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29
#628화
“불과 수십 년 전, 우리는 하나가 되어 한족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 너희는 우리에게 칼을 겨누었지.”
지금 이 순간, 야율목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이번 참사 속에서 몰살당한 이들의 숫자가 자그마치 이백여 명. 희생당한 이들의 대부분은 힘없는 노인과 여인, 그리고 아이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야율목이 속한 묘족(苗族)의 일원이기도 했다. 한데 그런 짓을 벌이고도 감히 도움을 청하다니.
“우리는 이미 많은 피를 흘렸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닌, 너희 한족들을 위해서.”
야율목은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만은 두 번 다시 헛된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돌아가라.”
칼날처럼 예리하면서도 단호한 한마디. 참고 있던 말을 모두 쏟아낸 야율목은 후련한 마음으로 눈앞의 한족을 바라보았다.
‘진태경이라고 했지.’
야율목은 반나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 잘 몰랐다. 중원에서 이름난 대단한 후기지수라고 얼핏 들었던 것을 빼고는.
하지만 초절정 고수라는 허무맹랑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당장 자신이 나고 자란 남만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만한 전사일지도 모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님의 일권을 막았으니, 그 소문이 사실일지도.’
야율목은 자신의 아버지, 야율척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불혹이 채 되기도 전에 남만 제일의 전사가 되었고, 묘족을 가장 강성한 부족으로 만들었으며 모두에게 인정받아 남만야수궁의 주인이 되었다.
그뿐인가, 그 대단한 무위로 남만인들을 오랑캐 취급하는 중원의 한족들마저 탄복하게 만들었다.
야수묘왕(野獸苗王)이라는 별호 또한 그때 얻었다고 들었다.
‘아버님과 수를 교환할 만한 상대는 백상 숙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바에 의하면, 기껏해야 자신의 또래인 진태경의 무공은 놀라웠다.
자신은 제대로 볼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아버지의 일권을 그리 어렵지 않게 막아 냈으니까.
물론 힘을 이겨 내지 못해 일장에 가까운 거리를 물러서긴 했지만, 그것이 진태경을 과소평가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게다가…….’
체격도 크다. 평범한 장정보다 머리 한두 개는 큰 키와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근육질의 체형.
이렇게 발걸음을 멈춘 채로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마치 두 발로 일어선 한 마리의 맹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늘 실실 웃고 있던 눈과 입꼬리가 지금은 굳어 있는 탓일까. 야율목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였다.
“야.”
“……!”
“뭘 그렇게 놀라. 그냥 부른 건데.”
불쑥 튀어나온 낮은 목소리에 흠칫 놀란 야율목이 대답했다.
“……왜, 왜 불렀냐.”
“말은 또 왜 더듬어?”
그야 네놈이 정색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지금까지의 모습은 항상 새 깃털보다 가벼워 보이던 놈이었는데,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니 숫제 만근거석(萬斤巨石)을 두고 있는 것 같다.
– 크으으응…….
이런 주인의 마음은 함께 있던 백호에게까지 전해졌다.
야율목은 애써 침착한 척, 덩달아 위축된 애호(愛虎)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더, 더듬은 적 없다.”
“…….”
“그런데 왜 부른 거냐. 불렀으면 말을 해라.”
“음. 뭐 별건 아니고.”
묘한 눈빛으로 야율목을 바라보던 진태경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말해 줘서 고맙다.”
“어?”
“솔직하게 다 말해 줘서 고맙다고. 나도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있었는데, 뭐 덕분에 여러 가지를 알게 됐네. 이쪽 동네 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이게 무슨 소리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말없이 진태경을 빤히 쳐다보던 야율목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하는 말이…… 그냥 돌아가겠다는 뜻이냐?”
“음?”
진태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그렇게 되나?”
“아니, 이해했다면서?”
“어. 당연히 이해는 했지. 내가 무슨 공감 능력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그거랑 이거는 별개지.”
“뭐?”
“말하자면 길어져서 입 아프니까. 툭 까 놓고 하나만 묻자.”
자연스럽게 나무에 등을 기댄 진태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진심으로 정마대전이 한족들만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하냐?”
“……!”
“내친김에 하나 더. 그 전쟁에서 희생된 남만인들이 아무 목적 없이 개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해?”
“그건…….”
“그건, 뭐?”
야율목은 문득 말문이 막혔다. 어째서인지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대답할 말을 찾는 사이,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겠지. 첫째. 마음속으로는 내 말이 사실인 걸 알지만 인정하기 싫어서. 그리고 둘째.”
두 개의 손가락을 곧게 편 진태경이 툭 내뱉었다.
“네가 아직 생각 머리 없는 애새끼라서.”
“그게 무슨…….”
“나한테 묻지 말고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봐라. 남만야수궁이 왜 그 많은 전사를 데리고 수만 리나 떨어져 있는 중원을 도왔는지. 단순히 아주 오래전에 열화문의 선조가 혼란스럽던 남만을 정리해 줘서? 그게 사실이면 니 옆에 있는 백호가 웃겠다.”
“……!”
“뭐, 너희 남만인 중 대부분은 첫 번째 이유 때문에 입맹(入盟)을 반대하고 있겠지. 애꿎은 피만 흘렸다고 생각하니까. 그 역사를 다시 한번 반복하기 싫으니까.”
