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15
#614화
띠링.
–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10, 9, 8, 7…… 1, 0.
– [동기화]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갱신된 능력치가 신체에 적용되며, 특정 칭호에 한하여 사용이 제한됩니다.
– [로그인]을 완료했습니다.
익숙한 시스템 알림이 끝나기도 전에, 까슬까슬한 촉감과 젖은 풀잎 냄새가 피부와 코를 타고 전해져 온다.
나는 입술에 붙어 있는 볏짚을 뱉어 내며 내심 중얼거렸다.
‘돌아왔구나.’
무림으로의 귀환.
현대에서는 고작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일이 하도 많았어야지.’
무림. 그리고 현대.
나와 두 세상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다.
“…….”
다시 생각해 보니까 두 개는 맞구나. 그걸 번갈아 가며 컨트롤해야 하는 거라 더럽게 피곤한 거지.
그나저나…….
‘아. 일어나기 싫다.’
전신을 감싼 볏짚은 생각 이상으로 따뜻하면서 푹신했다.
이대로 늘어지게 한숨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보급형 무공을 만드느라 근 일주일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두런두런 들려온 대화 소리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대로 잠들었을지도 몰랐다.
“음. 조장님이 어떤 사람이냐고요?”
“네, 예전부터 궁금했거든요. 아직 다른 두 사람도 안 와서 심심한 것도 있고. 송 호위도 그렇죠?”
익숙한 목소리다. 혁무진과 주화란의 대화에 이어, 추혼객(抽魂客) 송일섬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난 별로 안 궁금하오.”
“들었죠? 송 호위도 궁금하대요.”
“아니, 안 궁금하다니까.”
“은자 두 냥 더 드릴게요.”
“……살짝 궁금해지는군.”
저 돈에 미친 새끼.
큰손 회장님의 은자 도네이션 한 방에 무릎을 꿇은 송일섬까지 가세하자, 혁무진의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이거 대답하기 어려운데. 조장님은 아직 주무시는 거 확실하죠?”
“네. 네.”
“확실히 잠들어 있다. 호흡이 안정되어 있어.”
“하긴 그렇겠네요. 한 번 잠들면 귀신이 업어 가도 모를 정도니까.”
안정된 것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건 내가 호흡을 조절해서 그런 거다. 개인적으로도 은근히 어떤 대답이 들려올지 궁금했으니까.
그리고 나의 충실한 오른쪽 새끼발가락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저희 조장님은 아주 그 유명한 그, 아주 유명한 어 뭐랄까…….”
“잘생기고 헌앙한 후기지수?”
맑고 고운 영창 피아노 같은 주화란의 물음에, 혁무진이 세상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씹새끼였죠.”
“……아.”
“……어.”
“요즘에서야 열화신룡이니 뭐니 하지. 일이 년 전만 해도 그만한 씹새끼 찾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매일같이 기루 가서 술 처먹고, 공금 훔쳐서 도박장에 뿌리고. 오죽하면 그때 당시 조장님 별호가…….”
“야.”
“맞습니다. 야왕(夜王)이었어요. 그쪽 분야에서는 십왕(十王)이 떼로 덤벼도 상대가 안 된다니까요. 밤마다 옆구리에 전낭 떡 하니 차고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기루로 향할 때면 저랑 동료 수문위사들이 그랬습니다. 저 씹새끼 오늘도 천마군림보 쓴다고. 그나저나 송 대협께서는 견문이 넓어서 들어 보셨구나. 역시.”
혁무진의 너스레에 송일섬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예?”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에이. 무슨 소리세요. 조금 전에 야라고 하셨잖아요.”
“아니라니까.”
“틀림없이 사내 목소리였는데요. 농담도, 참. 그럼 도대체 누가…….”
길게 늘어지던 말꼬리가 뚝 끊겼다.
짧지만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의 손길이 내 얼굴을 덮은 볏짚을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부스럭. 스윽.
시야를 가리고 있던 볏짚이 치워지고, 희미하게 비추는 달빛 아래로 두 개의 시선이 부딪친다.
나는 사람 좋아 보이는 푸근한 웃음과 함께, 오랜만에 마주한 혁무진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야.”
