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14
#613화
오늘도 트레이닝 룸은 적막했다.
바닥에는 수많은 종류의 병장기가 널브러져 있었고, 자동 복구 마법이 걸린 벽은 처참하게 무너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가부좌를 튼 채 상념에 빠져 있는 내가 있다.
‘더. 아주 조금만 더.’
거의 다 왔다.
이 커다란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
진호 형과 헤어진 직후, 곧장 트레이닝 룸으로 처박힌 나는 그 한 조각을 위한 마지막 작업에 돌입해 있었다.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죄다 빠진다 해도, 설령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주화입마의 위기가 온다 해도 이겨 내야 한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떠나기 전 이 퍼즐을 완성해야 했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퍼즐을 맞춰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몇 달 전부터였다.
그래, 아마 소격변(小激變)이라 명명된 아크 리치와의 전투 이후였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모두가 위험하다.’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생각.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안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마력 수치는 비정상적으로 상승했고, 그에 따라 몬스터는 강력해졌으며, 대격변 이후 몰라볼 만큼 줄어들었던 인명 피해가 곳곳에서 속출했다.
지금의 현대 인류에게는 또 다른 힘이 필요했고, 나는 고민 끝에 결심했다.
무공(武功)을 창안(創案)하기로.
매일같이 불어나는 위험과 재앙에 맞서, 이들에게 새로운 검과 방패를 나누어 주기로.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최하급 헌터라도 익힐 수 있을 만한 안정성이 있는 동시에, 악인들에게 악용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위력을 지녀야 했으니까.
하지만…… 마침내 나는 이 거대한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찾아냈다.
‘그래, 이거다.’
수백 번의 시도 끝에 완성시킨 하나의 길.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심법(心法)을 완성시킨 그 순간.
띠링. 띠링. 띠링.
내 성공을 축하하듯, 힘찬 알림이 터져나왔다.
* * *
최 팀장, 아니 이제는 평화 길드장이자 아레스 길드의 부길드장으로 취임한 최민우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일주일간 자리를 비운 사이 처리해야 할 안건은 수백 개로 불어나 있었고, 임시로 배정된 개인 비서는 사방에서 빗발치는 거물들의 전화에 진땀을 흘렸다.
“기, 길드장님. 청와대에서 오찬 일정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정계와 전경련에서 친목회에 참석해 주십사 하는…….”
“길드 연합 측에서 게이트 관련 사업 연계 제안을…….”
“해외 지사 설립 건에 관하여…….”
거절할 수 없는 제안도,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제안도 있었으나 최민우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알겠습니다. 일정 잡으세요.”
최민우는 분 단위로 짜인 스케줄에 맞춰 움직였다. 일하는 기계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는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다.
위태로워 보일 만큼 바쁜 그의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우려 섞인 시선을 보냈다.
“자, 하나만 선택해요. 최 팀장님. 최 길드장님. 최 부길드장님. 이 셋 중에 어떤 호칭으로 불러 드릴까요?”
“팀장님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우린 그때 만났으니까요.”
“좋아요. 그럼 최 팀장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는데…… 좀 쉬어요. 스케줄 좀 줄이고, 자잘한 업무는 비서에게 맡기라고요.”
“맞아, 최 팀장. 아무리 젊다지만 계속 이러다간 자네가 힘들어져.”
“저는 괜찮습니다. 두 분 다 걱정하지 마세요.”
“최 팀장님.”
“아니, 그러지 말고…….”
“괜찮습니다, 저는.”
담담한 목소리로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최민우의 모습에, 그를 만류하려던 송송이와 임꺽정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들의 귀로 흘러들어온 대답은 처음과 같았지만, 마음속으로 전해진 대답은 처음과 달랐다.
괜찮습니다, 저는.
같으면서도 다른 그 한 마디를 남긴 최민우는 계속해서 일에 파묻혔다.
그나마 곁에서 약간의 도움을 주던 개인 비서마저 떠나보낸 채, 더욱 바빠진 일상 속에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가진 백한성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그에 관한 대화가 오간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요새 많이 바빠 보이시는군요.”
“그래서 좋습니다.”
“듣자 하니 이제는 비서도 두지 않으신다던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커피.”
“예?”
“커피를 못 타더군요. 그뿐입니다.”
백한성 대통령은 농담이라 생각하고 웃어넘겼지만, 최민우가 그에게 했던 대답은 모두 진심이었다.
최민우는 정신없이 일에 파묻힌 지금이 좋았고, 젊은 비서가 타 주던 커피는 희한할 만큼 맛이 없었다.
그리고……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이렇게나마 잠시 잊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잠시 실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시죠.”
하루. 또 하루.
진태경이 고립된 공간에서 수련을 거듭했다면, 최민우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와중에도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아마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한 사람이 이름이 생각난 것은.
여느 때처럼 가혹하리만치 자신을 몰아붙이던 그 날, 마음 깊숙한 곳에 억누르고 있던 그리움이 고개를 든 것은.
“정 기사님, 차 돌리십시오.”
“예? 죄송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다음 스케줄 장소가…….”
“오늘 일정은 전부 캔슬입니다. 가야 할 곳이 있어요.”
백미러를 통해 마주친 운전기사의 당황한 눈빛을 뒤로한 채 최민우는 리무진 시트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따뜻한 봄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장소로 향했다.
저벅. 저벅.