진태경이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냐. 누가 시발, 전쟁하고 싶어 하냐. 개같이 싸워서 땅이랑 금은보화를 얻으면 뭐 해. 사방에서 사람이 개미처럼 죽어 나가는데. 물론 그 개미 중의 일부는 내 친구, 가족. 연인이지. 아니면 나나 너 자신일 수도 있고. 근데 너 여자친구 있냐?”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야율목은 엉겁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여친은?”
“지금 네가 말하는 그 여친이라는게 정확히 뭐지?”
“연인. 혹은 애인. 남자와는 다른 신체적 구조를 지녔으며 너와 애틋한 마음으로 교제하는 존재.”
“어, 없다.”
“아. 있었는데?”
“없다.”
“그러니까.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나이가?”
“스물여섯.”
“녀석. 동자공 유망주였네. 이대로 오십 년만 버티면 무신도 되겠다. 그럼 연인은 희생자 명단에서 빼자.”
어째서인지 흐뭇하게 웃는 진태경의 모습에 기분이 나빠진 야율목은 맥이 탁 풀렸다.
상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놈이었고, 종잡을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거기에서 왜 연인 이야기로 빠져?”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한 가지는 확실하지.”
희미하게 어려있던 웃음기를 지운 진태경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오래전 고향을 떠나 중원에서 스러져 간 남만인들의 희생이, 목적 없는 개죽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것.”
“…….”
“천마표국 일은 진심으로 유감이다. 하지만 그런 미친놈들이 있었다면…… 내 손으로 직접 죽였을 거야.”
“너와 같은 한족인데도?”
“그게 무슨 상관인데?”
기분 탓인지. 오늘따라 여러 번 말문이 막히는 것 같다.
입을 꾹 다문 채 진태경을 응시하던 야율목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한다 해도 남만은 중원을 돕지 않아.”
“어려울 것 같긴 한데, 설득은 해 봐야지.”
“헛수고야.”
“뭐?”
“이미 결정된 사안이나 다름없다. 보름 전 열린 일 차 부족 회의에서 결론이 났어.”
“그 말은 이 차도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남만은 넓고, 서른두 개의 부족이 한자리에 모이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기에 아버님을 비롯한 네 명의 대족장들이 먼저 사안을 검토하지.”
“그 결과가 입맹 반대다? 계속해 봐.”
“사흘 뒤, 이 땅의 모든 부족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 것이다. 하지만 아버님을 제외한 대족장들은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다.”
야율목의 말은 사실이었다. 남만야수궁은 화합의 상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족 간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족의 대족장인 백상을 필두로 세 명의 대족장이 뜻을 모았다면, 제아무리 남만 제일의 전사이자 궁주인 야수묘왕이라 할지라도 제멋대로 입맹을 결정할 수 없었다.
‘그것이 이곳의 규칙이니까.’
마음속으로 뇌까린 야율목은 신중한 눈빛으로 진태경을 주시했다.
저 젊고 강한 중원의 한족 놈은 어떻게 반응할까.
남만의 합류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지금, 놈이 보여 줄 반응이 궁금했다.
아무래도 실망하겠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설득해 보겠다고 용을 쓸 것이 틀림 없…….
“우선 손 닿는 데까지는 해 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어?”
야율목은 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다. 진태경의 반응이 예상외로 너무나도 담담했고, 태평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다니까?”
“응. 근데 아직 끝난 건 아니라면서?”
“그건 사실이긴 한데…….”
뭐지, 이거.
야율목은 곤혹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
“어떻게든 우리를 설득해야 하지 않나?”
“그러니까 우선은 해 본다고. 안 되면 그때는 돌아가야지. 물론 그전에 더 중요한 것부터 처리하고.”
“더 중요한 거라면…….”
“뭘 오해하고 있나 본데.”
진태경이 턱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난 이곳에 외교관 자격으로 온 게 아냐. 굳이 따지자면 소방관으로서 온 거지.”
“소방관? 그게 뭐지?”
“음. 불 끄는 사람.”
“오자마자 목초지에 불 지르지 않았나?”
진심이 담긴 야율목의 물음에 잠깐 침묵하던 진태경이 대답했다.
“뭐, 그건 단순한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막말로 내가 누구를 설득하는 데에 재주가 특출난 사람은 아니니까.”
“그 말은 맞는 것 같다.”
“……시벌놈. 괜히 열 받네. 아무튼 남만이 합류하지 않는다면 아쉽지만, 노력해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네놈은 한족이고, 게다가 무림맹 소속이지 않나.”
“그래서?”
“자세한 사정은 정확히 모르지만, 중원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든 도움을 청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를 도우러 왔다고?”
희한한 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야율목의 눈빛에, 진태경이 피식 웃었다.
“지난번처럼 목초지에 불나면 어쩔래?”
“당장 꺼야지.”
“왜?”
“꺼트리지 않으면 불길이 사방으로 번질 테니까.”
“좋아. 답 나왔네.”
“……!”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불이 났으니까 끄려고 하는 것뿐이야. 수십 년 전 고향을 떠나 중원으로 향한 이 땅의 남만인들처럼.”
잠시 침묵하던 야율목이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아무런 대가 없이…… 단순히 우리를 돕기 위해 왔단 말이냐?”
“그렇다면?”
“믿을 수 없다.”
“뭐 좋을 대로 생각해라. 아, 물론 그 전에…….”
자연스럽게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던 진태경이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밥이나 제대로 줘. 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