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38
#637화
처음이었다.
이 정도로 길고 넓은 늪지대를 건너는 것도.
독무를 산 공기처럼 마셔 가며 인간이 아닌 것들과 싸우는 것도.
촤악!
난데없이 등 뒤에서 울려 퍼진 소리. 나는 부드럽게 몸을 선회하며 곧게 세운 수도(手刀)를 내리그었다.
서걱!
언뜻 보이는 몸길이만 해도 어림잡아 삼 장 이상.
그러나 날카로운 이빨도, 철갑처럼 두꺼운 가죽도 수도에 서린 기운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아마존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봤을 법한 거대한 악어가 반으로 갈라져 검게 물든 수면 위로 떨어졌다.
철벅!
비릿한 혈향과 그보다 더 고약한 악취가 흘러나왔지만, 잠깐 속이 메스꺼웠을 뿐 생각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이미 오물보다 더한 악취를 풍기는 점액질이며 핏물 따위를 전신 곳곳에 뒤집어쓴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열치열(以熱治熱)도 아니고.’
남만 리빙 포인트 개꿀팁. 악취가 걱정되면, 더 고약한 악취에 익숙해지면 된다.
“……시발 거.”
잠깐 현타가 왔지만, 2교대 상하차보다 거지 같은 독혈지는 짧은 현자 타임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쉬릭!
늪지대 사이에 숨어 있던 뱀이 목을 향해 화살처럼 튀어 오른다.
그리고 검고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낸 놈이 내 허벅지를 향하여 입을 쩍 벌린 그 순간.
뻑!
거목의 나뭇가지처럼 두꺼운 손가락이 세모꼴의 대가리를 날려 버렸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명. 힘없이 떨어지는 뱀의 꼬리를 붙잡아 늪지대에 패대기친 야수묘왕이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긴당을 늦투디 마다.”
“긴당. 뭐요?”
“됴심하다고.”
“……아, 예.”
대충 해석하자면 긴장을 늦추지 마라. 조심해라. 뭐 그런 뜻인데.
팔순을 넘긴 남만 최고의 전사가 여덟 살짜리 초등학생보다 어설픈 발음이 된 건 입 한가득 물고 있는 피독주(避毒珠) 때문이었다.
“그이 다와따.”
방금 발음은 진짜 익숙한데.
혹시 고향이 경상도 쪽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럴 상황도 아닐뿐더러, 야수묘왕의 말처럼 정말 늪지대가 끝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퀘스트 창 오픈.’
띠링.
퀘스트
[님아, 그 늪을 건너지 마오]당신은 독혈지에 진입했습니다.
옛 오독문이 본거지로 삼았던 애뇌산, 그중에서도 가장 깊숙하고도 은밀하게 숨겨져 있던 이 장소에는 알 수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았던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독이 스며든 운무(雲霧)와 수많은 망자의 넋으로 가득한 저주받은 땅.
이 너머에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그 누구도 답해 주지 못합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수밖에는.
등급 : 초절정
제한 : 진태경
임무 : ???
보상 : ???
실패 : 사망
“…….”
이건 진짜 몇 번을 봐도 어이가 없네.
이렇게 간결한 퀘스트 창은 오랜만에 본다. 임무도, 보상도 명확하지 않지만 실패하면 넌 확실히 뒤짐이라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늘 비슷했다. 현대의 게이트에서도, 무림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
간단하면서도 잔인한 논리였다.
헌터나 무림인이나, 결국 언제나 삼도천에 한 다리 걸쳐 놓고 살아가는 이들이니까.
그리고 지금껏 그랬듯이, 나는 이번에도 죽을 생각이 없었다.
철벅.
늪지대가 끝나자 비교적 무른 지면이 나타났다.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점액질이 나와 야수묘왕의 발걸음을 따라 땅에 떨어질 때마다, 가뜩이나 거무스름한 주위의 땅이 더욱 검게 물드는 것이 보인다.
“지독하군.”
피독주를 뱉어 낸 야수묘왕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끔찍한 곳은 태어나서 두 번째야.”
“첫 번째는 어딘데요?”
“정마대전. 가는 곳마다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지.”
