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11
#610화
중동 무장 테러 단체와 반군 세력을 상대하며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인간의 악의(惡意)에는 끝이 없다는 것.
둘째. 이 참혹한 쳇바퀴는 계속해서 돌아간다는 것.
이 세상에…… 나쁜 놈들이 너무 많다.
놈들은 그야말로 잡초였고, 지구 어디에나 있는 바이러스였다.
뽑아도 뽑아도 어디에선가는 또다시 자라나고, 세상 곳곳을 병들게 한다.
그러니 결국 이 지긋지긋한 쳇바퀴를 영원히 멈추게 만드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지.’
이 쳇바퀴를 영원히 멈추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잠시나마 부숴서 움직임을 멎게 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노인은 거대한 쳇바퀴를 굴러가게 만드는 가장 큰 부품 중 하나였다.
「이보게. 괴상한 복면을 쓴 젊은이.」
담담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툭 내뱉은 노인이, 주름 가득한 손으로 괴상한 향을 풍기는 찻잔을 어루만진다.
「날 찾아낸 건 대단하지만……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네.」
알 디아브 자와히리라는, 여느 아랍인처럼 긴 이름을 가진 노인은 밖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과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 앞에서도 침착했다.
‘분명 아무 힘도 없는 노인에 불과할 텐데.’
이 놀라운 침착성이 한 세기를 넘게 살아오며 쌓은 관록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IS와 함께 중동을 양분하는 초거대 테러 단체, 알 카에다(Al-Qaeda)의 수장이라서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다.
“변해. 사람이 변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결국 세상도 변하지.”
「위대하신 알라의 앞에 엎드린 무슬림의 숫자가 몇이나 되는지 알고 있나?」
“모르지. 내 앞에 그중 한 명이 있다는 것 빼고는.”
「25%라더군. 전 세계를 통틀어서 25%. 머릿수로 환산하면 10억 명이 넘지.」
빙긋 웃은 알 디아브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지금 10억이 넘는 무슬림과 싸우고 있는 거라네. 위대한 알라신과 그분의 종복들을 적으로 돌린 거야.」
미친 늙은이의 헛소리 따위에 흔들릴 내가 아니다. 나는 알 디아브를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무슬림이 아니라, 당신 같은 테러리스트겠지.”
「아직 우리에게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네.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한 형제라네. 알라신의 이름으로 맺어졌으니 결국은 한 깃발 아래 모일걸세.」
“그래서 형제라는 놈들이 시아파, 수니파 갈라서 몇 세기 동안 박 터지게 싸우고 있나?”
내 반박에 알 디아브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상할 것 없는 일이지. 남편과 아내. 형제와 자매. 이렇듯 한 집안에서도 수없이 반목이 이루어지는 법.」
“그건 너희가 콩가루 집안이라서 그래. 우리 집은 안 그렇거든.”
「어쩌겠나. 선조 때부터 내려온 갈등인 것을. 그 역시 사소한 오해와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작은 반목일 뿐, 마침내 하나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네.」
알 디아브는 모른다. 아니, 눈곱만큼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 사소한 오해와 반목, 통합이라는 텅 빈 단어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고통받을 무수한 이들에 관해서.
‘괴물.’
늙을 대로 늙은 눈앞의 노인 역시 괴물이었다. 비틀어진 신념과 아집에 사로잡힌 괴물.
다음 순간 나는 그의 얼굴에 번진 환한 미소를 발견하고 섬뜩함을 느꼈다.
「어떤가. 미혹에 빠진 젊은이여. 더 이상의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고 나와 함께하는 것이?」
“……!”
「자네의 눈동자가 요동치는군. 마음이 흔들리고 있어. 수많은 번뇌에 사로잡혀 고통받지 말고, 따뜻한 알라신의 품으로 들어오게.」
더없이 평온한 목소리와 함께,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손이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온다.
가늘게 떨리는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네가 오래 살더니 정신이 단단히 나갔나…… 어디서 개수작이야?”
「……!」
노인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오르고.
“장난치다가 걸렸으면 피를 봐야지. 둘 중 하나만 골라. 목, 손목.”
허공에서 시선과 시선이 덜컥 부딪친 그 순간.
