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34
#633화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한껏 숨죽인 상태였지만, 목소리에 실린 다급함과 인기척은 그렇지 못했다.
“구, 궁주님!”
호위로 짐작되는 누군가의 부름에 야수묘왕과 야율목이 고개를 번쩍 치켜든 그때.
“지금 애뇌산(哀牢山)에서 변고가……!”
쾅!
갑작스럽게 뻗어 나온 강맹한 기파가 사당 내부를 휩쓸었다.
낡아 빠진 문을 산산조각 낸 야수묘왕이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수하를 바라보며 외쳤다.
“애뇌산에서 변고가 생기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리고 그 순간, 목소리보다 앞서 귓가를 파고드는 나직한 종소리가 있었다.
띠링.
– 돌발 퀘스트, [알 수 없는 징조]가 생성되었습니다!
퀘스트
[알 수 없는 징조]남만의 금지(禁地). 애뇌산이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높고 험한 수많은 봉우리에는 갈가리 찢긴 사체가 내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천길 절벽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의 핏물이 흐릅니다. 검은 구름과 안개에 휩싸인 그곳으로부터 끝없이 흘러나오는 괴성이 모두를 두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앞에 새로운 길이 나타났습니다.
등급 : 돌발 퀘스트
제한 : 진태경
임무 : 제한 시간 안에 애뇌산 조사 (미완료)
보상 : ???
실패 : ???
–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알 수 없는 징조라.
내심 중얼거린 나는 문득 퀘스트 제목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징조가 아니라, ‘존나 확실한’ 징조로.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퀘스트 수락.’
띠링.
– 돌발 퀘스트, [알 수 없는 징조]를 수락하셨습니다!
– 제한 시간이 생성되었습니다!
남은 시간 : 4시간 59분 59초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촌각(寸刻)이 채 지나기도 전, 우리는 깊은 새벽을 가로지르며 애뇌산으로 출발했다.
* * *
남만야수궁의 전사들은 용맹한 맹수와 함께 성장한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며 유대감을 쌓다가, 성인식을 치른 뒤 한 사람의 전사로 인정받게 되면 정식으로 그 맹수의 주인이자 동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백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전통에도, 어디에나 그렇듯 예외는 있었다.
쉬쉭! 파스스슥!
야수묘왕 야율척은 맹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존재였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그랬을 테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남만이 낳은 가장 위대한 전사이자 맹수 그 자체였다.
어둠과 풀숲으로 가득한 밀림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돌파한 야수묘왕의 입에서, 거센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와아앙!
그것은 말 그대로 맹수의 포효였다. 항마의 힘을 지닌 소림사의 절공인 사자후(獅子吼)보다 거칠고 포악하며, 훨씬 더 원초적인.
그리고 이러한 야수묘왕의 포효는 짙은 어둠 속을 찢으며 더 멀리, 빠르게 퍼져 나가며 경고를 알렸다.
까마득한 산등성이 아래, 곳곳에서 솟구치는 수백의 횃불을 바라본 야수묘왕이 어느덧 주위를 감싸며 달리는 호위들을 향해 외쳤다.
“기산. 도곡. 외궁(外宮)으로 가라. 외궁에 머무르는 부족장들을 찾아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전사들을 동원하여 혹시 모를 외침(外侵)을 방비하라 일러라!”
“옛!”
“원후. 만적. 너희는 내궁(內宮)이다. 묘족의 전사들을 동원하여 궁 내부를 지켜라!”
“존명!”
“나머지 셋은 다른 대족장들을 찾아가 지금의 상황을 알리고, 각각 일백의 정예 전사를 동원하여 애뇌산으로 향하라 전해라!”
묘족 내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궁주 직속의 호위대 칠묘호(七苗虎)에게 일사불란한 지시를 내린 야수묘왕의 시선이, 열심히 자신의 뒤를 따르는 늦둥이 아들을 향해 미끄러졌다.
“목아.”
“……예. 아버님.”
야율목의 안색이 어두워 보이는 건 주위에 내려앉은 어둠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뒤에 나올 말을 예상했다는 듯, 흐린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들을 향해 야수묘왕은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들과 함께 가라. 묘족 휘하의 전사들을 소집하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일군(一群)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잊었느냐? 넌 묘족의 소족장이자, 남만야수궁의 소궁주다.”
왜 야수묘왕이 남만야수궁의 궁주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배부른 수사자처럼 느슨한 모습을 보였던 야수묘왕이지만, 지금의 그는 먹잇감을 코앞에 둔 맹수와 같았다.
그리고 야율목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추상같은 아버지의 지시를 거스를 만큼 철부지가 아니었다.
“……궁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야율목은 곧장 대열을 이탈하지 않았다.
녀석은 야수묘왕과 나란히 달려 나가던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이 녀석과 함께 가라.”
“어?”
– 크릉?
여기서 야율목이 말하는 이 녀석이라는 건 다름 아닌 백호였고, 그래서 더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남만의 전사들은 자신과 함께하는 맹수를 가장 소중한 전우이자, 가족이라고 생각하니까.
쉬쉭!
코앞까지 들이닥친 나뭇가지를 피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혹시 분양해 주는 거냐? 가정 분양 그런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 크르르!
“깜짝이야. 왜 그렇게 화를 내.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지.”
“아니다! 네놈이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야 아버님께 보탬이 될 것이 아니냐!”
– 크아아앙!
이심전심(以心傳心)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닌지, 사람과 짐승이 쌍으로 지랄이다.
뭐, 그나저나…….
‘확실히 타고 가면 훨씬 낫긴 하지.’
내가 지닌 공력의 양은 중원에서도 결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샘솟는 정도는 아니다.
