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36
#635화
띠링.
– [애뇌산의 망령(亡靈)]이 나타났습니다!
애뇌산의 망령.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존재와 이름.
그러나 새롭게 전달받은 정보를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시스템으로부터 애뇌산의 망령이라 칭해지는 거대한 흑호(黑虎)가 천둥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 크와아아앙!
어둠을 찢으며 산 전체를 울리는 포효에, 주위의 공기가 물결처럼 일렁이고 풀이며 나뭇가지가 산산이 부서진다.
그것은 단순한 맹수의 울부짖음이 아니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심령(心靈)마저 뒤흔드는 원초적인 무언가였다.
그리고 나는 이 힘의 정체를,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피어(Fear).’
처음 놈의 청백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저 거대한 맹수는 짐승이라는 두 글자로 완전히 담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느낌이 마냥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미 몇 달 전 호북에서 놈과 닮은 어떤 존재를 맞닥트린 경험 덕분이었다.
‘수신룡(水神龍).’
암천에 의하여 이지를 상실한 채 미쳐 날뛰던 동정호의 주인. 수백 년의 세월 끝에 새로운 영역으로 접어든 희대의 영물.
나는 태산처럼 우뚝 선 흑호에게서 수신룡과 같은 기운을 읽었고, 그것은 비단 나 혼자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 끄으으응…….
평범한 기준에는 영물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백호였지만, 강렬한 피어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겁먹은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녀석과는 달리, 또 다른 누군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섰다.
“네놈의 소행이더냐!”
콰앙!
분노가 가득 담긴 외침과 함께, 힘껏 지면을 박찬 야수묘왕의 신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장의 거리를 지우며 쏘아진다.
어느새 힘껏 말아쥔 주먹에서 눈부신 광휘(光輝)가 터져 나왔다.
후우웅!
묵직한 파공성. 주먹을 실타래처럼 휘감은 파괴적인 강기가 막아서는 모든 것을 지우며 나아갔다.
그리고 그 끝에…….
솨아아악!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이 있었다.
“……!”
“……!”
피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십왕(十王)에 속한 초절정 고수의 일권을.
그야말로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어둠 속에서 안개처럼 움직여 야수묘왕의 공격을 피한 흑호는 밤처럼 까맣고 커다란 자신의 앞발을 휘둘렀다.
쉬익!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맹하게.
꽈앙! 콰드드득!
굉음과 함께 막대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순간적으로 가해진 거력을 버티지 못하고 밀려난 야수묘왕이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그러나 그에게는 경악할 만한 시간조차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먹잇감을 앞에 둔 배고픈 맹수는 망설이지 않는 법이니까.
– 크아아앙!
다시 한번 터져 나온 외침이 애뇌산을 뒤흔들었다.
게이트와 몬스터가 상식이자 일상이 되어 버린 현대라면 모를까. 이 세상의 무림인들은 피어에 익숙하지 않다.
더군다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규격 외의 존재를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어 당황한 야수묘왕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흡!”
아주 미세한 경직. 야수묘왕으로서는 최선의 결과였겠지만, 높은 경지에 이른 이들의 생사결은 바로 그 한순간에 노출된 틈새로 결정되는 법.
상대가 무인이 아닌 맹수라 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쉬이이익!
느려진 세상 속, 흡사 갈고리와도 같은 흑호의 발톱이 바람을 찢은 그때.
내 손아귀를 떠난 한 자루의 창이 눈부신 빛줄기가 되어 공간을 가로질렀다.
쐐애애액! 콰앙!
하늘이 쪼개지는 굉음과 함께 반경 십여 장의 공간이 뒤흔들린다.
기운과 기운. 힘과 힘의 격돌.
그리고 짧은 순간 벌어진 격돌의 승자는 바로 나였다.
콰드드득!
창과 한 몸이 되어 뒤로 튕겨 나간 거대한 흑호의 몸뚱어리가 어둠이 내려앉은 숲 너머로 사라지자, 저 멀리 한곳에 모여 있던 수십 그루의 거목이 꺾이고 흔들렸다.
