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26
#625화
사람에게는 기세(氣勢)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품은 기세는 미약하고 흐릿하여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또 다른 누군가의 기세는 강대하고 파도처럼 거칠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한다.
야수묘왕(野獸苗王) 야율척은 후자였다.
스윽.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야율척의 모습은 마치 거산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분명 팔순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신을 갑옷처럼 둘러싼 근육은 탄탄했고, 한 발 한 발 옮기는 걸음은 거침없었으며 반백의 수염은 사자의 갈기처럼 흩날렸다.
저벅, 저벅.
넝쿨로 뒤덮인 계단을 맨발로 짓밟으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이제는 모두가 볼 수 있었다.
야율목과 그의 호위들은 즉각 안장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남만야수궁의 주인에게 바치는 그들만의 예법이었다.
“궁주를 뵙습니다.”
야수묘왕이 야율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또 말도 없이 뛰쳐나갔더구나.”
“북동쪽의 목초지에서 화재가 일어났었습니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터라…….”
“불길은 잡았느냐?”
“예.”
“흉수는?”
분명 야율목을 향한 질문인데, 야수묘왕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거친 안광을 뿜어내는 그의 호목(虎目)을 똑바로 응시하며 앞으로 나섰다.
“흉수라고 하기에는 좀 뭣하고, 실수가 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한인들이로군. 네놈이 화재를 일으킨 흉수냐?”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잘 생각하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남만의 규율은 결코 자비롭지 않으니.”
잠깐 생각하던 내가 물었다.
“혹시 이런 경우에는 처벌이 어떻게 됩니까?”
“피해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심한 경우에는 맹수의 먹잇감이 된다. 독물이 가득한 구덩이에 처넣거나.”
“약한 경우에는요?”
“넝쿨에 목을 매달지.”
“그게 약한 겁니까?”
“물론. 시신은 온전히 보호할 수 있으니.”
“아하.”
고개를 끄덕인 내가 슬쩍 옆으로 비켜서며 한 사람을 소개했다.
“짠. 사실 흉수는 제가 아니라 이분입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황했겠지만 오십 년 경력의 은영각 요원은 확실히 달라도 뭐가 다르다. 남호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미친 새낀가?”
“아니,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이 씨벌 놈이…….”
남호가 본격적으로 쌍욕을 퍼부으려던 그때, 야수묘왕이 거친 음성을 툭 내뱉었다.
“동료를 버리고 살길을 찾겠다는 거군.”
“음.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버린다고는 한 적 없습니다.”
“오해?”
“우선 팩트, 아니지. 사실을 짚고 넘어간 것뿐입니다. 솔직히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라서요. 무림맹 체면도 있고.”
의도적으로 무림맹을 운운했으니 이쯤에서 물러설 만도 한데,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야수묘왕의 안광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남만에 들어온 이상, 남만의 규율을 따라야 하는 법. 이 중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정 그러시다면 뭐…….”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순간.
후웅!
주위의 공기가 사라졌다. 짧고 묵직한 파공성보다 먼저 쏘아진 일권(一拳). 공성추와도 같은 힘이 실린 그것을 향해, 나는 양팔을 교차시켰다.
꽈앙!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격돌의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엄청난 거력에 의하여 일 장을 밀려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야수묘왕이 서릿발 같은 안광을 뿜어내며 물었다.
“무엇을 말이냐?”
“첫인사요.”
“뭐라?”
“남만에 오기 전, 어느 분한테 그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야수묘왕은 겉보기에는 무식하고 앞뒤 안 가릴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정 많고 장난 좋아하는 놈이다. 그러니 적당히 받아 주고 사이좋게 지내라.”
“……!”
“……!”
입을 딱 벌린 화룡각 대원들의 반응은 애교다.
소궁주인 야율목과 호위들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번개 같은 속도로 병장기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행동에 나서기도 전, 내 말에 입꼬리를 씰룩이던 야수묘왕이 폭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크하하하! 적 노(老)께서는 여전하시군.”
나는 얼얼한 팔뚝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뭐, 워낙에 정정하시죠.”
“제자를 들였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일찍 만날 줄이야.”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야수묘왕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반갑구나. 노부는 야율척이라 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상대는 남만야수궁의 주인이기 이전에 적천강의 지인이다.
나는 야수묘왕 야율척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열화문(烈火門)의 십구 대 계승자, 진태경이 야수묘왕 야율척 대협을 뵙습니다.”
“오냐. 으하하하!”
거칠면서도 시원한 웃음을 터트린 야수묘왕이 호의가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터. 따라오너라.”
호쾌한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얼떨떨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에 나를 향한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듯한 그들의 눈빛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우리 스승님이랑 좀 친해.”
역시 인생은 학연, 지연, 혈연이다.
* * *
야수묘왕은 즐거워 보였다. 아니, 즐거운 게 확실했다.
평소에도 제법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건 이미 적천강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남만야수궁 내부의 대전(大殿)에 앉아 옛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덩치 큰 어린아이 같았다.
“적 노를 처음 뵈었던 날이 생각나는군. 나를 보더니 대뜸 화염신장을 날리셨다.”
“……노야. 아니 스승님 말씀으로는 날리진 않고, 날릴 뻔했다고 하셨는데요.”
