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13
#612화
“나와.”
착 가라앉은 목소리.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
그러나 나는 대답하는 대신 침착하게 그를 지켜봤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이 환해진다.
스윽.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 남자가 힘주어 재차 입을 열었다.
“숨어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나오라고.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당연히 알고 있다. 그의 이름과 얼굴, 심지어는 나이와 고향까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지만.
“좋아, 마지막이다. 셋 셀 때까지 안 나오면 내 친한 동생 부른다. 걔 엄청 세고 잘나가는 헌터야. 하나. 둘…….”
셋까지 다 세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긴 했지만, 이미 볼 장 다 본 마당에 더 지켜보는 것도 낯부끄럽다.
나는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설마 그 친한 동생이라는 사람이 나는 아니지?”
“……!”
“얼씨구. 맞나 보네.”
충격으로 석상처럼 굳어 있던 남자, 진호 형이 부릅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 뭐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어차피 부를 거, 알고 미리 왔다. 됐냐?”
잠시 침묵하던 진호 형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봤냐.”
“나와, 할 때부터.”
“아, 씨바…….”
“멋있더라. 포스가 너무 지려서 나도 모르게 나올 뻔했잖아.”
“지금 놀리냐?”
“응.”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당당한 대답에 나를 빤히 노려보던 진호 형이, 문득 실소를 흘렸다.
“새끼. 하나도 안 변했네.”
별것 없어 보이는 저 한 마디에, 이토록 반갑고 고마운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나는 그를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배고프다. 라면 끓여 줘.”
* * *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니, 일 년 전쯤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물론 지금은 나도, 진호 형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형이 정장 입은 건 처음 보네. 맨날 누더기 같은 추리닝만 걸치고 다니더니.”
“인마, 누더기 같다니. 그거 꽤 비싼 메이커야.”
“언제 샀는데?”
“음. 고등학교 때?”
진호 형이 몇 살이었더라. 잠깐 생각하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더기 같은 게 아니라 누더기였네. 나 물 좀. 아니다. 혹시 소주 있어?”
“차라리 고깃집에 가서 고기 있냐고 물어봐라.”
“……보아하니 곧 단명하겠구만.”
“김 계장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진작 끊었다. 그 시발롬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사사건건 시비 걸고 지랄이야.”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친 진호 형은 소주 석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작년 말, 드디어 오랫동안 준비했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그였다.
“그래도 형이 공무원이 되긴 하네. 세상 참 말세다.”
“이 새끼 말본새 보소. 그럼 안 될 줄 알았냐?”
“아니. 되는 건 둘째치고 난 형이 조만간 야동 보다가 복상사할 줄 알았지.”
“……음. 제법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한데.”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그나마 아직 한 줄기 양심은 남아있군.
만약 정부 정식 부처 중에 야동부가 있었다면 장관까지 올라가고도 남을 인간이다.
야동부 차관직에 소라 아오이, 대변인으로는 키라라 아스카를 두고 폰허브를 호령했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정신 나간 부처는 존재하지 않았고, 특채 시험을 통해 합격한 진호 형은 알짜배기로 소문난 헌터 및 게이트 관리 부서에 발령 났다.
물론 나와의 개인적인 친분이 보이지 않는 가산점을 부여했다는 것은 나도 내심 짐작하는 바였다.
꼴꼴꼴.
소주 잔을 가득 채운 진호 형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 웬일이냐?”
“잊으셨나 본데, 여기 내 집이야. 지금은 쓰레기 처리장인지 오피스텔인지 헷갈리긴 하지만.”
“집주인이 두세 달 넘게 코빼기도 안 비추니까 하는 소리 아냐, 인마.”
“그거라면 뭐 형 얼굴도 볼 겸해서 왔지. 가져갈 물건도 있었고.”
“가져갈 물건? 옷 말하는 거면 그냥 하나 사지 그러냐. 돈도 썩어 나는 놈이.”
“돈이 있어도 못 사. 파는 곳이 없어서.”
“그런 게 어디 있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던 진호 형이 이내 짧은 탄성을 흘렸다.