진즉 잠에서 깨어 숨죽인 채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을 산 새가 일제히 날아오르고, 수많은 잎사귀와 나뭇가지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투둑. 파사삭!
놈을 잡으려면 바로 지금이 적기다.
그러나 곧장 흑호를 쫓아가려던 나는 이내 얼마 되지 않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기척이…….’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도.
그나마 있는 단서라고는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난장판이 된 잔해와 창날이 부서진 채로 떨어져 있는 창 한 자루가 전부.
그 외에는 어떤 족적이나 혈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 기감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그것도 이 정도로 빠르게?’
주위를 노려보고 있던 그때. 백호와 함께 달려온 야수묘왕이 분노와 부끄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놈은?”
“도망친 것 같습니다. 찾을 수가 없어요.”
“……빌어먹을. 못 볼 꼴을 보였군.”
“이해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요.”
문경과 적천강도 수신룡이 발산하는 피어에 잠시나마 동요했던 적이 있었다.
야수묘왕은 십왕에 꼽힌 만큼 대단한 고수지만, 인외(人外)의 경지에 다다른 두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역으로 생각하면 야수묘왕은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빠르게 피어의 영향에서 벗어난 셈이었다.
그것이 남만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어릴 적부터 기이한 독물이나 맹수들을 자주 접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놈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혈흔이 없는 걸 보니 딱히 상처를 입은 것 같지도 않고요.”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 야수묘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다. 피하지 못할 것을 알자 마지막 순간에 창날을 물더군. 그것도 분명히 강기가 서려 있던 창날을. 남만에서 일평생을 살았지만 저런 놈은 지금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건 아닐걸요.”
“아니라니. 뭘 말이냐?”
“마지막에 하셨던 말씀이요.”
야수묘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본 적이 없더라도, 들은 적은 있으실 겁니다. 분명히.”
당장은 기척이 느껴지지 않지만, 언제 다시 놈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
자연스럽게 나와 등을 맞댄 채 주위를 경계하던 야수묘왕의 몸이 흠칫 굳었다.
“혹시.”
“아마도 지금 생각하고 계신 게 맞을 겁니다. 호북성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 이무기를 말하는 것이냐?”
신음처럼 중얼거린 야수묘왕이 말을 이었다.
“무림맹으로부터 받은 서신에 그런 내용이 있긴 했지. 하지만 내심 허황된 이야기라 여겼다.”
“아니, 남만야수궁주 맞습니까? 당장 하나뿐인 아들놈이 백호를 타고 돌아다니는 마당에 그걸 왜 못 믿어요?”
“백호를 타지, 이무기를 타고 있지는 않으니까.”
“……아.”
그것도 그러네.
하긴 이무기는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존재다. 정보의 출처가 무림맹이라고 해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 건 당연하지.
짧고 굵은 대답에 할 말이 없어진 나를 향해, 야수묘왕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방금 나타났던 놈도 남천마후, 그 요녀(妖女)의 손이 닿은 것이냐?”
“확신은 못 합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아니라고 단언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둘이 아니다.
옛 오독문의 본거지였다고는 하나 장장 백여 년 동안이나 잠잠했던 애뇌산에서 갑작스럽게 이런 참사가 벌어진 것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흑호의 강력함도 과거의 수신룡과 겹쳐 보이는 듯했다.
‘애뇌산의 망령이라니.’
도대체 놈의 진정한 정체가 뭘까.
이 자리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널브러진 이들 외에도 남아 있어야 할 이백 명의 전사와 그들이 부리는 맹수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가 무거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보던 그 순간.
– 크르륵.
피어의 영향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던 백호가 갑자기 자세를 낮추고 꼬리를 바짝 치켜세웠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나와 야수묘왕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저 멀리에서는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건……!’
나도, 야수묘왕도 다른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동물의 후각은 인간보다 수십. 수백 배는 뛰어나며, 주로 밤에 사냥을 나서는 호랑이는 그만큼 후각이 뛰어나다는 것을.
그 말은 즉.
‘이 녀석의 후각이, 내가 느낄 수 있는 기감의 범위보다 넓다.’
