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35
#634화
파파팟!
야수묘왕도, 백호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나는 전신을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에 눈을 가늘게 떴다.
‘저곳이 애뇌산.’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험악한 산세와 깊은 계곡. 안개에 휩싸인 수많은 봉우리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의 어둠 때문일까. 아니라면 먼 과거 남만을 공포로 몰아넣었다던 오독문의 옛 본거지였기 때문일까. 빠르게 가까워지는 애뇌산의 전경은 어둡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뒤이어 들려온 야수묘왕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아 있는 것은.
“오독문은 본 궁에 의하여 멸문당했으나, 그렇다고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물건이 남아 있다면, 시원하게 불태워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물건에 발이 달렸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당시에는 누구도 몰랐다. 애뇌산 가장 깊숙한 곳에서 오독문이 남긴 알 수 없는 것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장장 백여 년.
오독문이 남긴 어두운 유산은 애뇌산 깊숙이 스며들어 살아갔다.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영역에서 서로를 잡아먹고, 한편으로는 번식하며 서서히 크기를 불려 나갔다.
“하지만 결국 선조들은 알게 되었지.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방식으로.”
남만의 정예 전사 삼백이 한 줌 혈수(血水)로 녹아내렸고, 두 명의 대족장과 십여 명의 부족장이 사지가 찢겨 죽었다고 했다.
그것이 남만야수궁이 오독문을 멸문시킨 지 꼭 백 년이 되는 해에, 애뇌산에서 열린 부족 대회의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본 궁을 습격한 것은 남만. 아니, 천하에서도 드문 독물(毒物)과 괴이한 맹수들이었다.”
해독 방법을 알 수 없는 극독, 그리고 강철보다 단단한 발톱과 이빨을 지닌 수백 마리의 맹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습격에 극심한 피해를 입은 남만야수궁은 경악했다. 이미 오래전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오독문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치를 떨었다.
“다시 한번 남만 전체가 힘을 모았다. 각 부족의 모든 전사를 동원하여 애뇌산을 포위하고 놈들을 죽이고자 했지.”
하지만 남만야수궁의 시도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수백에 달하는 맹수를 죽이고, 독물을 불태웠으나 그 손해가 너무나도 막심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조금씩 생겨났다.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지.’
단순히 피자 하나를 시켜서 나눠 먹더라도, 누군가는 토핑 하나라도 더 먹고 누군가는 덜 먹을 수밖에 없다.
남만야수궁의 애뇌산 토벌 작전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위험을 느낀 독물과 맹수들은 홍길동에 빙의된 것처럼 곳곳에서 나타나 습격을 벌였고, 전사들을 이끄는 부족장들은 자신들의 손해를 두려워했다.
막말로 이렇게 된 거, 각 부족 당 몇 명만 죽읍시다, 하고 N빵을 제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족은 날이 갈수록 분열되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택한 화계(火計)는 외부로 번져 더 많은 피해를 낳았을 뿐, 애뇌산 전체를 태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렇게 남만야수궁은 애뇌산에서 물러나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난 것만은 아니었다.
“본 궁은 분명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그만큼 위협도 줄어들었다. 수많은 독물과 맹수를 사냥하고 애뇌산을 일부나마 불태웠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겠지.”
“그럼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애뇌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지만, 이번에는 그 누구도 방심하지 않았다. 산 전체를 금지로 지정하여 각 부족에서 차출된 정예 전사 삼백을 애뇌산에 상시 주둔시키고, 매해 네 명의 대족장이 돌아가며 소규모 토벌을 벌였지.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지난 백여 년간 평화를 유지했다.”
큰 손해를 피하면서 애뇌산의 위협을 예비할 수 있는, 남만야수궁에 속한 부족장들에게는 나름대로 현명한 타협안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래도 그 평화가, 오늘부로 마지막인 것 같네요.”
나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전방을 가리켰다.
내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 끝에는, 지옥의 입구처럼 어둡고 험한 골짜기와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쉬쉬쉭!
빛살처럼 쭉 솟구친 야수묘왕의 신형이 허공을 가로질러 골짜기 입구에 내려앉는다.
그의 뒤를 바짝 쫓아 도착한 내가 백호의 등에서 내렸을 때, 인영 앞에 우뚝 선 야수묘왕의 얼굴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늦었다. 이미 죽었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몇 걸음 앞까지 오기도 전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찔렀으니까.
그리고 이토록 지독한 냄새를 풍길 만한 사인(死因)은 하나밖에 없었다.
‘독. 독이군.’
그것도 엄청난 극독이다. 나무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인영…… 아니, 시신으로부터 흘러나온 악취와 핏물에 잠긴 땅과 풀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독과 상성인 화기(火氣)를 근원으로 한 열양지기를 익히지 않은 무림인이라면, 설령 절정 초입의 고수라 해도 반경 삼 장 이내의 독기(毒氣)를 쉽게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 크르릉.
나는 한껏 미간을 찡그린 백호를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아는 얼굴입니까?”
“왠지 모르게 낯이 익다. 필시 애뇌산에 주둔하고 있던 전사 중 한 사람이겠지.”
“원래 입구에 보초를 세워 두는 편입니까?”