홀로 오른 언덕은 높으면서도 가팔랐고, 최민우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니, 어쩌면 무거운 것은 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높고 가파른 이 길을 백 번, 천 번을 오른다 해도 닿을 수 없는 한 사람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이 최민우의 마음을 짓눌렀다.
툭. 투둑.
가는 길에 이른 꽃망울을 틔운 봄꽃을 한 아름 땄다. 새하얀 제비꽃으로도 부족한 것 같아, 길을 따라 모여 있는 선홍빛 꽃잔디도 섞였다.
이제는 곁에 없는 그는 언제나 붉은색을 좋아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늘 검은색 정장을 입으셨었지.’
불과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었는지. 그 많던 바이크는 왜 팔았는지.
어째서 그토록 가까이하던 술을 끊고, 덥수룩하게 길렀던 수염과 장발을 정돈하여 깔끔하게 가르마를 탔는지.
‘왜 그러셨습니까. 제게는 당신만으로 충분했는데.’
모든 걸 알게 되었지만, 모든 것이 늦어 버렸다.
최민우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그렇게 걸었다.
따뜻하고 바람 잘 드는 언덕 위에는 커다란 봉분(封墳)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화강암을 깎아 만든 비석에 새겨진 세 글자는 유난히도 선명했다.
故김 화 종.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차가운 설산이 아닌, 따스한 언덕에 잠든 노집사를 멍하니 바라보던 최민우의 입술이 열렸다.
“저 왔습니다.”
언제나 침착하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떨림이 전해진 입술을 꽉 깨문 최민우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마음에만 품은 채 생전 단 한 번도 건네지 못한 그 한 마디가 흘러나온 그때.
솨아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최민우의 전신을 휩쓸었다. 언덕에 깔린 잔디가 허리를 굽히고 나뭇가지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손에 든 꽃다발을 봉분 옆에 내려놓은 최민우의 몸이 우뚝 굳었다.
‘저건.’
의문과 함께 커지는 눈동자.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비석의 뒷면이었다.
지금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곳에는 또 다른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왔구나.
고맙고, 사랑한다.
행복해라.
“……!”
누가 새겨 놓은 글귀였을까. 당연히 들었어야 할 의문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상관없었다.
최민우는 석상처럼 굳은 채, 하염없이 그 짧은 문장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그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가슴 깊숙한 어디에선가 불쑥 솟구친 무언가가 목을 틀어막고 눈동자를 뜨겁게 달구었다.
“아.”
그저 모든 것이 먹먹해져, 목맨 탄식을 토해 낸 그 순간이었다.
“빨리 왔군. 최소한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불쑥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
돌아선 최민우의 시야에, 작은 상자를 든 채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스켈레톤 킹이었다.
왜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일까. 기다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러나 그런 의문은 떠오름과 동시에 사라졌다.
지금의 최민우에게 필요한 건 이유가 아닌 온기였으니까.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에 관한 대답이었으니까.
“하나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평소의 스켈레톤 킹이었다면 퉁명스럽게 안 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만약 진태경 씨였다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스켈레톤 킹은 즉각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건 왜 묻지?”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니까.”
말없이 최민우를 응시하던 스켈레톤 킹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울었을 거다. 틀림없이.”
“……!”
“그리고 극복하고 계속해서 살아가겠지. 떠난 사람을 영원히 기억하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최민우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슬픔과 후회. 그리움과 죄책감을 눈물과 함께 흘려보냈다.
그리고 스켈레톤 킹은 조용히 물러나며 생각했다.
이 상자에 담긴 물건들은, 잠시 후에 전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동시에 반나절 전쯤 자신에게 이것을 맡기며 진태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하자.’
‘싫다. 안 된다. 돌아가라.’
‘이걸 최 팀장님한테 전해 줘. 그 외에는 누구도 안 돼.’
‘빌어먹을 인간 같으니. 이제는 들은 척도 안 하는군. 이 몸이 잔심부름꾼으로 보이나?’
‘잔심부름꾼이 아니라, 널 믿으니까 맡길 수 있는 거다.’
‘……전해 줘야 하는 게 도대체 뭔데?’
‘무공(武功).’
‘뭐?’
‘그렇게 말하면 알 거다. 상자 안에 편지 있으니까 꼭 읽어 보라고 하고.’
‘아니. 가뜩이나 요새 보이지도 않는 인간을 어떻게…….’
‘김 집사님 묘지에서 기다려. 그전에는 만나더라도 입 벙긋하지 말고. 아마 이겨 낼 시간이 필요할 거야.’
스켈레톤 킹의 생각에, 진태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괴상한 인간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묘지에서 딱 마주친 것도 그렇고.
한 번 잠들면 멱살을 잡고 흔들어 깨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망할. 감히 이 몸에게 고작 이따위 잔심부름을 시키고, 혼자서 맘 편히 잠을 자?’
절대 깨우지 말라며 신신당부까지 했으니 지금쯤이면 곯아떨어져 있을 것이다.
스켈레톤 킹은 그런 진태경을 생각할수록 괘씸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널 믿으니까 맡긴다. 믿음이라, 음. 으음.’
자신이 들고 있는 상자와 진태경의 한 마디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스켈레톤 킹이 작게 중얼거렸다.
“……좋은 꿈 꾸거라. 간악한 인간아.”
솨아아아.
다시 한번 바람이 분다. 한 사람의 흐느낌과 어느덧 사람과 가까워진 한 몬스터의 목소리가 바람에 파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