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16
#615화
정식 명칭인 운남성(雲南省). 중원에서는 흔히들 남만(南蠻)이라 부르는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푸르륵, 푸륵.
말의 숨결이 거칠다.
대별산을 떠나 쉴새 없이 말을 달린 지 장장 네 시진.
주화란이 수급해 온 준마를 타고 호북에 진입한 우리는, 이를 모를 협곡에서 잠시 말고삐를 늦췄다.
“단순히 이렇게만 이동한다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거예요. 각주님께서도 사천(四川)에 가 보신 적이 있으니 알고 계시겠죠?”
“저요?”
알지, 당연히 알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종아리에 알이 배기는데.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묻는 주화란을 향해,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진짜 조옷…….”
“네?”
“조옷금 힘들었습니다. 조금이요.”
순간 뭐 빠질 뻔했다고 대답하려던 걸 겨우 참았다.
나 진태경, 동성에게는 한없이 냉혹하지만, 이성에게는 젠틀하면서도 따뜻한 남자다.
물론 지금까지 살면서 연애는 한 번도 못 해 봤지만.
“그때는 경신법을 발휘했는데도 보름 가까이 걸리더라고요.”
“사천까지만 해도 삼천 리가 훌쩍 넘는 거리예요. 더군다나 지름길 없이 이동하셨을 걸 생각하면 대단하시네요.”
칭찬을 해 주니 기분이 좋기야 한데, 단순히 칭찬을 받기 위해서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 눈짓에 싱긋 웃은 주화란이 품에서 낡은 가죽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저게 뭐지?’
내가 의문을 느낀 그때, 말안장에 앉아 유엽도(柳葉刀)의 날을 살펴보고 있던 송일섬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가죽으로 만들었군. 혹시 마방(馬幇)의 물건이오?”
주화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시는군요. 맞아요, 정확히는 그들이 사용하던 지도죠.”
“허, 마방의 지도는 만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귀물(貴物)이라 들었는데.”
“용봉표국의 소국주로서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에 재물로 구하지 못할 물건은 없어요. 하지만 제 조부께서는 금보다 더 귀중한 우정을 얻으셨죠. 그 증표로 이 지도를 선물 받았고요.”
음. 그렇군.
……사실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주화란의 조부인 표왕 주공산이 마방이란 곳의 인물에게 대단한 지도를 선물 받았다는 것 빼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 주 소저. 죄송한데 마방이 도대체 뭡니까?”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들이다.”
“수백 년 전부터 고대 교역로를 오가며 새외와 중원의 문물을 실어나르던 자들이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숫자가 많이 줄었지만.”
“…….”
아니, 뭐. 일단 마방이 뭔지는 이해는 했는데.
분명 나는 주화란에게 물어본 것 같은데, 대답은 왜 시커먼 사내 두 놈이 하는지 모르겠다.
거의 동시에 입을 연 송일섬과 사마표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보기보다 제법 견식이 있군.”
“보기보다? 내가 속한 흑룡마문(黑龍魔門)이 어디에 있는지 잊었나? 지금도 본문이 자리 잡은 감숙성에서는 마방들이 활동하고 있어.”
“활동? 쥐어짜 내는 것이 아니라?”
송일섬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흑룡마문이 교역로를 틀어쥐고 막대한 통행세를 거두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
“낭인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본문에 안 좋은 인연이라도 있나?”
“딱히. 그냥 사마외도가 눈에 보이면 죽이고 싶을 뿐이야.”
“어느 부분에 관해서는 나와 생각이 비슷하군. 난 검부터 들이미는 놈을 만나면 참을 수가 없거든. 그래서 무기 손질은 끝났나?”
“아직. 하지만 어차피 곧 피를 묻히게 될 테니 나중에 해도 상관없어.”
“그럼 잠시 자리를 옮기지.”
아니, 이야기 전개가 왜 이렇게 되는 건데.
사이좋게 말머리를 돌리는 두 놈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옮기긴 뭘 옮겨. 이 미친놈들아.”
송일섬과 사마표가 동시에 대답했다.
“개인적인 일이니 끼어들지 마라.”
“어차피 말도 쉬게 해야 하니 차나 한잔하고 있게. 금방 끝내고 돌아오지.”
“…….”
한 놈은 개인주의자고, 한 놈은 관운장이네.
야심 차게 출범한 남만원정대가 초장부터 균열의 징조를 보이자, 화룡각의 각주로서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
쉭!
순간 울려 퍼진 두 줄기의 파공성.
내가 쏘아 보낸 지풍(指風)을 피해 지상으로 착지한 송일섬과 사마표가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으려던 그때, 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경고를 건넸다.
“그거 뽑으면 후회할 텐데.”
“……!”
“……!”
말로만 건넨 경고가 아니다.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막대한 기파(氣波)를 느낀 두 녀석의 움직임이 우뚝 멈춘다.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떠올라 있었다.
‘강하다.’
나를 향한 녀석들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감숙성의 패자인 흑룡마문의 소문주이자 사파 제일의 후기지수라는 흑룡도(黑龍刀) 사파표도, 치열한 전장과 생사결에서 숱한 적들을 쓰러트리며 전설이 된 추혼객(抽魂客) 송일섬도 똑똑히 깨달았을 것이다.
아니, 이건 그들이 결코 어쭙잖은 절정 고수가 아니기에 더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사람이 보다 멀리,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니까.
‘예전에도 내가 두 수는 위였지만, 지금 느끼는 압박감은 더하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깨어난 직후의 나는 잠들기 전보다 강해져 있었다.
