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27
#626화
“궁주.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닫힌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온 누군가의 낮고 딱딱한 목소리.
모두가 반사적으로 등 뒤의 문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생겨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야수묘왕. 그리고 야율목.’
외지인인 우리는 어쩌다가 굴러 들어온 돌에 불과하지만, 저들은 남만에 박혀 있다 못해 없어서는 안 될 내핵 같은 존재다.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저 두 사람의 눈빛이 일순간 깊숙이 가라앉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됐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볼 사이는 아니라는 거겠지.’
내심 중얼거리며 결론을 내린 그때, 나와 시선이 마주친 야수묘왕이 문득 실소를 흘렸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예?”
“별것 아니다. 그냥 나온 말일 뿐이야.”
별것 아니긴. 누가 봐도 별것 같은데.
하지만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두꺼운 손을 작게 내저은 야수묘왕이 나를 포함한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다른 객이 왔으니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느냐? 아직 시간이 있으니 여독을 푼 후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아직 시간이 있다는 야수묘왕의 말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다. 암천이 존재하는 이상 무슨 일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러나 잠시 휴식 후 이야기를 나누자는 제안에는 찬성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남만에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는 것 같고.’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야수묘왕의 시선이 오른편에 시립한 야율목에게 닿았다.
“목아.”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공손히 예법을 취한 야율목이 우리를 향해 눈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내 거한 환영식을 준비하지.”
거한 환영식은 괜찮으니까 입맹(入盟)과 암천에 대한 논의만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야수묘왕을 하고 돌아선 우리가 문 앞까지 다다르자 암석을 깎아 만든 석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구궁.
무거운 소음과 함께 천천히 열리는 문틈 너머, 곰 가죽을 뒤집어쓴 채 문과 연결된 쇠사슬을 잡아당기는 근육질의 역사(力士) 두 명이 보인다.
그리고…….
“오랜만이구나.”
앞서 들려온 딱딱한 목소리의 주인도 함께.
불쑥 건네어진 그의 인사에 야율목이 고개를 숙였다.
“묘족의 야율목이 백상(白象) 숙부를 뵙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얀 옷과 장신구를 걸친 중년의 이민족. 야율목에게 백상 숙부라 불린 그가 입을 열었다.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다. 북동쪽의 목초지에서 제법 큰 화재가 있었다지?”
“사소한 문제였습니다. 금세 진압되었고요.”
“사소한 문제라.”
딱딱한 목소리에 어울리는 차가운 눈빛이 흘러나온다. 백상은 냉정한 시선으로 야율목과 그 뒤에 선 우리를 훑었다.
정확히는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동시에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길 바라지.”
“…….”
“궁주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금까지도 고개를 숙인 야율목을 힐끗 바라본 백상은 가타부타 말없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구구궁. 다시 한번 묵직한 소음과 함께 석문이 닫히자, 그제야 비로소 야율목의 고개가 들렸다.
입을 꾹 다문 채 굳게 닫힌 석문을 응시하는 녀석에게 내가 물었다.
“저 사람, 누구야?”
“알 것 없다.”
“말하기 싫은가 보네. 그럼 뭐 됐지. 남 노인?”
내 부름에 은영각이 자랑하는 생생남만통, 남호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남만에서 가장 강성한 네 개의 거대 부족 중 한 곳인 백족(白族)의 대족장이다.”
“아. 어쩐지 온통 새하얗게 차려입었더라. 백족이라면 남만 초입에서 몇 명 봤습니다. 그 흰둥이들 말하는 거죠?”
남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흰둥…… 뭐, 틀린 말은 아니군. 부족 자체가 백색을 숭상하니까.”
남만 땅에는 서른 개가 넘는 부족들이 공존하고, 곳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며 저마다의 풍습을 지켜 나간다.
하지만 영인은 남만에서도 만남의 장소 같은 곳이라서 여러 개의 부족이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곳이었는데, 그중에는 백족도 있었다.
‘그 정도로 강한 부족인 줄은 몰랐네.’
그나저나 이 넓은 남만 땅을 네 등분하는 거대 부족의 대족장이라…….
야율목이 숙부 운운할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물이다.
기본적인 정보를 얻은 나는 어느새 멀찍이 앞서가는 야율목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근데 별로 안 친해 보이던데? 친 숙부 맞냐?”
“…….”
“야, 야. 안 들려?”
“…….”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지. 불타는 목초지 보고 싶어? 어? 돌아가는 길에 불 한번 시원하게 싸질러 줘?”
“…….”
“어. 이 새끼가 끝까지 말을 씹네. 오케이, 알았다. 넌 관이 아니라 불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 이거지.”
지금까지의 내 아가리 파이터 전적을 따져보면 승률이 100%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개소리 좀 그만해라. 부탁이다.”
“아, 그럼 처신 잘 하라고. 재깍재깍 대답하면 이런 일 없잖아.”
나를 지그시 노려보던 야율목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생각을 좀 하고 물어봐라. 친 숙부면 부족이 다를까.”
“하긴. 그런데 웬 숙부 타령이야?”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는 분이시다. 어릴 적부터 깊은 교분을 쌓았고, 정마대전 당시에도 늘 함께 싸우셨다고 들었지.”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뭐? 사실이냐?”
“내 듣기로 한족 놈들은 의심이 많다더니 정말이었군. 왜, 못 믿겠나?”
“그건 아니긴 한데…… 확실히 좀 놀라긴 했어.”
“두 분이 의형제라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니, 그거 말고.”
“……?”
“야율척 대협이 네 아버지였어?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아니라?”