“…….”
말없이 깊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혁무진이 손에 든 볏짚을 다시 내 얼굴에 덮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치워.”
“달이 밝아서 그런가. 웬 환청이…….”
“안 치우면 네 인생이 어두워진다. 치워.”
“옙.”
볏짚에서 느꼈던 훈훈한 온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나는 엑소시스트에 의해 봉인되었다가 수백 년 만에 깨어난 흡혈귀처럼, 마차 짐칸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휘우우우.
스산한 바람이 옷자락에 들러붙은 볏짚을 날려 보낸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주화란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언제 피웠는지 모를 모닥불 근처에서 불을 쬐고 있던 송일섬은 갑자기 말에게 건초를 먹여야겠다는 혼잣말과 함께 엉덩이를 뗐다.
그리고 일렁이는 불길을 받아 커진 내 그림자가, 한 사람을 향해 드리워졌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나직한 내 물음에 혁무진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조장님, 이러지 마시고 제 말을 좀 들어 보십시오.”
“그래서 물었잖아.”
“마지막이라면서요. 마치 유언 같잖아요.”
“유언 맞을걸.”
“……아.”
“아주 신이 났더라. 수하의 그런 모습에 조장으로서 참을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반쯤은 사실이다.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무림에서 개고생, 현대에서 개고생하고 잠도 못 잔 상태로 돌아왔는데 직속 수하가 뒷담화를 까고 있던 건에 대하여.
그리고 이 라노벨 제목 같은 상황에 뒤따라온 감정의 이름은 분노였다.
“얼굴, 팔, 다리, 복부, 등. 이 중 하나만 골라.”
“혹시 그거, 제 사인(死因)입니까?”
“죽이진 않고, 죽도록 때릴 거야.”
잠깐 고민하던 혁무진이 대답했다.
“복부로 하겠습니다.”
“이유는?”
“등의 상처는…… 무림인의 수치니까.”
나는 녀석의 기개에 탄성을 내뱉었다.
“지랄 염병을 떠는군.”
“잘못한 건 사실이니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오십시오.”
“그럼 네가 복부를 골랐으니, 난 나머지를 고르겠다.”
“예?”
“뭐가 ‘예?’야. 너만 고르면 불공평하잖아. 나도 골라야 공평한 거지.”
“아니, 잠깐만요. 도대체 그게 왜 공평…….”
빡!
강렬한 타격음.
천천히 타들어가는 모닥불 위, 코피를 뿌리며 솟구친 한 사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다.
‘오자마자 주먹을 쓰게 되다니.’
이곳은 안휘(安徽)와 호북(湖北). 하남(河南)으로 이어지는 접경지인 대별산(大別山).
그리고 BGM처럼 잔잔하게 깔리는 혁무진의 비명을 듣고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두 그림자는, 근본 없는 사파 나부랭이이자 화룡각의 마지막 구성원들이다.
“……저자는 왜 맞고 있는 거지?”
“태산이! 왔다!”
마침내 한자리에 모인 화룡각 남만원정대에게, 나는 짧지만 강렬한 훈시를 남기고 돌아섰다.
“자자, 이 새끼만 마저 패고 출발합시다.”
반발은 없었다.
지금의 나는 S급 헌터 진태경이 아니라, 정파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인 열화신룡이자 저들의 직속 상관인 화룡각주 진태경이니까.
뻐억!
“억! 어어억!”
난 무림이 참 좋다. 물론 개 같은 암천은 빼고.
* * *
그곳은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칠흑(漆黑)의 공간이었다.
어떤 소리도,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 죽은 듯이 엎드린 인영(人影)들이 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천상천하(天上天下)!”
“만마앙복(萬魔仰服)!”
하나의 목소리로 터져 나온 벼락같은 외침과 함께, 어둠 속에서 검붉은 불꽃이 솟구쳤다.
화아아악!
거세게 타오른 불의 고리.
틀림없는 불꽃임에도 불구하고, 뼈마디에 사무칠 만한 한기를 뿜어내는 불길 너머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 오랜만이구나.