한 줄기 깨달음과 동시에, 나와 야수묘왕은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 * *
놈을 쫓는 과정에서 똑똑히 알게 됐다.
왜 사람들이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부르는지.
‘아. 저 씨벌놈 보게.’
나는 내심 욕을 삼키며 저 멀리 달려나가는 검은 동체(動體)를 노려보았다.
굽이굽이 진 산줄기를 아무리 달려도, 구름과 안개에 덮인 봉우리를 타고 넘어도 놈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놈은 강력한 힘과 지치지 않는 체력. 그리고 신출귀몰한 움직임으로 시종일관 나와 야수묘왕을 앞질렀고, 어디 가서 흰 털 좀 뱉는다는 영물인 백호조차 놈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상대는 평범한 호랑이가 아니니까.’
산군은 산의 왕이라는 뜻 외에도 산신령을 칭하는 단어이기도 한데, 저놈은 애뇌산의 신령이 아니라 망령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불길한 악령(惡靈)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흑호를 쫓아 이동하는 도중에 목격한 광경으로 인하여, 그런 생각은 더더욱 굳혀졌다.
“이런 찢어 죽일……!”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듯한 음성. 야수묘왕의 분노어린 시선이 향한 곳에는 사지를 축 늘어트린 채 절명한 시신들이 있었다.
깊은 골짜기와 절벽 끄트머리. 한때는 맑았을 테지만 이제는 독으로 인해 검게 물든 계곡…….
남만 전사들의 시신은 우리가 향하는 길을 따라 이정표처럼 쓰러져 있었고, 바람에 섞여든 혈향과 악취는 지독했다.
“감히, 감히 이런 짓을 벌이다니!”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참혹한 광경을 확인한 야수묘왕의 전신에서 광포한 기파가 흘러넘쳤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어느 때보다 분노하고 있었고, 그만큼 움직임은 거칠어졌다.
“노옴!”
타닥, 쐐애애액!
일순간. 가공할 속도로 뻗어 나간 신형이 흑호를 향해 거침없이 쏘아진다.
그러나 상대는 애뇌산의 망령이라고까지 불리는 존재. 정면 대결이라면 모를까. 타고난 신체적 조건과 속도로는 당해 낼 수 없다.
파팟!
예상했던 대로다.
평범한 영물의 한계를 벗어난 흑호는 붙잡히기는커녕 더욱 빠르게 거리를 벌렸고, 이내 어느 깊고 검은 골짜기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마치, 올 테면 와 보라는 듯한 눈빛과 함께.
‘뭐지?’
나는 그제야 발걸음을 늦추며 주위를 훑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거목과 넝쿨들로 온 사방이 빽빽하고, 안개가 뒤섞인 후텁지근한 공기 사이로 독 특유의 악취가 전해져 온다.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없이 놈을 쫓아 달리다 보니 애뇌산의 중심부에 도달했다는 것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느낌이 좋지 않다. 정말로.
하지만 서서히 걸음을 늦추는 나와는 달리, 곧장 골짜기 내부로 쇄도하는 야수묘왕의 뒷모습에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야율 대협. 잠시……!”
콰드득!
말릴 새도 없었고, 설령 말렸더라도 야수묘왕은 내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약간의 분노는 느슨해진 정신을 일깨우지만, 한계를 벗어난 분노는 정신을 잠재우는 법이니까.
“염병.”
작게 욕설을 중얼거린 나는 어느새 얌전해진 백호를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불길한 낌새를 느낀 듯, 초조한 기색으로 야수묘왕이 사라진 골짜기 입구를 서성이던 녀석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마치 사람처럼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방금 그거. 위험하다는 뜻이냐?”
– 크릉.
“이 자식 이거 똑똑한 거 보소. 처음으로 생각이 일치했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다.”
– 크르륵…….
“너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으니 이쯤에서 돌아가. 그리고 네 주인이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전해.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영물 축에 들 만큼 똑똑한 녀석이니, 내 말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나는 야율목이 했던 것처럼 백호의 미간을 부드럽게 쓸어 준 뒤, 골짜기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한 점의 두려움도 없이. 보무도 당당하게.
“…….”
살아 돌아올 수는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