“그럴 리가. 애뇌산에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손도 아쉽다. 산이 차지하는 범위가 워낙 넓은 탓에 인근에도 마을이 서너 개가 있긴 하나, 그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요컨대 오래전부터 엄격히 통제되던 구역이기에, 다른 보초병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이 사람은 산 위에서 내려온 거야.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면서.’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짙은 어둠 너머, 흐릿하지만 분명한 족적이 남아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확실히 사람의 족적이다. 짐승이나, 어떤 독물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 더.
“상흔이 있다. 시신의 옆구리를 보아라.”
야수묘왕의 말처럼, 시신의 옆구리는 무언가가 할퀸 듯 옷이 찢겨 나갔고 피부가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우선 병장기는 아닙니다. 거칠고 강한 무언가에 단순히 스친 것 같은데…….”
“그래서 독이 무서운 것이다. 약간의 상처만으로도 삽시간에 죽음에 이를 수 있으니까.”
살짝 긁힌 것뿐인데 이 정도라니. 과거 적천강이 당했던 무형지독(無形至毒)이라도 된다는 건가?
시신에서 눈을 뗀 나는 어둠에 물든 골짜기를 응시했다. 직접 보지는 않았으나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아마 저 이름 모를 망자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험한 골짜기를 내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극독에 당한 상태로 넘어지고 비틀거리며, 혼비백산하여 달려오다가 저 나무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했겠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의 내게는 저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의 정체가 더욱 중요했다.
‘암천인지, 아니면 애뇌산의 독물인지. 그것도 아니면…….’
암천에 의해 조종당하는 애뇌산의 독물인지.
아직은 풀리지 않은 의문과 함께, 나는 야수묘왕을 바라보았다.
“결국 답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
야수묘왕이 분노한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느 놈의 소행인지, 이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다.”
띠링.
제한 시간 안에 애뇌산 조사(미완료)
남은 시간 : 01:24:32
* * *
이제 분명 어스름한 새벽이어야 할 시간임에도 애뇌산은 여전히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니,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비단 어둠뿐만이 아니었다.
‘혈향(血香).’
어느 순간 익숙해져 버린 피비린내는 보이지 않는 길잡이였다. 죽은 이가 남긴 족적을 따라 산속을 질주하던 나와 야수묘왕은, 습한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혈향을 쫓아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산등성이 곳곳에 쓰러진 수많은 시신과, 짙은 혈향마저 덮어 버리는 극독 특유의 악취를.
“……!”
“……!”
그 숫자가 얼마나 될까. 백 명? 아니면 그 이상?
처음 골짜기에서 시신을 맞닥뜨렸을 때 떠올렸던 불길한 예상이 현실로 변했다.
눈 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에 야수묘왕의 두 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어떤 찢어 죽일 놈이 감히……!”
남만야수궁의 주인인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 분노하는 대신, 최대한 침착하게 공력을 끌어올려 기막(氣幕)으로 혹시 새어 나갈지 모를 소리를 차단하고 시신들을 살폈다.
‘골절. 타박. 절단. 중독.’
처음과 달리 이곳에 쓰러진 이들의 사인은 중독 외에도 다양했다. 사지가 으스러져 절명한 이도 있었고, 알 수 없는 강한 힘에 의해 목 등의 일부가 뜯겨 나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애뇌산에 주둔시킬 정도의 정예라면, 분명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들.’
그런 자들이 이렇게 처참하게 당했다니.
지금까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야수묘왕과 백상을 비롯한 극소수의 인물들이 특출할 뿐, 대부분의 남만 전사들은 중원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정예 전사라면 최소 일류에서 초일류. 혹은 드물게 존재하는 절정 고수들이다.
‘게다가 남만의 전사들은 혼자 싸우지 않아. 이들과 함께하는 맹수들까지 생각한다면 중원의 명문 대파와 버금갈 전력일 텐…….’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문득 엄습하는 위화감에 멈칫했다. 그리고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주위를 경계하는 백호를 본 순간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맹수. 맹수들은 어디로 간 거지?’
언제나 전사와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맹수들. 그 녀석들이 보이지 않는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아도 마찬가지다. 얼핏 보아도 백여 구가 넘는 시신들 사이로 보이는 맹수의 사체는 서너 마리가 고작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내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의문을 입 밖으로 토해 낸 그 순간.
스아아.
“……!”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송곳처럼 파고드는 소름 끼치는 기운.
혼란스러워하던 나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가라앉히고 있던 야수묘왕도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들을 수 있었다.
파스슥.
저 멀리, 미세하게 흔들리는 풀숲을. 살아 있는 무언가처럼 일렁이는 어둠을. 그리고…….
– 크르륵.
어둠이 내려앉은 풀숲 사이에 웅크린 어떤 존재의, 심연과도 같은 낮은 울음소리를.
사박.
느려진 세상 속, 풀숲을 짓밟으며 어둠이 움직인다.
암흑을 전신에 두른 채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맹수보다 거대했고, 청백색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와 위엄이 서려 있었다.
‘흑호(黑虎).’
번개처럼 뇌리를 스친 한 단어와 함께, 백호의 몸뚱어리가 파르르 떨린 그 순간.
크와아아아앙!
어둠을 찢고 천지를 떨어 울리는 포효와 동시에, 낯익은 종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띠링.
– [애뇌산의 망령(亡靈)]이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