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01
#600화
소중한 것을 잃은 슬픔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마모되고, 흐릿해질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난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최 팀장이 스스로를 가다듬기에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편히 쉬실 겁니다. 김 집사님께서는.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더욱 바빠지겠지요.”
나직하게 흘러나온 그 한 마디에, 나는 그가 준비를 끝마쳤다는 것을 짐작했다.
떠난 이를 마음에 간직한 채 일어설 준비. 다시 앞으로 걸어갈 준비를.
그러니 이제는 말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전에, 고세원을 만났습니다.”
불쑥 꺼낸 말에 최 팀장이 반응했다.
“고세원이라면…… 아레스 길드의 경호팀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석고준의 최측근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요.”
석고준. 그 세 글자에 최 팀장의 곧은 눈썹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너지려는 표정을 빠르게 수습한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그쪽에서 먼저 만남을 요청했더군요. 제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갚아야 할 빚이라. 그의 행보를 보면 단순한 감사 인사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만.”
고세원을 직접 만난 적도 없는 최 팀장이었지만, 그의 짐작은 예리하며 정확했다.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 나는 천천히 그날의 기억을 상세하게 풀어 들려 주었다.
특별 구치소 안에서 치러진 단독 접견. 그리고 오직 나 혼자만 들었던 또 다른 비밀 구역의 존재에 관하여.
“정확한 위치도,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죽은 이정룡과 석고준만 출입 가능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최 팀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했었는데…… 전부 사실이었군.”
“예?”
내 예상을 벗어나는 반응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향해 최 팀장이 물었다.
“혹시 진태경 씨 말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 아마 고세원과 제가 유일할걸요. 소리도 일시적으로 차단했고, 입 모양도 가린 채로 말했으니까.”
“청와대 경호실에서 동행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의심하는 눈치이긴 했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질문이나 반응은 없더라고요. 백한성 대통령한테 보고 정도는 했을지 모르겠지만.”
“음, 그렇군요.”
성실히 질문에 답했으니 이제 내 차례다. 나는 의문을 담아 최 팀장을 바라보았다.
“혹시 최 팀장님도 알고 계셨어요? 반응 보면 그런 것 같은데.”
최 팀장은 별다른 부정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둘이 아니라 넷이었네. 이 정도면 백한성 대통령도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글쎄요. 아마 그렇진 않을 겁니다. 아레스 길드의 보안은 철저하고 특히 A구역에 관한 정보는 정말 극소수에게만 허락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최 팀장이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셋입니다. 넷이 아니라.”
“예?”
“제게 그 정보를 알려 준 사람은 얼마 전 사망했습니다. 물론 그 역시 한때나마 고세원처럼 아레스 길드의 어두운 비밀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었죠.”
내가 알기로 그 정도의 인물은 결코 많지 않다. 아니, 아레스 길드의 설립 이래 손에 꼽을 만큼 적다.
‘게다가 얼마 전 사망했다면.’
뇌리를 스치는 한 사람의 이름.
마침내 그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송천우.”
고개를 끄덕인 최 팀장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이트 내부에서, 지금껏 숨겨 왔던 여러 비밀에 관하여 말해 주더군요. 마지막 양심의 가책이었는지, 아니면 스스로의 마음이 편해지길 원해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상관없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엎질러진 물에서 흔적을 찾아야 했다.
“송천우는 또 다른 비밀 구역의 위치나 용도를 알고 있었습니까? 그 노인네라면 알 것도 같은데.”
“그 역시 위치는 몰랐습니다만, 용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또 다른 비밀 구역의 용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가장 궁금했던 점이었다. A구역이 껍데기라면 그 안의 비밀 구역은 알맹이다.
이정룡과 석고준. 오직 두 사제(師弟)만이 공유했던 비밀은 무엇일까.
A구역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곳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천문학적인 액수의 현금? 몰래 빼돌린 S급 마정석? 그것도 아니면…… 인체 실험장?’
각종 음모론과 영화에서 접한 키워드가 머릿속을 휙휙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최 팀장의 한 마디에, 어지럽던 내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제 외조부님입니다.”
“예?”
“제 외조부님의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감추는 것. 그게 또 다른 비밀 구역의 용도입니다.”
“……!”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람이 불고, 머리 위로 구름이 천천히 지나가는 와중에도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런 미친.’
이건 생각도 못 했다.
천태민이라니. 바로 그 천태민이 비밀 구역에 있다니.
경상도의 아귀가 오함마로 뒤통수를 후려친 기분이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 냈다.
“그, 혹시. 외조부님이 두 분은 아니시죠?”
“…….”
“아니, 이 문제는 확실해야 하는 거니까.”
병신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최 팀장이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허.”
시벌, 진짠가 보네.
그리고 잠시 말문이 막힌 채 서 있는 내게, 최 팀장이 때려 낸 연타석 홈런이 날아들었다.
“이미 20여 년 전 의식을 잃으셨다더군요. 이정룡과 송천우는 그 사실을 은폐했고, 지금까지 비밀로 숨겨 왔습니다.”
“……의식을 잃어요? 천태민이. 아니, 그분께서?”