수십만에 달하는 이들이 서로를 죽고 죽인 초유의 대전쟁과 비교할 정도니, 독혈지가 어떤 곳인지는 덧붙일 설명이 필요 없었다.
솨아아아.
온통 검게 물든 땅을 뒤덮으며 다가오는 독무(毒霧). 그 스산한 광경에 야수묘왕이 침음성을 삼켰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어렸을 때 독공(毒功)이라도 수련해 뒀어야 했는데.”
“이럴 줄 몰랐으니까 안 익히신 것 아닙니까?”
야수묘왕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일신의 무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그렇기 때문에 남들은 다 배우는 맹수 조련술도 익히지 않았던 거고.”
“그건 그렇죠. 필요 없는 걸 뭐하러 배웁니까.”
갑작스럽게 동질감이 느껴진다.
현대에 수포자와 영포자가 있다면, 남만에는 독포자와 맹포자가 있었다. 참고로 나는 수능 당시 전 과목을 모두 포기했다.
”그나저나 남만인들은 기본적으로 독공을 익히는 줄 알았는데요.”
“그럼 남만야수궁이 아니라 남만독궁이지 않았겠느냐?”
“……오.”
“중원인들의 편견이다. 남만 땅의 특성상 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부족은 주로 맹수들을 다룬다. 오독문이 발호한 이후에는 더더욱 독을 배척하게 되었고. 본 궁 대대로 내려왔다는 신물(神物)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아. 그렇습니…… 예?”
지금 뭐라고?
순간 멈칫한 내가 야수묘왕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왜?”
“아니, 방금 하신 말씀이요.”
“독공을 배척하게 되었다는 것? 심각한 피해를 입은 본 궁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거 말고요. 신물 말입니다, 신물.”
“아. 그걸 말한 거였군. 나는 또 뭐라고.”
야수묘왕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남만야수궁에도 신물이 있었습니까?”
“전통이 있는 세력이라면 신물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 직접 보고 겪은 바에 의하면 중원의 경우에는 더더욱 심하더군.”
틀린 말은 아니다. 어지간한 중견 문파는 물론, 동네 무관에서도 있어 보이기 위해 낡은 철검 한 자루를 신물이랍시고 걸어 놓으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진짜 신물이라 불릴 만한 물건이 있었다.
천년 간 명맥을 이어온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사의 신물인 녹옥불장(綠玉佛杖)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암천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로 그 신물들을 노리고 있다. 소림혈사(少林血史)라는 대사건을 일으키면서까지.
‘그런데 남만야수궁에도 그와 같은 신물이 있었다니.’
내가 알기로 남만야수궁의 역사는 삼백 년이 넘는다.
수십 개의 부족이 연합한 이 새외의 세력은 오독문과의 투쟁에서 생겨났고, 긴 싸움 끝에 남만의 패자가 되었다.
신물 하나쯤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중요한 건 이토록 중요한 이야기를 지금 처음 듣는다는 것이었다.
“그, 남만야수궁에 신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는데요.”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연 나를 향해, 야수묘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본 궁이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졌으니까.”
“예?”
“아니, 애초에 없었을 수도 있겠군. 수왕석(獸王石)의 존재는 대대로 궁주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져 오는 이야기라 실제 했는지에 대한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다.”
“수왕석…….”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내 나직한 뇌까림에 고개를 끄덕인 야수묘왕이 말을 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전설 같은 이야기다. 천하의 모든 맹수를 따르게 할 수 있다는, 초대 궁주께서 지니고 계셨다는 신물이지. 오독문의 개파조사였던 초대 문주와의 일전에서 양패구상(兩敗毆傷)한 이후에는 사라졌다더군.”
돌멩이 하나에 천하의 모든 맹수를 다스릴 수 있는 불가사의한 힘이 서려 있다니. 말 그대로 전설이 따로 없다.
게다가 수백 년 전부터 구전(口傳)을 통해 내려오는 이야기.
당장 지금부터 작업을 시작한다면, 수백 년 후에는 나도 알에서 태어났다고 우길 수 있겠다.
‘뭐, 일단은 수왕석의 존재도 염두에 둬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남천마후의 목적이 존재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전설 속의 수왕석이라는 것보다, 남만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쪽에 신빙성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다.”
