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18
#617화
촤아아악!
물가를 향해 빠르게 접근하는 십여 척의 쾌조선은 맹인이 아닌 이상 누구나 볼 수 있었다.
하물며 경지에 접어든 무림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수룡채(水龍寨)라…….”
경신법을 발휘하여 단숨에 달려온 사마표가 중얼거렸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쾌조선의 깃발을 응시하던 그는 이번엔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잠시 기다리라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맞아.”
“사천은 험지(險地)로 가득한 땅이니 장강을 타고 내려간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욱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겠지. 하지만 상대가 장강수로맹이라는 것이 마음에 좀 걸리는군.”
사마표가 언뜻 비치는 불신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장강수로맹은 기본적으로 약탈을 업으로 삼는 수적 집단이다.
게다가 맹주인 해상왕(海上王) 파륜은 일신의 무력과는 별개로 상당히 음흉한 인물이라는 평이 세간에선 지배적이었다.
‘무림맹 결성 당시에도 모종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고.’
병환 때문인지, 아니면 거리 때문인지 모른다.
그저 사자를 보내 입맹(入盟)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공식 발표한 것이 전부다. 물론 이는 녹림맹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두 세력은 정파보다는 사파 쪽에 가까웠고, 사파보다는 자신들만의 강력한 영역을 구축한 약탈자로 보는 것이 옳았다.
“파륜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자라고 들었다. 하남에서도 암암리에 그와 관련된 소문이 돌고 있어.”
“때가 되면 암천에 붙어먹을 인간이다, 뭐 그런 거?”
“들어 본 모양이군.”
“내 귀는 장식이냐? 그리고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사마표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하는 세간의 평대로라면 장강수로맹이나, 흑룡마문이나 거기서 거기야.”
“……!”
“맞아. 틀려?”
잠깐 침묵하던 사마표가 떫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다.”
“맞는 것 같은 게 아니라 맞지, 인마.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오히려 흑룡마문이 더 안 좋을걸. 쟤들은 그나마 정파 사파 안 가리고 훔치지만, 너희는 빼도 박도 못하고 사파잖아.”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그만해라. 듣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지는군.”
사마표의 주위를 대형견처럼 어슬렁거리던 태산이 말을 받았다.
“주군. 태산이도 배고파서 정신이 혼미하다.”
“…….”
아, 보고 있자니 나까지 정신이 혼미해지려고 하네.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저 수적들은 믿을 수 있으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라.”
“믿을 만한 수적이라. 무공을 익히지 않은 무림인과 같은 말이군.”
“말하자면 긴데, 아무튼 나름대로 끈끈한 인연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나는 해상왕 파륜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를 향한 세간의 평이 사실이라 해도, 선화아(船火兒) 무송에 대한 생각만큼은 달라지진 않을 거다.
적어도 내가 보고 겪은 무송은 신의가 있고 정도를 지키는 인물이었으니까.
꼭 제자가 스승을 닮으라는 법은 없지 않나.
‘사천에 도착해서 연통을 넣자마자 이렇게 달려온 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강가에 도착한 쾌조선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쏟아져 내렸다.
촤아악!
장강에서 도가 튼 수적답게 거친 기세와 움직임에 강물이 사방으로 튄다.
헐렁한 장삼 사이로 구릿빛 근육을 드러낸 그들은 나는 듯한 걸음으로 달려와 포권을 취했다.
“진 대협!”
“연통을 받고 부리나케 온 길입니다.”
이들은 수룡채 내에서도 조장급 이상인 무송의 수족들이다.
지난번 사천에 왔을 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보던 얼굴들이었지만, 정작 가장 익숙한 얼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들 아는 얼굴들이구만. 그런데 무송 선배가 안 보이네?”
내 물음에 부채주가 즉각 대답했다.
“그,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이틀 전 총단(總團)으로 떠나셨습니다요.”
“총단이라면…… 장강수로맹의?”
“예, 맹주님의 명이라 조금도 지체하면 안 되는지라.”
“그래요?”
장강수로맹 내에서 해상왕의 명령은 절대적. 그의 직계 제자인 선화아 무송이 소집에 불응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약간의 아쉬움과 고마움이 담긴 눈빛으로 수적들을 바라봤다.