인류가 낳은 불멸의 영웅. 슬레이어(Slayer).
마왕 아스모데우스마저 쓰러트린 천태민이 식물인간이란다.
이건 진호 형이 고시 합격을 하고, 혁무진이 무림맹주가 되는 것보다 더 믿기 힘든 소식이다.
‘그게 말이 되나.’
천태민은 그야말로 무림의 무신(武神)과 같은 위치다.
그가 은거에 들어간 지 어언 이십여 년이 흘렀지만, 그 누구도 천태민의 발끝에조차 닿지 못했다.
완전무결하며, 절대적인 힘을 지닌 강자.
그가 불멸의 영웅으로까지 불리며 지금의 권위를 얻은 것은 그만한 힘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천태민이, 심지어 최첨단 의학과 마법적 치료법이 존재하는 현대에서 수십 년째 식물인간 상태라니.
‘이건 냄새가 나는데.’
그런 생각이 표정 위로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다.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최 팀장이 먼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정룡이나 송천우가 손을 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요?”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솔직해지기 마련이니까요. 특히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후. 그것도 그러네.”
“중요한 건 제 외조부님이 A구역의 또 다른 비밀 구역에 숨겨져 있다는 것. 그리고 세 명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심지어 A구역을 철저히 조사 중인 정부에서조차.”
나는 국가장이 진행되는 내내 곁에 있던 백한성 대통령을 떠올리며 물었다.
세상 누구보다 속마음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직업군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정치인일 것이다.
“정말 그럴까요?”
“이건 단순한 짐작이 아닌, 정보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이미 현장에 파견된 정부 조사단의 핵심 내부 인사 여럿이 저희와 손을 잡았으니까요.”
“……!”
“그러니 적어도 현재로서는 안심해도 됩니다.”
침착한 어조로 설명하는 최 팀장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에게 지난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슬픔을 딛고 일어나는 것을 넘어 뛰게끔 만든 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이 사람은…… 이미 시작하고 있었구나.’
쓰촨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평창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슬픔을 겪은 최 팀장은 어느덧 크게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넓은 보폭으로 뛰어가는 그의 다음 걸음이 어디를 향할지, 나는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예상 조사 기간만 최소 한 달입니다. 진태경 씨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먼저 정부 조사를 멈춰야겠죠. 의심을 피해 그분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렇다면 조사를 멈출 가장 빠른 방법은?”
“이 사태를 잠재우고 하루빨리 A구역의 주인이 되어야겠죠. 합법적으로.”
그리고 A구역의 합법적인 주인이 된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최 팀장이 손을 뻗어 위령비를 쓰다듬었다.
“언젠가 김 집사님께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철옹성으로 둘러싸인 왕성은 처참히 무너졌고,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유배당한 왕자는 긴 시간이 흐른 끝에 마침내 돌아왔다.
오래전 빼앗긴 왕관을 되찾기 위하여.
“아레스 길드를…… 반드시 제 것으로 만들겠다고.”
깊숙이 가라앉은 눈빛이 빛났다.
故김화종. 가장 높이 새겨진 그 이름을 응시하던 최 팀장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다.
처음 그가 내민 계약서에 사인했던 그 날부터,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계약 기간도 한참 남았으니까 도와주긴 할 건데. 또 누굴 죽여야 하는 건 아니죠?”
천연덕스러운 내 반문에 최 팀장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깨어난 직후 처음으로 웃음을 보인 그가 스마트폰을 꺼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채찍 역할이면 충분해요.”
“채찍?”
“예.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줄 약간의 당근과 채찍 말입니다.”
뚜. 뚜. 뚜. 달칵.
세 번의 신호음 끝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신분을 알 수 없는 통화 상대를 향해, 최 팀장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박대원 부사장님. 최민우입니다.”
박대원. 최근 각종 뉴스를 통해 부쩍 많이 접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지금 그와 통화를 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현 아레스 길드의 최고참 중역.’
부길드장인 석고준이 사망하고, 고세원의 폭로로 인해 실권을 쥔 중역들 대부분이 검찰 소환으로 끌려간 지금, 엉겁결에 아레스 길드의 임시 대표가 된 바로 그다.
– 네. 듣고 있습니다. 최민우 팀…… 아니, 최민우 씨.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두운 목소리에, 최 팀장이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국가장 직후에도 제게 별다른 말도 없이 돌아가신 걸 보면.”
– 저, 그게. 아무래도…….
“오후 여섯 시.”
– 네?
“제가 직접 본사로 찾아가겠습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자리에 부사장님을 포함한 중역분들 모두가 계셨으면 합니다.”
–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시간이 필요…….
“오후 여섯 시입니다. 세 시간이나 남았으니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그럼 이만.”
뚝.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이여.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은 그를 어이없이 쳐다보는 내게, 최 팀장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들으셨으니 상황은 대강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가시죠.”
“지금 바로요?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세 시간이나 남았다면서.”
“기자 회견도 열 겁니다.”
“……예?”
“바쁜 하루가 될 겁니다. 오랫동안 기다린 만큼, 한 번 검을 뽑았다면 벼락처럼 휘둘러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