“아니다. 확실히 맞았어. 숨이 턱 막히고 똥줄이 바싹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지.”
지금까지 만났던 명문 대파의 문주나 가주라면 어느 정도의 체통을 지키기 마련이었는데, 애초에 호피로 만든 바지 하나만 덜렁 걸치고 다니는 야수묘왕은 체통이고 나발이고 신경 안 썼다.
물증으로 옆구리에 찍힌 화염신장의 흔적을 보여 준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덧붙였다.
“아주 강렬한 첫 만남이었지. 두 번 정도 피똥을 싸고 다시 찾아갔더니 상처를 소독하라며 술 한잔을 따라 주셨다. 아주 호쾌하신 분이셨어.”
“……아, 예.”
내가 아는 호쾌함의 뜻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맞은 사람이 괜찮다니 뭐라 할 말이 없다.
굳이 말해 봤자 상대가 적천강이니 누워서 침 뱉기고.
“정마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뵙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렇게 적 노의 제자를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군. 술은 좋아하나?”
“술이야 당연히 좋아하긴 하는데,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술보다 급한 일이 있으니까요.”
세상이 평화로웠다면 나도 기꺼이 한바탕 술판을 벌였을 거다.
야수묘왕이랑 건배도 하고, 야율척이 좋아하는 랜덤 게임을 외치면서 각종 술 게임으로 이민족들을 뿅 가게 만들었겠지.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불가능하다.
“이번에는 스승님의 제자가 아니라, 무림맹의 각주로 온 겁니다.”
내 나직한 목소리에, 야수묘왕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살짝 흐려졌다.
“암천 때문인가?”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에 관한 전서응을 받았다. 중원으로부터 수만 리나 떨어져 있다 보니 전달이 늦었지. 하지만 중원의 사정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야.”
“실례지만 전서응을 받으셨던 때가…….”
“글쎄. 벌써 한 달은 넘은 듯싶군.”
하남과 남만 사이의 거리. 그리고 시기를 생각해 본다면 숭산결의(崇山決意)라 이름 붙여진 무림맹 결성 이전에 보낸 서신이 틀림없다.
숭산결의에는 가급적이면 많은 문파가 참석해야 했고, 은영각주 천면호리는 그 정도도 계산하지 않고 서신을 보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즉…….
“입맹(入盟)을 거절한 거군요. 남만야수궁은.”
답신을 보낼 시간도, 이민족 중 일부를 이끌고 숭산에 올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남만야수궁이 무림맹에 어떠한 답도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라고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내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야수묘왕이 불쑥 입을 열었다.
“완전한 거절은 아니다. 다만 결론을 내지 못했을 뿐이야.”
“결론이라면 궁주님께서…….”
이어지려던 내 목소리는 야수묘왕의 손짓에 가로막혔다.
마치 맹수의 갈기 같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은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적 노의 제자. 아니, 진태경이라고 했지.”
“예.”
“네가 데려온 이들에게 한 가지 묻지. 그대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머뭇거리는 분위기도 잠시. 가장 먼저 야수묘왕과 시선이 마주친 혁무진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야수묘왕 야율척 대협이십니다. 십왕(十王)에 속한 초절정 고수시기도 하고요.”
“맞다. 그 옆에 있는 여인. 그래, 자네는?”
주화란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남만야수궁의 궁주십니다.”
“그 역시 맞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지. 그럼 이번에는 바로 옆에 있는 자네가 말해 보게.”
미처 막을 새도 없이, 퉁방울만 한 눈동자를 껌뻑거린 태산이 대답했다.
“태산이. 배고프다.”
태산이 너란 새끼. 자동 응답기 같은 새끼. 이 시벌 새끼…….
예상했던 것을 아득하게 벗어나는 대답에 야수묘왕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은 누구냐?”
잠깐 생각하던 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희한한 놈이 하나 있군. 그럼 그 옆의 노인장이 대답해 보시게.”
작은 목소리로 태산을 향해 속사포 같은 쌍욕을 퍼붓던 남호가 입을 열었다.
“묘족을 이끄는 대족장이시오.”
“그래, 옳다.”
고개를 끄덕인 야수묘왕이 말을 이었다.
“나는 수많은 묘족을 대표하는 대족장이다. 그들을 한 깃발 아래 모으고, 다른 부족장들의 지지를 얻어 남만야수궁의 궁주가 되었지. 목아, 우리 땅에 존재하는 부족들의 수가 몇이나 되는지 아느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야율목이 대답했다.
“남만 전체를 아우른다면 서른두 개의 부족이 존재하고, 묘족을 비롯한 네 개의 거대 부족이 있습니다.”
“그래, 그것이 남만야수궁이다.”
나는 야수묘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물론 태산은 빼고.
“그 말씀은…….”
“나는 궁주이기 이전에 묘족의 대족장이고, 남만야수궁의 궁주는 왕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야수묘왕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분명 남만야수궁은 중원과 동떨어진 별개의 왕국과도 같은 곳이었지만, 그 왕국을 이루는 것은 크고 작은 부족체의 연합이었다.
그럼 굳이 이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유는 뭘까.
‘다른 부족이 반대하고 있지만, 야수묘왕 본인은 입맹에 동의할 생각이 있다는 건가?’
내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려던 그때, 굳게 닫힌 대전의 문 너머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주,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