“아. 혹시 그 고물 캡슐?”
“응, 그거. 다행히 안 버렸더라.”
“버리면 죽여 버린다며.”
“그래서 다행인 거지. 버렸으면 진짜 죽였을 텐데, 휴.”
“……농담이지? 농담이라고 해 줘, 제발.”
맨 처음 나를 무림으로 인도했던 게임 캡슐은 별다른 쓸모 없이 이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시스템이 허락한 덕분에 캡슐이 없어도 자유자재로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애물단지 취급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고물 캡슐이야말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일등 공신이며,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니까.
“내가 식탁은 안 닦아도 그 캡슐은 일주일에 한 번씩 닦는다. 그런데 그거 여전히 작동 안 되던데. 뭐 하러 가져가?”
“그냥. 장식용이지, 뭐.”
“귀신 들린 물건 아니냐? 전에 왜, 희망 고시원 살았을 때 네가 저 캡슐에서 잤다가 이상한 악몽 꿨다고…….”
그러고 보니 그랬던 적이 있었지.
처음 로그아웃했을 때의 이야기를 꺼내는 진호 형의 모습에,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혹시 그 뉴스 봤어? 이번에 중동이랑 아프가니스탄 쪽 난리 났던데.”
“어? 갑자기 그 얘기를 왜 꺼내?”
“아니, 봤냐고.”
“당연히 보기야 봤지. 어제 중동 테러 단체랑 아프가니스탄 반군 세력들이 공동 성명서도 발표했잖아. 앞으로 테러 자제하고 밑에 놈들 단속 잘하겠다고. 사실상 쫄아서 항복 선언 한 거지.”
“안심하면 안 돼. 어차피 잠깐일 테니까.”
“그래도 진짜 대단한 사람들 아니냐? 그 이상한 복면 쓴 5인조.”
다행히 화제 돌리기는 그럭저럭 먹혀 든 모양이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어쨌든.”
후루룩 면발을 빨아들인 진호 형이 소주로 입가심을 하며 말을 이었다.
“고생 많았다. 새해 밝자마자 몬스터 웨이브에, 몬스터보다 더한 인간에, 이젠 사막이랑 아프리카까지 다녀오고.”
“뭘 또 고생씩이나. 그냥 해야 할 일이니까 한 것…….”
순간 멈칫한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잠깐만. 이 인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 뭐라고?”
“뭐긴 뭐야. 네가 들은 대로지. 혹시나 해서 찍어 봤는데 대충 맞았네.”
“……!”
“인마. 전 세계에 그럴 만한 짓을 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다고. 다들 테러리스트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반군 새끼들 꼴도 보기 싫다. 하면서도 막상 복면 뒤집어쓰고 실행에 옮길 사람이 누가 있겠냐? 아니, 애초에 그걸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지, 능력이.”
눈을 동그랗게 뜬 내 모습에 진호 형이 피식 웃었다.
“몇몇 사람들도 내심 짐작하면서도 쉬쉬하고 있을걸. 어차피 증거도 없는 데다가 탓할 일도 아니니까. 다만 어떤 말단 공무원은 운 좋게 그 복면인이 어떤 성격인지도 알고, 라면도 끓여 먹는 사이라 이렇게 슬쩍 떠볼 수 있는 거고.”
나는 왠지 모르게 얼얼해진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내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될 거라는 사실은 짐작했지만, 이렇게 어이없을 만큼 쉽게 걸려들 줄은 몰랐다.
“나, 나 진짜 아닌데?”
“그래. 뭐 그렇다고 치자. 그래서 언제 돌아온 거야?”
“…….”
젠장. 이미 나가리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소주잔을 채우며 대답했다.
“사흘. 아니다, 나흘 전.”
“좋아. 이제 좀 고분고분해졌군.”
“어디 가서 입 벙긋하지 마. 기밀인 건 둘째치고, 그때는 형이 위험해져.”
나나 최 팀장. 그리고 가족들은 늘 보이지 않는 경호에 둘러싸여 있지만, 진호 형은 아니다.
내 말의 의미를 찰떡처럼 알아들은 진호 형이 입맛을 다셨다.