사내인지, 여인인지. 혹은 젊은이인지, 늙은이인지. 그도 아니라면 그 목소리가 낮은지 높은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것은 실로 기이한 음성이었고, 큰 울림을 낳으며 사방에서 울려 퍼져 바닥에 엎드리고 있던 인영들을 옥죄었다.
– 나의 종들아.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미증유의 거력(巨力) 앞에 모두가 몸을 떨었다.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혹은 자신들이 모시는 존재를 마주했다는 감격과 환희로.
그렇기에 그들은 한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이 어리석고 미천한 종들이, 위대하신 천주(天主)를 배알하옵니다!”
천주. 하늘의 주인.
그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그것밖에는 없었다.
누구보다 존엄하고 위대한 절대자. 구름 위 하늘은 그의 궁전이며, 하늘 아래 땅에 살아가는 모든 하찮은 것들은 천주의 종이요, 백성이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 얼마나 흘렀는가.
살아 있는 신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자리에 엎드린 이들은 감히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헌신적이며, 충성스러운 천주의 종복들이었으니까.
바닥 깊숙이 엎드려 있던 한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하신 천주께서 마지막으로 깨어나신 그날로부터, 꼭 일백하고도 삼십육 일이 흘렀사옵니다!”
청년의 힘찬 대답에, 거세게 타오르던 불길이 일렁였다.
– 그래. 떠오르는구나. 서천(西天). 그 아이가 떠난 날이었지.
“망극하옵니다!”
청년을 필두로 다시 한번 거대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처음과는 달리 부끄러움과 자책이 실린 외침이었다.
서천마군과 그가 이끌던 암천의 일군(一群)이 사천당가에서 전멸했을 때, 그들은 그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했고 깊이 잠들어 있던 주인을 깨워야 했다.
“위대하신 천주시여.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청년의 악문 잇새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다시 한번 불길이 흔들렸다.
– 아니다. 부족한 너희를 믿은 내 과오일 뿐.
“……!”
– 혈주(血主). 부족한 것은 너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그 어떤 것보다 뼈아픈 질책에 청년, 혈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이 숭배해 마지않는 주인이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남.’
정파 무림이 소림혈사(少林血史)라 명명한 그 날은, 혈주의 인생에 있어 가장 뼈아픈 기억 중 하나였다.
계획되었던 것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한 성과를 이루었을뿐더러, 팔 한쪽을 놓고 오는 치욕까지 겪어야 했으니까.
만약 소림의 신물인 녹옥불장마저 가져오지 못했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검성. 그리고 진태경.’
산 채로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두 놈을 떠올리자 살심(殺心)이 절로 일어난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종복은 주인의 앞에서 삿된 감정을 보여선 안 되는 법. 혈주는 솟구치는 살심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부,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후우웅.
대답 대신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혈주를 비롯한 모두가 더더욱 몸을 움츠린 그때. 나직한 음성이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부족한 것은 채우면 그만.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람이 멎고 살아 있는 것들이 숨을 죽였다.
모든 것이 멈춘 공간 속에서 천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부족한 너희를, 내가 채워 주리니.
그것은 명령이었고,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다.
솨아아아아.
어둠이, 그림자가 일렁였다.
보이지 않는 어디에선가 흘러나온 막대한 기운이 몸에 깃드는 것을 깨달은 혈주가 환희로 눈을 부릅떴다.
“처, 천주시여!”
혈주는, 모두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자신들이 모시는 주인이야말로 살아 있는 신이자 하늘과 땅 전체를 아우르는 절대자임을.
그리고 주인께서 친히 나누어 주신 이 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 남천(南天)과 북천(北天)에게 전하라.
구구구구궁!
땅이, 세상이 뒤흔들렸다.
모든 것을 일그러트리는 그 미증유의 기운 너머로 천둥 같은 울림이 터져나왔다.
– 이제…… 대전(大戰)을 시작한다.
천상천하. 만마앙복.
환희와 광기에 가득 찬 충복들의 부르짖음 속에서, 보이지 않는 그림자는 손을 내저었다.
칠흑 같은 공간을 물들이던 검붉은 불길이 사라지고, 또다시 어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