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23
#622화
순수하게 무림에서 보낸 시간만 따져도 어언 1년이 훌쩍 넘었다.
뜻하지 않게 여러 사건에 얽히다 보니 산서성을 벗어나 타지를 전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숱한 인간 군상과 그들이 속한 문파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어떤 거대 문파라 해도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허.”
“미친…….”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산봉우리에서 봤을 때도 엄청난 면적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운무(雲霧)가 사라지고 목적지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내 입도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아니, 이게 문파라고?’
두 가지 의미로 놀라웠다.
첫 번째 놀라움은 앞서 말했듯이 그 광활함에서 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남만야수궁(南蠻野獸宮)
광활한 면적을 둘러싼 울타리와 누군가 엉성한 글씨체로 휘갈겨 쓴 목판 때문이었다.
높고 단단한 성벽이나 철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울타리다. 울타리.
‘……아니. 이게 문파라고?’
같은 생각. 다른 의미.
심지어 울타리가 멀쩡한 것도 아니다.
반쯤 허물어진 울타리를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남호를 향해 물었다.
“남 노인, 설마 여기가 진짜…….”
“남만야수궁이 맞냐고?”
“아, 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 글 읽을 줄은 아나?”
“당연하죠.”
“그럼 저 글씨 좀 읽어 보게. 아니, 내가 대신 읽어 주는 게 낫겠군.”
남호가 엉성한 글씨로 적힌 표지만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남. 만. 야. 수. 궁.”
“…….”
“적힌 그대로일세. 이곳부터가 남만야수궁이야.”
알긴 안다. 머릿속에 예상했던 그림을 아득히 벗어나서 문제지.
위에서 언뜻 봤을 때는 엄청 거대한 건축물이 있나 보다, 싶었는데 막상 안개를 벗어나 가까운 곳에서 목격하니 이건 숫제 허허벌판이 아닌가.
“조장님, 남만야수궁이 아니라 그냥 남만목장 아닙니까? 사방에 울타리만 쳐져 있고.”
주위를 둘러보던 주화란도 혁무진의 떨떠름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남만야수궁은 처음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궁이라고 부르기에는 손색이 있긴 하네요.”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송일섬과 사마표도 한마디씩 보탰다.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 있구려.”
“혁무진의 말대로 사람이 안 보인다는 점이 걸리는군. 그렇다고 다른 전각이나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으냐, 태산?”
“주군. 태산이 배고프다. 저 버섯 먹어도 되나?”
사마표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그럼 소는? 저기 걸어가는 소가 맛있어 보인다.”
“흑룡마문의 소문주라고 했나? 이건 부탁인데, 저 금수만도 못한 놈 주둥이 좀 틀어막게. 한 번 더 들으면 복장 터져서 죽을 것 같으니까.”
“……알겠소.”
“하나 더.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풀과 짐승들은 남만야수궁의 것일세. 부디 잊지 말라고. 터지기 직전의 내 복장도.”
부쩍 늙은 얼굴로 사마표에게 엄중한 경고를 날린 남호가, 광활한 대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들의 생각은 충분히 이해하네만, 나는 이곳이 남만야수궁이라고 한 적은 없네.”
“예? 아까 분명 그러셨는데요.”
“아닐세.”
“아, 혹시 노망나셨습니까?”
“…….”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확실하다. 나는 측은지심을 담아 남호를 바라보았다.
“저런.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저와 가까운 지인 중에도 노환으로 고생하셨던 분이 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나으셨거든요.”
“먼저 세 가지를 말하고 싶군. 첫째, 난 노환이 아닐세. 둘째. 이건 듣는 와중에 살짝 궁금해져서 묻는 건데, 자네 지인이라는 그분은 어떻게 노환을 이겨 낸 건가?”
“반로환동이요.”
“……그거 아주 좋은 방법이로군. 내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여든 살 노인이라는 것만 빼면.”
“원래 인생은 여든부터 아닙니까.”