“으음. 뭔가 거물이 된 기분인데.”
“거물이 되기 전에 폭발물이 먼저 배달 올지도 몰라.”
“글쎄. 걔들은 다 알아도 나 못 건드릴걸? 진태경이 빡 돌면 무슨 일 벌일지 모르니까. 캬, 이거야말로 언터처블(Untouchable) 아니냐?”
태평하게 웃은 진호 형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요새는 얼마나 바쁘게 지내길래, 언제 돌아왔는지도 헷갈려?”
“음.”
얼마나 바쁘냐고?
어느덧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을 긁적이던 내가 대답했다.
“그냥 밤낮없이 훈련해. 가족들이랑 같이 식사하고, 계속해서 다시 훈련.”
“훈련? 너 정도씩이나 되는 놈이 왜 훈련을 해?”
“형은 명문대 나왔는데도 십 년 가까이 또 공부만 했잖아. 비슷한 거지.”
“이 새끼가 아픈 곳을 찌르네. 그리고 너랑 나랑 같냐? 분야 차이가 아니라 아예 노는 레벨이 다른데.”
그것도 그렇다. 진호 형이 나온 명문대는 연간 수백 명이 입학하고, 그와 비슷한 숫자가 졸업하니까.
하지만 지금의 내게도 훈련은 필요했다.
배움에는 끝이 없고, 공부(工夫)라는 단어는 학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새로운 뭔가를 배운다기보단, 천천히 되새긴다고 봐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고 있는 훈련은 복습이라고 봐야 했다.
나를 위한 공부이기도 하고, 이 세상을 위한 공부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아직 완전한 결과물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으, 표정 진지한 거 봐. 뺨 한 대만 치고 싶다.”
“……거, 한창 진지한데 그 아가리를 좀.”
“입장 바꿔서 한번 생각해 봐라. 너 같으면 어떨지.”
“음. 그건 그렇네. 한잔해.”
우리는 사이좋게 술잔을 부딪쳤다.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 다 식어 버린 면발을 뒤적거리던 진호 형이 묻는다.
“그래서, 훈련은 잘 되어 가고?”
“그럭저럭. 한 달쯤 전부터 준비했던 거라 슬슬 마무리 단계긴 한데…… 이게 쉽지가 않네.”
이건 결코 엄살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마치 1만 피스로 이루어진 퍼즐을 맞춰야 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짜 맞추는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과 부족함을 느꼈고, 이제는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찾지 못해 어둠 속을 더듬거리고 있다.
그리고 내 눈 앞을 가린 이 어둠의 이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심마(心魔).’
마음에 낀 먹구름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무림과 현대. 두 세계에 대한 고민과…… 그래, 무엇보다 김화종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던 그의 목소리가. 피로 뒤덮인 붉은 눈밭에서 서서히 감기던 눈동자가 생각났다.
어쩌면 내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캡슐을 가져가기 위해서라 아니라 편안함을 느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가족도, 함께 하는 동료도 아닌 전혀 다른 세상에서 자신만의 삶을 사는 친구를 만나 옛날처럼 술잔을 부딪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래, 그런 거였어.’
나는 문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심마를 완전히 떨쳐 낸 것은 아니지만, 모든 상황과 고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무거웠던 마음 한구석이 홀가분해진다.
더불어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나 간다.”
“라면 다 식었는데. 안주로 두부김치 만들…… 갑자기?”
“어. 할 일 생각났어. 술 혼자 먹어.”
“미친놈이냐?”
“아니, 집주인인데. 이번 달부터 월세 낼래?”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진호 형이 넙죽 허리를 숙였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사장님.”
“오냐.”
피식 웃으며 현관문으로 향하는 내 뒤로, 진호 형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야! 캡슐은?”
“다음에. 다음에 가져갈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다음에도, 나는 똑같은 대답과 함께 캡슐을 가져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오늘처럼 술잔만 부딪칠 것이라는 걸.
“그래, 힘내라. 인마.”
귓가에 닿은 자그마한 누군가의 중얼거림과 함께, 나는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