“그래도 이 와중에 용케 바로 와 주셨네. 무송 선배도 자리에 안 계신데.”
화들짝 놀란 부채주가 손을 내저었다.
“어이구. 그런 말씀 마십시오. 채주께서도 선견지명이 있으신지, 진 대협에 관해 아주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습니다요.”
“나에 관해서?”
“예. 사람이 신세를 졌으면 꼭 갚아야 한다고. 작고하신 장강일도(長江一刀) 황 대협에 관한 일도 있고 하니, 혹시 태원진가나 진 대협께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손 닿는 데까지 힘쓰라고 하셨습죠.”
“오. 역시 무송 선배가 신의를 알아. 아주 협객이야, 협객.”
봤지, 인마.
내가 흐뭇하게 웃으며 사마표에게 눈짓하던 그때. 옆에 있던 덩치 큰 수적 하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부채주에게 속삭였다.
“저기, 부채주님.”
“응?”
“안 도와주면 지랄할 거 뻔하니까, 괜히 멀쩡한 쾌조선 부숴 먹지 말고 원하는 거 다해 주라는 말도 하시지 않았습니까요?”
“앗. 아아. 장필 네 이놈!”
“…….”
“…….”
순간 내려앉은 침묵.
수적들은 둘째치고 자랑스러운 우리 화룡각 대원들의 시선이 따갑기 그지없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사방에서 주화란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셨길래 수적들까지…….”
폐부를 쑤시고 들어온 한 마디.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끝없이 펼쳐진 장강을 바라보았다.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이것저것 땡깡 부리고 콜택시처럼 이용한 건 사실이라 뭐라 할 말이 없다.
“어떻게 보면 사파보다 더 하군.”
기어코 종지부를 찍는 사마표의 독백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슬픈 눈동자로 부채주를 바라보았다.
“출발이나 합시다.”
“예, 옙.”
“그리고 부채주는 이따가 나 좀 따라와요. 저 장필이라는 친구도 같이.”
“…….”
잠시 공포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부채주가 먹먹한 음성으로 외쳤다.
“닻을. 닻을 올려라!”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다고 느낀 건 분명 기분 탓이다.
* * *
쏴아아아!
뱃머리가 신속하고도 힘차게 강물을 가른다.
어느덧 봄에 접어든 바람은 순풍(順風)이었고, 다년간의 약탈로 숙련된 수적들의 노질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물론 이들이 무송에 의해 교화된, 제법 착한 수적이라 해도, 특유의 본능은 여전했다.
“남동쪽에 선박 다섯 척 출현!”
“오, 부채주님. 상당한 규모의 상선(商船)입니다!”
“상선? 그럼 털어야지!”
이 와중에 털긴 뭘 털어. 이 미친놈들아.
나를 비롯한 모두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그 상황을 지켜볼 때, 부채주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 얼빠진 놈들! 귀한 객들이 계시는데 이게 무슨 짓들이냐! 네놈들은 기본적인 예의도 없단 말이더냐!”
“죄, 죄송합니다.”
수적 주제에 하는 말만 들어 보면 판관 포청천이 따로 없다.
준엄하게 수하들을 꾸짖은 부채주가 우리에게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못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요.”
“껄걸. 뭐 이런 것 가지고.”
나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해합니다. 뭐 본업이 그쪽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대신 금방 털고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응?”
“길어 봤자 반 시진이면 충분합니다요. 적당히 쓱싹하고 보내면…….”
“엎드려.”
약간의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몇 번 부채주가 엎드려 뻗친 이후에는 그마저도 사라졌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도 쾌조선은 순풍을 받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선상에 머무르게 된 화룡각 대원들은 각자의 할 일에 집중했다.
쉬쉭! 후우웅!
사마표와 송일섬은 첫날 이후 아무런 충돌 없이 자신만의 무공 수련에 몰두했고.
“태산이. 회 좋아한다. 그런데 물고기가 안 잡힌다. 한 마리만 줘라.”