현대의 헌터들을 위한 보급형 무공을 정립하고 창안하는 과정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단한 무공을 만든 것은 아니라서 진일보(進一步)라 표현할 정도는 아니지만…… 반의 반 걸음 정도를 나아간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그 성과를 가장 먼저 실감한 놈들이 암천이 아니라 같은 편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고.
“앞으로 남은 길이 수천 리다. 그래도 싸울 거라면 지금 당장 한 놈이 죽을 때까지 싸우든가. 그것도 아니면…….”
“각주님.”
나는 분명 주화란에게 호의를 품고 있지만, 지금은 그녀의 말을 들을 때가 아니다.
굳을 얼굴로 말을 건넨 주화란에게 작게 고개를 내저은 나는 말을 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둘이 합심해서 나한테 덤벼. 지금 아니면 앞으로도 기회 없다.”
“…….”
“…….”
입을 꾹 다문 채 서로를 응시하던 송일섬과 사마표가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르릉. 철컥.
서늘한 마찰음과 함께, 미세하게 드러나 있던 두 개의 도신(刀身)이 모습을 감췄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안장에 오른 두 사람을 바라본 주화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랐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 녀석들을 화룡각에 받아들이기 전, 한 차례 심사숙고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감정이 좋지는 않겠지. 특히 송일섬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수십여 년 전, 정과 마가 천하를 양분하여 결전을 벌일 무렵부터 시작된 악연이었다.
주씨 성을 쓰는 젊고 담대한 표사는 어느 여인의 의뢰를 받아 만리표(萬里漂)라는 전설을 새로 썼고, 그 여인이 낳은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나 한 사내아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사내아이가 바로 송일섬이었다. 사마외도에 의해 멸문당한 광동진가의 마지막 후예.
그가 부처나 예수가 아닌 이상, 사파에 대한 혐오를 가진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이렇게 빨리 터질 줄은 몰랐지만.’
시바, 기세 좋게 출발한 지 몇 시진이나 됐다고 벌써 파토 조짐이냐. 대학생들이 조별 과제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
무림 최단 시간 앙숙이 된 두 놈을 논외로 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조장님, 아까 배를 맞아서 그런지 자꾸 똥이 마려워요.”
“주군. 싸우지 마라. 태산이. 주군 위험해지면 걱정되고 배고프다.”
“…….”
라인업 봐라. 시벌 거.
몸보다 위장이 활발한 혁무진과, 위장 대신 인벤토리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되는 호거아(虎巨兒) 태산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깜깜해진다.
하지만 이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은 있었다.
“주 소저.”
“네?”
“감사합니다. 저는 주 소저가 있어서 정말 기뻐요.”
진심이다. 미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가장 정상인이 아닌가.
다른 조원들에 비해 무공이 조금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림 견문도 넓은 데다 길도 척척 잘 찾아낸다.
지금도 마방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알려져 있다는 지름길을 찾아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대답이 없지?
“주 소저?”
“…….”
“저기요? 주 소저?”
재차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없이 말고삐를 쥔 주화란이 고개를 돌린 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 이쪽으로 길을 잡으면 될 거예요.”
“예? 아니, 참 잘하신 건 맞는데. 제 말은…….”
“그럼 전 먼저 가서 마방들의 표식을 살펴보고 있을게요. 이럇!”
“어어. 어어어?”
뭐라 더 말해 볼 시간도 없었다. 말과 한 몸이 되어 다급히 달려 나가는 주화란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따끔거리는 뒤통수를 느끼고 돌아섰다.
‘……이것들은 또 왜 이래.’
송일섬. 사마표. 혁무진. 심지어는 태산까지.
정확히 네 쌍의 시선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춘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중이었다.
도무지 뜻을 짐작할 수 없는 오묘한 눈빛들에, 반사적으로 흠칫한 내가 물었다.
“뭐야. 왜 다들 그렇게 쳐다봐?”
“음. 아무것도 아니다.”
“먼저 가 보지. 각주.”
송일섬과 사마표는 복잡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고. 혁무진과 태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 그냥 봤습니다. 똥 마려워서.”
“……똥이 마려운데 왜 날 봐.”
“조장님을 보고 있으면 나오려던 것도 다시 돌아갑니다.”
“태산이. 그냥 배고파서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뜻 없다.”
“……도대체 배고픈 거랑 나랑 뭔 상관인데.”
“아니다. 그냥. 그냥. 음. 태산이. 감 잡았다. 이제 좀 알았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혁무진까지는 그렇다 쳐도 저 떡대 큰 식충이가 나를 짠하게 바라보는 건 더럽게 찝찝하다.
하지만 내가 뭐라 추궁하기도 전에, 태산은 반쯤 죽어 가는 준마의 엉덩이를 후려치며 달려나갔다.
“태산이! 간다! 말도 함께 간다!”
안 그래도 이미 반쯤 골로 간 준마가 비틀비틀 달려 나가자, 혁무진이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거기, 거 같이 좀 갑시다!”
“싫다! 따라오지 마라! 태산이는 앞만 보고 달린다!”
“나 육포 있어요.”
“태산이! 친구 만났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다!”
미친놈들…….
하지만 저 미친놈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똥 씹은 표정으로 말고삐를 쥐었다.
“야. 우리도 가자.”
푸르륵,
“…….”
이제는 말 새끼마저 띠꺼운 표정을 짓는구나.
나는 콧김을 뿜어내는 말의 머리통을 한 대 친 뒤 옆구리를 바짝 조였다.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준마가 협곡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