서걱, 탕!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내가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휘두른 소검(小劍)에 의해 가느다란 노인의 손목이 허공으로 솟구치고, 어둡고 풍성한 소매 깊숙이 숨겨져 있던 특수 총기에서 격발된 총탄은 내 어깨너머 어딘가를 꿰뚫었다.
짧게 요약하자면, 나는 피했고 그는 피하지 못했다는 거다.
「크아아악!」
노인네가 목청도 좋지.
100세를 훌쩍 넘긴 노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우렁찬 비명.
빠르고 완벽하게 잘려 나간 손목을 움켜쥔 알 디아브가 양탄자 위로 나동그라진다.
그리고…… 그보다 신속하게 움직인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쉬쉬쉬쉭!
천장, 벽, 양탄자로 덮여 있는 바닥 아래.
마치 유령처럼 나타난 놈들의 손에서 빛줄기와 바람이 휘몰아친다.
전후좌우. 삼십육방(三十六方)을 촘촘하게 에워싼 채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공세. 그러나 나는 회피 대신 공격을 택했다.
‘인벤토리 오픈. 화룡갑(火龍鉀) 장착.’
그와 동시에.
카각, 티티팅!
공간을 격하고 날아든 오라가 불그스름한 갑옷에 부딪혀 사라지고, 검게 물든 화살촉이 맥없이 튕겨 나간다.
당연한 일이다. 강기, 혹은 오라 블레이드라 부르는 기운의 집약체가 아닌 이상 화룡갑을 뚫을 수는 없으니까.
도대체 누구에게, 얼마나 고도의 훈련을 받은 것인지 마치 무림의 살수(殺手)와 같은 냄새를 풍기는 놈들도 그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다.
슈화아악!
명령도, 눈짓도 없었다.
검은 터번을 둘러쓴 놈들은 명령어가 입력된 기계처럼 움직였다.
화룡갑에 의해 보호받는 상반신을 포기하고 하반신을 포함한 노출된 부위를 노린 것이다.
하지만 화룡갑은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신병이기다.
만약 나보다 한 수 위의 상대를 만난다면 잠시나마 동수(同水)를 이루어 봄 직하고, 서로의 실력이 동수를 이룬다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하물며 한참 하수인 상대에게는 어떻겠나.
고작 서른 명? 설령 그 열 배가 달려든다 해도 쓰러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놈들이었다.
“들어와. 이 까마귀 새끼들아.”
툭 내뱉은 한 마디와 함께, 나는 손에 쥔 소검을 내리그었다.
화악!
단 한 번의 횡격(橫擊).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콰아아앙!
검신을 따라 터져 나온 초고온의 열기가 마법과 무기를 녹였다. 사방의 공간을 일그러트렸다.
웅크리고 있던 강대한 기운이 기지개를 켜자, 지하 깊숙이 세워진 은거지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구구구구궁!
흔들리는 것은 비단 땅과 천장뿐만이 아니었다.
검은색 터번 사이로 보이는 여러 쌍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소검의 궤적에 걸려든 동료들이 단말마도 지르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믿을 수 없는 힘의 격차를 느껴서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아마 둘 다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확실한 건, 물러서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거다.
“안 와? 그럼 내가 간다?”
내게 있어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단어는 이미 그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나는 간혹가다 수십 명, 때로는 수백 명, 드물게는 수천과도 싸웠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이제 이곳에서 벌어질 전투 역시, 지금까지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쉭!
돌연 땅에서 솟구친 검날이 턱을 스친다.
동료들이 나타나는 와중에도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참을성 많은 놈이었지만 공격은 실패했고 그 대가는 죽음이다.
빠각!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펼친 금나수(禁拿囚).
그리고 목이 몇 바퀴나 회전하는 진기명기를 선보인 놈의 신형이 허물어지기 전, 나는 한 손을 뻗었다.
쉬쉬쉭! 푸푹!
허공을 가른 다섯 줄기의 지풍(指風)에, 천장과 벽을 밟으며 쏘아지던 까마귀 무리 중 일부가 추락한다.
정확히 목을 꿰뚫린 동료를 뒤로하고 달려든 놈들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쐐애애애액! 서걱!
필사의 의지가 실린 일격. 그러나 의지와 실력의 간격은 넓고 깊었다.
