어. 나도.”
임꺽정은 그렇다 치고. 언데드 몬스터가 졸려서 커피를 마신다니, 그 말도 안 되는 핑계에 실소를 흘린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내 것도 한 잔 타 와.”
“빌어먹을 인간 같으니. 네놈은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대신 창이 있지.”
내 대답에 잠시 침묵하던 스켈레톤 킹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블랙?”
“믹스.”
“커피 맛도 모르는 놈. 특별히 이번 한 번만 타다 준다. 이번 한 번만.”
욕설을 구시렁거리는 녀석의 뒤를 따라 임꺽정마저 복도를 떠났을 때. 멀리서부터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벅. 저벅.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세 명의 사내였다.
긴 호흡과 절제된 걸음걸이에서 그들이 잘 훈련받은 절정 고수, 아니 A급 헌터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저택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평범한 헌터가 아니었고, 길드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태경 헌터님.”
나는 대답 대신 그들을, 아니 그들이 착용한 넥타이핀을 바라보았다.
흑색과 금색이 섞인 배지에는 무궁화와 함께 깨알 같은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다.
[대통령 경호실]이들이 누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지는 분명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내가 입을 열었다.
“백한성 대통령님께서 절 찾으시나 보죠?”
선두에 선 경호원이 군인처럼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각하께서는 30분 전 떠나셨습니다. 정무에 바빠 말없이 떠나야 했던 점,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달라 하셨습니다.”
방 안에서의 시간이 길어지자 이미 떠난 모양이다. 충분히 그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유감 따위는 없었다.
“양해는 무슨.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저 때문에 열 배는 바빠지셨을 텐데.”
“…….”
“……스무 배?”
“크흠.”
“커흐흠.”
차마 말은 못 하고 헛기침만 연발하는 경호원들을 보아하니 오지게 바빠진 건 확실히 알겠다.
아직 바깥 상황을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틀 전의 사건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뒤집혔을 것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하루 동안 연달아 터진 몬스터 웨이브도 사상 초유의 사태지만, 그것이 인위적으로 발생한 현상이며 아레스 길드의 부길드장이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이라는 건 핵폭탄 이상의 파괴력을 지녔다.
이번 사건의 여파가 얼마나 크고 거대할지, 상황을 잘 모르는 나로서도 쉽게 짐작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그 말씀을 전해 주려고 지금까지 남아 계셨던 겁니까?”
“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럼…….”
말꼬리를 흐리는 내게, 세 사람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대통령 각하의 지시로 진태경 헌터님, 그리고 가족분들의 임시 경호를 맡게 되었습니다. 비록 표면상으로는 감시 역이라 알려졌지만, 편히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시 역?”
“이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만입니다. 아직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고, 현 상황으로서는 진태경 헌터님께서도 불구속 입건 상태라 말입니다.”
불구속 입건이라. 감시 역과 마찬가지로 썩 좋은 어감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고위 정치인들, 재벌 회장님들이 사고만 쳤다 하면 저 타이틀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익숙하기는 했다.
‘그나마 불구속 입건이라 다행인 건가.’
불구속 입건은 피의자 혹은 피고인에게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사법 기관에서 사건접수가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혐의가 뭡니까?”
“다른 부분은 정상 참작이 가능한 범위이긴 한데…… 아무래도 현재로서는 상해에 관련된 부분이 가장 큽니다.”
가장 상급자로 보이는 경호원이 경의와 두려움이 반쯤 뒤섞인 눈빛으로 말을 덧붙였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진태경 헌터님께서 직접 상해를 가하여 크고 작은 부상을 입힌 사상자만 오백여 명이 넘습니다.”
“아.”
“물론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재 국내외의 분위기나 사건 당시의 정황상 정당방위가 성립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느 정도의 처벌은 예상했지만, 내가 처한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긍정적이었다.
진실이 밝혀짐과 동시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내가 행한 일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사망한 석고준은 세계가 인정하는 씨발놈으로 우뚝 섰다는 것이 요지였다.
‘바로 감방 들어가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아레스 길드 본사로 향하기 직전, 혹여 피해가 갈까 평화 길드에서 탈퇴 의사를 밝힌 것이 무색해질 만큼 상황은 긍정적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시작에는 김화종의 죽음이 있었으니 결코 긍정적이라 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이 정도로 주위 상황이 빠르게 진정된 건, 아무래도 확실한 증언 덕분이었겠지.’
문득 한 시간 전쯤 백한성 대통령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난다.
수많은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도 담담했던 사진 속 중년인의 얼굴도.
‘고세원.’
백한성 대통령이 전해 준 바에 의하면, 특별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그는 나와의 만남을 바란다고 했다.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말과 함께.
‘갚아야 할 빚이라. 도대체 뭐지?’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가 느낀 고세원이라는 사람은 단순한 인사치레를 주고받기 위해 그런 요청을 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설령 내 짐작이 틀렸다 하더라도 한 번쯤은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진실을 밝혔으니까.
고세원이 경호팀장까지 오르며 저질렀을 숱한 범죄는 씻을 수 없는 과오(過誤)지만, 내가 그에게 빚을 진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경호원들을 앞에 둔 채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복도 끝에서 스켈레톤 킹이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나타났다.
“커피 가져왔다. 처먹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믹스 커피를 바라보던 나는, 마침내 짧은 고민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안 먹어.”
“……이런 개 같은 인, 놈을 봤나.”
나는 으르렁거리는 녀석을 뒤로하고, 경호원들을 향해 말했다.
“갑시다. 안내해 주세요.”
“예?”
“고세원이요. 지금 특별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던데.”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경호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