“자네 인생을 여기에서 끝내고 싶지만, 힘이 없으니 참겠네.”
솟구치는 울화를 삭힌 남호가 말을 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앞서 했던 말과 동일하네. 나는 이곳이 남만야수궁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어. ‘이곳부터’ 남만야수궁이라고 했지.”
“아.”
비슷하지만 의미는 확실히 다르다.
이제야 남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내가 되물었다.
“그럼?”
“맞네. 이곳은 남만야수궁의 지배하에 놓인 땅 중 하나일세. 남만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궁주가 직접 다스리는 직할지(直轄地)라고 하면 더 이해하기 쉽겠군.”
“황제가 천하 곳곳에 번왕(藩王)이나 성주를 두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군요. 이곳은 한 나라의 수도인 셈이고.”
“정확하네. 물론 궁주의 권위가 천자에 미치지 못하고, 남만에 존재하는 여러 부족장의 권위는 성주 이상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남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화란이 나직한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조부님께서 남긴 기록에서 그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어요. 남만은 하나의 왕국이며, 남만야수궁은 다섯 개의 현읍을 아우르는 거대한 목장과 같다고.”
“표왕의 손녀답군. 하지만 그 주공산 대협도 이 울타리 너머까지 도달한 적은 없다네. 이민족이 아닌 이들은 출입할 수 없거든.”
“그 정도입니까?”
“그 정도일세.”
남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폐쇄성으로는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문파인 사천당가도 남만야수궁에는 한 수 접어줘야 한다.
혀를 내두른 나는 끝없이 늘어선 울타리와 목초지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희는 들어가야 하잖습니까.”
“그렇지.”
“다른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혹시 남 노인께서는 이민족이니까 출입이 가능…….”
“외지인의 출입이 불가능하다고 했지, 이민족이라고 해서 출입이 쉽다고 한 기억은 없네만.”
“아.”
“이곳에서 나는 그저 힘없고 평범한 묘족 늙은이일 뿐일세. 만약 암천이 천하에 마수를 뻗지 않았고, 자네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조용히 생을 마감했을…… 호로 새끼!”
남호의 갑작스러운 호통에 깜짝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남 노인. 왜 자책을 하세요.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고 호로 새끼라니.”
“나 말고! 저 새끼! 저 시벌 호로 새끼 붙잡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남호의 외침에 고개를 돌린 우리는, 울타리를 넘어 엉금엉금 기어가는 커다란 궁둥이를 볼 수 있었다.
그 앞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누런 송아지 한 마리도.
“어. 어어?”
“저놈, 설마.”
“저 새끼 언제 저기까지 갔어!”
“태 소협!”
“태산아!”
사람들의 목소리에 이어, 마지막으로 울려 퍼진 사마표의 부르짖음에 태산이 움찔한 그 순간.
음머?
이상함을 알아차린 송아지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가까워진 태산의 모습에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에 느낌표가 떠올랐고, 동시에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발굽이 풀을 밟았다.
타다닥!
빠른 상황 판단과 도주 시도. 그러나 송아지보다 태산이 한발 빨랐다.
“소고기! 거기 딱 서라!”
굳은 의지가 담긴 외침과 함께 태산의 거대한 덩치가 허공을 날았다.
호랑이나 표범 같은 맹수도 아니고, 덜 자란 송아지가 어떻게 작정하고 움직인 절정 고수를 피하겠나.
쿵,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밑에 깔린 송아지가 비명을 질렀다.
음머어어어!
듣기만 해도 눈시울이 축축해지는 애달픈 울음소리였지만, 연이은 강행군과 적량 배식으로 뱃가죽이 뒤집힌 태산에게는 입가가 축축해질 만한 소리였다.
“태산이! 소고기!”
“당장 저 새끼 붙잡아!”
남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 이미 울타리를 넘어 쇄도한 내 신형은 태산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덥석.
“놔라! 소고기 육회!”
“그만해.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미친놈아. 워낭소리도 못 봤어?”