“예?”
불쑥 입을 연 야수묘왕이 나와 독무를 번갈아 바라보며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그거. 하나 더 없느냐?”
여기서 말하는 ‘그거’는 다름 아닌 만독지환이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럼 잠깐 빌리…….”
“어이, 야율 씨. 헛소리 말고 피독주나 물어.”
“……지금 뭐라고?”
“아. 순간 말이 헛나왔습니다. 중독되기 싫으면 피독주 물고 계세요.”
야수묘왕은 떨떠름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지만, 이내 별말 없이 커다란 피독주를 입에 물었다.
비록 말석이라고는 하나 그는 십왕(十王)에 속할 만큼의 고수.
드높은 경지에 오른 무위와 웅혼한 공력을 지닌 만큼 독에 쉽게 당할 리는 없지만, 최소한의 예방책은 늘 필요한 법이다.
‘상급 피독주 정도면, 어지간한 독은 침투 못 하겠지.’
물론 사천당문의 신물인 만독지환을 끼고 있는 나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나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야수묘왕이 독무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유난히 크게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
온 사방을 뒤덮은 진녹색의 안개는 한 치 앞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짙었고,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마치, 사냥감을 지켜보는 것처럼.’
희한한 일이었다. 짙은 독무 사이로 이곳을 바라보는 무언가의 시선이 느껴지는데도, 오히려 늪지대에 있을 때보다 주위가 잠잠하다는 것은.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 십여 장 밖. 북서쪽 작은 풀숲. 알고 있느냐?
귓가를 파고드는 전음.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바위 옆 풀숲 말입니까?
– 그래. 뭔가가 있다. 혹시…….
나는 애뇌산의 망령을 떠올렸다. 놈에게서 느꼈던 유령 같은 기척과 빛살과도 같은 움직임을.
– 놈은 아닙니다. 만약 놈이라고 해도 이 거리라면 잡을 수 없을 거고요.
– 그건 하기 나름 아니겠느냐.
동시에 야수묘왕이 번개처럼 일장(一掌)을 뻗었다.
파앙!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고 짙은 안개가 찰나의 순간 흩어진다.
일시적으로 밝아진 시야 너머로 쏘아진 막강한 장력이 풀숲을 폭풍처럼 휩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커헉!”
비명이 있었다. 맹수가 아닌, 틀림없는 인간의 비명이.
“……!”
“……!”
일순간, 크게 뜨인 눈으로 서로를 마주본 나와 야수묘왕은 비명의 근원지를 향해 전광석화처럼 쇄도했다.
쐐애애액!
안개를 가로지르는 찰나의 시간 속,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런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두 글자는 바로 암천(暗天)이었다.
‘놈들이다.’
남만의 금지인 애뇌산. 그중에서도 독혈지에 왜 사람이 있겠나.
찌릿한 무언가가 전신을 관통하는 듯했다.
나는 크게 요동치는 심장을 느끼며 십여 장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그리고 풀숲에서 튕겨 나간 비명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얼빠진 음성을 흘렸다.
“이게 무슨……?”
입가에 묻은 검붉은 핏물. 부릅뜬 눈.
그건 틀림없는 인간의 시신이었지만, 나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백족의 전사가 왜 여기에.”
의문이 실린 야수묘왕의 공허한 목소리처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살아 있었던 시신의 정체는 바로 백족의 전사였다.
그리고 수의(壽衣)처럼 새하얀 옷을 걸친 채 숨이 끊어진 그의 몸뚱어리는 끈적하고 질긴 무언가로 칭칭 휘감겨 있었다.
‘밧줄. 아니, 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 나와 야수묘왕의 눈동자가 크게 뜨인 바로 그때였다.
파슥. 파스스슥.
도대체 언제.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일까.
사방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기척과 동시에, 문득 머리 위로 내려앉은 어둠을 느끼고 고개를 든 나는 마침내 볼 수 있었다.
스스스슥!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나무 위에서 유령처럼 내려오는 어떤 존재들을.
검은 몸통과 수많은 다리. 뻣뻣한 털이 달린 그것을 발견한 야수묘왕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천년지주(千年蜘蛛).”
독혈지의 괴물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