“……!”
야율목의 눈빛이 짜게 식었지만 놀라운 건 놀라운 거다.
세상에, 많이 쳐 줘야 이십 대 중반인 녀석이 여든을 훌쩍 넘긴 야수묘왕의 아들이었다니.
제아무리 무림인들이 일반적으로 늦게 결혼하는 편이라지만 이건 다른 의미에서 대단하다.
“저, 저기. 각주님?”
주화란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내가 손을 내저었다.
“잠시만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고요. 너 혹시 장남이냐? 아니지?”
타다닥.
갑자기 빨라진 발걸음. 야율목이 씹어뱉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삼대독자다.”
“이야. 야율독자. 전지적 남만 시점 쌉가능이고.”
“무슨 말이지? 진짜 미친놈인가?”
“내가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하긴 하지. 뭐 어쨌든 저 백상인지 뭔지 하는 양반이 입맹에 반대하는 쪽인가 봐? 예전 일이야 어찌 되었건 지금은 사이도 좀 안 좋고?”
“그건 네놈 같은 외부인이 신경 쓸 바가 아니……!”
이래서 대화의 흐름이 중요하다.
열이 뻗친 얼굴로 대답하던 야율목이 멈칫하며 말꼬리를 흐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번져 버린 불길이나 다름없다.
완벽하게 상대를 낚은 나는 푸근하게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새끼. 말을 왜 하다가 말아. 그래서 결국 내 짐작이 맞다는 뜻이지?”
“……이놈.”
“지금 당장은 이 정도면 됐으니까 나중에 필요하면 또 물어볼게. 일단 고맙다. 아, 그리고 여기가 우리 숙소지? 안내하느라 고생했어.”
나는 대답 대신 죽일 듯이 노려보는 야율목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남호가 불을 발견한 원시인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혹시 은영각 들어올 생각 없나?”
“은영각은 무슨. 그나저나 다 들었죠?”
“물론일세. 교묘하게 유인해서 낚아채는 솜씨가 최소 강태공이었어.”
나는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람 낚는 어부. 진드로라고 불러주십시오.”
“진드로……!”
주화란과 혁무진도 흥분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각주님. 정말, 정말 대단해요. 처음에는 진짜 미치신 줄 알았는데.”
“주 소저 말씀이 맞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조장님 주둥이를 찢어 죽이고 싶었겠습니까.”
이거 뭔가 기분이 묘하긴 한데, 그래도 한 건 해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 소저 칭찬 감사합니다. 무진이는 대가리 박아.”
“옙.”
쿵.
나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대가리를 박은 혁무진의 등에 걸터앉았다. 황당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송일섬과 사마표가 묻는다.
“어이가 없긴 한데…… 어찌 되었건 중요한 정보는 알았군.”
“각주. 이제 어찌할 셈인가?”
나는 말 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새로운 정보를 얻었지만 백족의 대족장이 남만야수궁의 무림맹 합류를 반대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소식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그 이유였다.
왜. 어째서.
정마대전에도 참여했던 그가, 야수묘왕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불알 동생이 무슨 이유로 입맹을 반대하는 것인지.
그리고 방금 전 스치듯이 가진 만남 속, 백상에게서 느꼈던 냉랭함과 유심히 나를 살피던 시선의 의미는 무엇인지.
나는 그것이 신경 쓰였다.
꾸르르륵.
“태산이. 배고프다.”
“…….”
저 시벌 놈이.
* * *
표범과 호랑이 가죽으로 뒤덮인 태사의(太史椅).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앉은 야수묘왕은 앞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쪼르르륵.
그가 직접 돌을 깎아 만든 투박한 술병이 기울어지자, 탁한 색깔의 술이 커다란 나무 대접을 가득 채운다.
그렇게 채워진 두 개의 잔 중 하나를, 야수묘왕은 새로운 손님에게 권했다.
“네가 좋아하는 과실주다. 사양 말고 들거라, 백상(白象).”
백상. 흰 코끼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느릿느릿하게 날아온 술잔을 받은 중년인의 모습은 코끼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과 경직된 입꼬리. 야수묘왕과는 상반되는 마른 체구를 지닌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사양하지요.”
탁.
소리 내어 술잔을 내려놓는 백상의 모습에, 야수묘왕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괜찮다.”
대답과는 달리 속마음은 쓰렸다.
이제는 기억조차 흐릿한 옛 기억 속, 함께 며칠 밤낮을 웃고 떠들며 쉬지 않고 술잔을 기울였던 그의 하나뿐인 의형제는 수십 년째 같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사양하지요.
오늘 하루만의 일이 아니다. 그제도, 어제도. 그리고 내일과 모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익숙한 일이기에 짐작할 수 있었고, 자신의 짐작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이 우형을 찾아왔나?”
백상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 때문이군.”
“무림맹에서 왔다 들었습니다.”
“맞네. 신임 맹주로 취임한 검성 매종학이 보낸 이들일세.”
야수묘왕은 순순히 긍정했다. 숨길 일도 아니고, 숨긴다 하여도 결국 백상의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당장 남만야수궁의 내당에 속한 이들 중에도 백족이 수두룩했으니까.
‘어쩌면 저들의 상세한 신분까지도 알고 있을지도.’
그가 아는 백상은 언제나 철두철미한 성격이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백상의 차가운 눈빛이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야수묘왕을 향했다.
“지난번 부족 회의의 결과를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마음속으로 대답하는 야수묘왕의 귓가로, 딱딱하기 그지없는 백상의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우리, 남만야수궁은…… 결코 입맹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