“이 양반 이거 양심이 없네. 고생고생해서 기껏 몇 마리 잡아 놨더니 그걸 달래? 조장님, 이 인간이 자꾸 성가시게 구는데 좀 떼어 주시면 안 됩니까?”
“지금까지 잡은 물고기 다 내놔. 당연하겠지만 회까지 떠서.”
“태산이. 감탄했다. 각주는 천재인가?”
“…….”
혁무진과 태산은 대부분 뱃머리에서 낚시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허탕을 치는 날이 허다했고, 혁무진은 그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뺏기곤 했지만 별다른 불평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녀석이 그러는 이유가 체념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낚시하는 것조차 물고기를 잡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고.’
혁무진이 낚시를 하는 것은 그렇게라도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였다.
녀석은 눈앞에서 찌가 흔들려도 굳이 낚싯대를 잡아채지 않았고, 밤마다 선실에 틀어박혀 무공을 수련하거나 운기조식에 몰두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시각각 운남(雲南)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혹시 모를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퀘스트 창 오픈.’
띠링.
퀘스트
[남만행(南蠻行)]무림 맹주 매종학이 화룡각에 첫 번째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남만으로 향하여 혹시 모를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당신과 화룡각의 앞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상황.
늘 주위를 경계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행동하십시오.
등급 : 절정
제한 : 진태경 및 화룡각 인원
임무 : 남만 진입 (미완료)
보상 : 연계 퀘스트
???
실패 : 칭호, [남만을 못 가] 획득
명성 및 신뢰도 대폭 하락
무림에서의 시간으로는 약 보름 전. 현대까지 합친다면 한 달도 전에 받았던 퀘스트다.
내가 놓친 부분이 있나 퀘스트 창을 찬찬히 다시 살펴보던 그때,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희미한 꽃향기가 섞여들었다.
“왜 그렇게 유심히 허공을 보고 계세요?”
주화란이다.
홀로그램 창을 닫은 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응시했다.
“천기(天氣)를 읽고 있었습니다.”
“아하. 정말요?”
“네, 정말로.”
“대단하시네요.”
피식 웃은 주화란이 물었다.
“그래서, 하늘이 뭐라 알려 주던가요?”
“오늘 날씨 좋다는데요.”
“그래요?”
“네. 주 소저, 저기 북두칠성 보이시죠?”
내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 주화란이 눈을 깜빡였다.
“어. 음.”
“왜요?”
“각주님. 죄송하지만 저건 북두칠성이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사이에 모양이 바뀌었나?”
“네?”
이게 말이야, 방구야.
뱉어 놓고도 아차 싶었다. 순간 당황해서 턱만 긁적이는 내 모습에 주화란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재미있는 방법으로 천기를 읽으시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천기 같은 거 잘 모릅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상황 봐 가면서 하는 거지.”
“알아요. 그래도 더 듣고는 싶어지네요. 때마침 개인적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되나요?”
입맛을 다신 내가 대답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는 천기 같은 거 볼 줄 모르는데요.”
“저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알아요. 그리고 이건 하늘이 아니라 각주님께 여쭤보고 싶은 거예요.”
“그렇다면 상관없습니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뭐든.”
타닥.
사뿐하게 뱃머리로 뛰어오른 주화란이 시커먼 강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우리.”
남만이 코앞까지 다가오니 주화란도 불안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안심시켜 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암천이 일을 꾸미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을 수도 있죠.”
남만은 새외(塞外)로 분류될 만큼 외진 곳.
게다가 남만의 패자라 할 수 있는 남만야수궁과 묘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광활한 땅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느낀 불길한 짐작이 모두 사실이었고 암천이 남만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면, 숱한 위험이 나와 화룡각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이것 하나만큼은 약속드립니다.”
주화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잠시, 아니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주 소저?”
“……음. 그렇군요.”
침묵 끝에 흘러나온 짧은 음성.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주화란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인피면구로도 감추지 못한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강물처럼 출렁인다.
“믿을게요, 각주님을.”
“……?”
석연치 않은 기분이다. 혹시 내 대답이 잘못되었나, 잠시 스스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횃불을 든 부채주가 나타나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 대협. 도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