만약 애뇌산에서 남천마후가 이끄는 암천을 상대하게 된다면 야율목의 말처럼 최대한 힘을 비축하는 게 좋겠지.
‘기특한 놈일세.’
남만에 온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자신의 맹수를 내어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안다.
대견한 눈빛으로 야율목을 바라본 나는 녀석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기로 했다.
“자, 여기. 부담스럽다고 사양하지는 마. 원래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이니까.”
파스스슥!
스치는 바람과 나뭇가지 사이를 감도는 침묵. 내 양손에 짐짝처럼 들려 있던 남호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물건이냐?”
“물건이면 던져서 공격이라도 할 수 있죠. 남 노인은 그러지도 못해요.”
“이런 위아래 없는 불한당을 보았나. 감히 노인 공격을…….”
“군말하지 말고 가십쇼. 앞으로의 노후 계획도 창창하신데 괜히 휘말리지 마시고. 그리고 저희 애들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이건 무시가 아니라 배려다. 남호가 제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은영각 요원이라고 하지만, 결국 무공이라고는 일초반식도 익히지 않은 노인일 뿐이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남호는 근심 어린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룡각에 똑똑히 전하지. 각주가 찾는다고.”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뭘 경계해야 하는지도 알려 주실 거라 믿고요.”
마침내 남만이라는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중요한 건 그 불을 누가 붙인 것이 외부의 적이냐. 내부의 적이냐는 것이다.
노쇠한 몸과는 달리 두뇌는 조금도 늙지 않은 남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주,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지.”
“네?”
“다치지 말게.”
“아.”
“물론 죽는 건 더더욱 안 돼.”
걱정이 전해지는 그의 한 마디에 난 대답 대신 슬쩍 웃었고, 내게서 남호를 건네받은 야율목은 눈짓과 함께 백호의 등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탁, 쉬쉭!
흐린 달빛 아래 그림자가 스친다.
칠묘호와 함께 대열을 이탈한 그들이 어둠 너머로 파묻히자, 마치 거대한 불곰처럼 두 팔과 다리로 바람처럼 내달리던 야수묘왕이 한층 속도를 높였다.
파파파팟! 콰직!
두꺼운 나뭇가지가 꺾이고 우거진 풀숲이 짓밟힌다.
야율목이 남기고 간 백호의 등에 올라탄 나는, 맹렬하게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사이로 전해지는 목소리를 들었다.
“암천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느냐?”
“가 봐야 알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을 겁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야수묘왕을 향해, 내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애뇌산이 정확히 어떤 곳입니까?”
“금지(禁地)다. 허락된 자들이 아니라면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애뇌산이 금지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는 길에 남호에게서, 그리고 조금 전에 시스템으로부터.
그렇기에 야수묘왕의 대답은 그리 명쾌하지 못했다.
“그건 남만야수궁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니, 야수궁뿐만이 아니라 남만 대부분이 그런 것 같던데요.”
“다르다. 확실히 다르지. 그곳은 각 부족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전사들이 출입하며 경계하는 곳이니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그마치 삼백여 년 전의 일이다. 내 선조의 선조, 그 선조의 선조가 남만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때. 이 땅에는 백여 개가 넘는 부족이 오래전부터 죽고 죽이는 전쟁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십 개의 부족이 사라졌고, 간신히 살아남은 후손들은 남만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신들만의 문파를 세웠다. 그리고 어떤 날카로운 무기나 맹수보다 위험한 것을 다루기 시작했지.”
그 순간, 몇 달 전 하남에서 적천강과 나누었던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열화문의 옛 문주들의 행적과 연관되어 있던 남만야수궁의 역사에 대하여.
그것은 남만야수궁이 정마대전에 참여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독(毒). 독이군요.”
“그래. 그것이 향후 백 년간 남만을 공포로 물들였던 오독문(五毒門)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높이 솟은 봉우리를 넘고, 언덕을 박차고 뛰어올라 울창한 나무를 밟으며 내달렸다.
발톱처럼 그러모은 손으로 두꺼운 나무를 후려쳐 날려 보낸 야수묘왕이 말을 이었다.
“실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강가에는 죽은 물고기들로 가득했고, 떠내려온 물고기를 멋모르고 먹은 짐승들도 죽었지. 우물에는 독이 퍼졌고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돌았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이들이 죽어 나가자, 분열되었던 부족들은 마침내 한 깃발 아래에 모여 새로운 전쟁을 시작했지.”
그것이 남만야수궁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죽음은 죽음을 낳았고, 복수는 복수로 돌아왔다.
그리고 끊임없이 굴러가는 복수의 고리에 갇힌 남만야수궁과 오독문이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던 그때.
머나먼 중원으로부터 이방인이 도착했다.
“그는 자신을 열화문의 문주라고 밝혔다. 난생처음 들었을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선조들에게는 상관없었겠지. 그는 남만 땅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습격한 오독문의 전사 일백을 태워 죽여 버렸으니까.”
당대의 열화문주는 오독문의 예상치도 못한 성대한 환영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여느 무림인들처럼 독을 혐오했다.
그리고 팽팽하던 전력의 저울추를 엉덩이로 깔아뭉개며, 남만야수궁을 이끌고 오독문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문제는 그가 떠난 후였다.”
오독문의 문도들은 백골이 되었지만, 그들이 마지막 순간 풀어놓은 독물과 맹수들은 오독문의 본거지였던 산속 깊은 곳에서 개체 수를 불려 나갔다. 천천히. 은밀하게.
그리고 오독문의 본거지였던 그곳이 바로…….
“바로 저곳이다. 애뇌산.”
나는 야수묘왕이 손끝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까마득히 멀리, 구름과 안개에 휩싸인 봉우리로 가득한 검은 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