내가 휘두른 소검에 의해, 검과 함께 두 동강이 난 시체가 실 끊어진 연처럼 추락한다.
푸화악! 펑!
허공에서 뿜어진 핏물을 향해 일장(一掌)을 내지른다.
끔찍한 열기에 의해 증발하는 핏물. 그 너머에서 나를 향해 쏘아지던 또 다른 누군가가 더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가 벽면에 처박혔다.
쿠우웅!
충격으로 인하여 공간이 뒤흔들린다.
하지만 공간이 아니라 세상이 뒤집힌다고 한들, 놈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쉬익!
목, 종아리. 손.
제각각의 목표를 향해 동시에 울려 퍼진 세 줄기의 파공성.
나는 피하는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한 손에 쥐고 있던 소검을 휘둘렀다.
아니, 쏘아 보냈다.
쐐애애액! 퍼걱!
심장에 강기가 실린 검이 박히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한 주인의 손에서 검자루가 미끄러진다.
나는 어느덧 코앞까지 들이닥친 두 개의 검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덥석!
오러는 극도로 예리하며 파괴적인 기의 집약체지만, 강기가 서린 맨손을 베어 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나는 검신을 붙잡은 양손에 힘을 가했다.
구구국, 콰득!
「……!」
「……!」
반쪽으로 부러진 두 개의 검과 느낌표가 떠오른 두 쌍의 눈동자.
나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가라.”
「자, 잠……!」
“아, 이것도 가져가고.”
저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죽인 이들에게 유언 한마디 정도쯤 남길 시간을 줬을까?
정말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푸푹!
「커헉!」
끓어오르는 듯한 단말마.
본래 자신의 검이었던 것을 가슴에 박아넣은 놈들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진다.
털썩. 썩은 통나무처럼 쓰러진 두 시체와 함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이상 달려드는 적도, 남아 있는 파공성과 죽음도 없었다.
단 한 사람만이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탄. 네놈은…… 사탄이로구나.」
“그럴지도 모르지. 적어도 너희 같은 놈들한테는.”
사탄. 어릴 적 교회 집사님에게 처음 들었던 단어였는데, 이제는 내 이름처럼 느껴질 만큼 익숙하다.
죽은 시신에서 소검을 뽑아낸 나는 알 디아브에게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참 웃긴 일이지. 누구보다 악마 같은 놈들이 나한테 사탄 운운하고 있으니.”
「마, 마귀 같은 놈. 내게 다가오지 마라! 사악한 사탄! 마귀야! 신의 이름으로 썩 물러날지어다!」
“……이거 1호선에서 많이 들어 본 소린데. 갑자기 없던 향수병까지 생기려고 하네.”
혹시 알 디아브가 한국 유학 경험이 있나 잠깐 고민하고 있던 그때, 외부로 통하는 철문이 열리고 어느새 조용해진 너머에서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스켈레톤 킹이 나타났다.
“간악한 인간이여. 끝났냐?”
“어, 끝났다. 그쪽은?”
“조금 전에 끝나서 작업 준비 중이다. 나름 쓸 만한 재료가 워낙 많기도 하고, 나야 딱히 나쁠 건 없긴 한데…… 정말 괜찮겠나?”
“뭐가?”
“아니. 같은 인간이잖나. 동족이다 보니 내 스켈레톤 군단으로 쓰기에는 좀 거슬릴 수도…….”
“걔들은 내 동족 아니야. 그리고 그래야 내가 마음 편히 한국으로 돌아가지.”
딱 잘라 대답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붙은 알 디아브를 향해 스켈레톤 킹을 소개시켜 주었다.
“아. 이쪽은 진짜 마귀.”
「……!」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는 오랑캐로. 테러리스트는 테러리스트‘였던 것’이 처리해야 하는 법.
나는 스켈레톤 킹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말을 건넸다.
“야. 해 봐.”
“……하기 싫은데.”
“아이. 그러지 말고. 얼른 해 봐.”
마뜩잖은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이, 알 디아브를 향해 엄지를 척 치켜세우며 말했다.
“개 같은 테러리스트는 언데드 군단이 처리할 테니, 걱정 말라구!”
아, 이건 못 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