“못 봤다!”
“……아.”
그건 그렇겠네.
순간 납득이 되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단번에 태산의 뒷덜미를 잡아챈 나는 적당히 힘을 주어 뒤로 당겼다.
산만 한 덩치가 뒤로 나동그라지자 겨우 살아난 소고기. 아니, 송아지가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사정없이 뒤집히는 풀과 일어나는 먼지.
꽁무니가 빠져라 목초리를 벗어나는 송아지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태산이 구슬프게 중얼거렸다.
“안 된다. 태산이 우둔살…….”
이 새끼는 고향이 무슨 마장동인가.
내가 녀석의 출신 성분을 의심하고 있던 그때, 남호가 불같은 외침과 함께 길길이 날뛰었다.
“노옴!”
“남 노인. 진정하세요,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남만야수궁의 영역에서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라고 그토록 신신당부했거늘! 이 덩치 큰 식충이 새끼가 어른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사고를 쳐?”
황급히 달려온 사마표가 남호와 태산 사이를 가로막았다.
“미안하오, 남 노인.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그만…… 태산이 네 이 녀석, 당장 사과드리지 못하겠느냐.”
태산이 남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태산이. 배고프다.”
“저 씨벌놈이. 당장 이 손 놓게. 놔. 안 놔? 내가 이 꼴 보려고 남만에서 오십 년 넘게 모기 물려 가며 기다린 줄 알아?”
역시 인생은 여든부터가 확실하다. 무공도 안 익혔으면서 적천강도 한 수 접어들 정도의 기세를 뿜어내는 남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활화산처럼 날뛰던 늙은 은영각 요원이 진정한 것은 그로부터 일각이 흐른 뒤였다.
“후. 이제 괜찮아졌으니 손 놓게.”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잠깐 사이에 오장육부가 한 바퀴 뒤집히긴 했는데,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닐세.”
180도 돌았다면 문제가 있지만 360도는 인정이지.
고개를 끄덕인 내 눈짓에 혁무진이 손을 놓자, 남호가 임종을 앞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나마 아무 일도 없었으니 다행이지. 남만야수궁의 인물이 그 꼴을 봤었다면 초장부터 일이 어긋났을 게야.”
중원의 다른 문파였다면 소 한 마리 정도쯤이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결국 문화와 사람의 차이다.
초원의 유목민들이 말을 목숨처럼 아끼는 것처럼, 부족 간의 불화와 경계가 확실한 이곳에서는 가축이 큰 재산이었다.
‘이름부터가 남만야수궁인데, 뭐.’
척 들어도 동물 친화적인 냄새가 솔솔 풍기지 않나.
괜히 남호가 처음부터 아무거나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게 아니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어떻게 합니까? 사람 나타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허락 없이 남만야수궁의 영역을 침범했다가는 분란이 일어날 걸세. 그렇다면 응당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혁무진의 물음에 대답한 남호가 봇짐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게 뭡니까?”
“비상시에 사용하는 신호용 폭죽일세. 이게 터진다면 최소한 누군가 나와보기라도 하겠지.”
남호가 자신 있는 미소와 함께 화섭자로 불씨를 당겼다.
치지직. 빠르게 끝부분으로 타들어 가는 심지.
동시에 커다란 소리와 함께 폭죽이 솟구쳤다.
쐐애애액, 퍼어엉!
문제는, 폭죽에서 솟구친 불꽃이 허공이 아니라 목초지에 떨어졌다는 거다.
“……어?”
“……어어?”
화륵, 콰아아아!
사람들의 얼빠진 음성과 함께 화염에 흽싸인 목초지.
사방으로 도망치는 가축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누가 나와 보긴 하겠네.”
“……이, 이게 아닌데.”
아니긴 개뿔. 좆 됐구만.
그리고 내가 참혹한 마음으로 불타는 목초지를 바라보던 그때였다.
크아아앙!
맹수의 거친 포효와 함께, 불타는 목초지의 언덕 너머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