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40
#639화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천년지주(千年蜘蛛)가 아무리 대단한 독물이라고 해도 그 본질은 결국 거미였다.
놈들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독혈지 곳곳에는 거미줄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고, 천년지주 오 남매의 마지막 생존자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거미줄을 타고 도주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한 가지 예측하지 못했던 건…….
퉁! 쉬쉬쉬쉭!
저 거대한 거미 놈이 도망치는 속도가, 생각 이상으로 훨씬 빨랐다는 거다.
‘……아니, 뭔데 저렇게 빨라.’
놈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중이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만일을 대비하여 거미줄을 곳곳에 깔아 두어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건 천년지주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수십여 장 위의 허공과 거목 사이를 오가며 도망치는 놈을 잡을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스파이더맨이 괜히 빠른 게 아니었…….’
내심 중얼거리며 경신법을 펼치던 그 순간. 전신을 엄습하는 알 수 없는 한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사각!
예리한 절삭음과 함께 한 움큼이나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린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거미줄이었다.
철사만큼이나 단단하고 탄력을 지닌 그것이 가파른 속도를 만나 예리함을 지니게 된 것이다.
“야율 대협!”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경고를 담아 외쳤지만, 나보다 체격이 크고 움직임이 거친 야수묘왕의 대처는 늦은 감이 있었다.
서걱!
뭐지. 면도기 CF를 본 것 같은데.
살과 뼈 대신 정수리가 깔끔하게 밀린 야수묘왕이 처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불렀느냐.”
“……아닙니다. 그냥 불러 봤어요.”
풍성한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던 머리카락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산성을 듬뿍 머금은 천년지주들의 가래 세례와 거미줄에 의해 잘려나간 야수묘왕의 정수리는 막 뭍으로 올라온 문어처럼 번쩍 빛나고 있었다.
‘닥터 옥토퍼스와 스파이더맨의 대결인가.’
선악이 뒤바뀐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히어로 영화의 한 장면을 직관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웅장해진다.
물론 그와는 반대로 머리숱이 조촐해진 문어묘왕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놈! 감히!”
당연하게도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머리숱 때문만이 아니었다.
제각각 다른 부족이라고는 하나, 하루아침에 백성이나 다름없는 수백여 명의 전사들을 잃은 그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로부터 광포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콰아앙!
야수묘왕이 거세게 발을 구른 순간, 독과 습기로 눅눅한 지면이 싱크홀처럼 움푹 주저앉는다.
동시에 막대한 반탄력을 이용하여 높게 뛰어오른 그가 일권을 내질렀다.
후우웅, 파앙!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가고 바람이 물결쳤다.
공간을 가르며 발출 된 권기(拳氣)가 어둠에 녹아든 거미줄을 끊으며 천년지주를 향해 쏘아졌다.
쐐애애액! 쉭!
하지만 나와 야수묘왕의 바람과는 달리 발출된 권기는 허공을 갈랐고,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천년지주는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 시시시시싯!
그것은 평범한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전음(傳音)처럼 귓속을 파고드는 기이한 소음이 공간을 울리며 퍼져 나가자, 날 선 감각으로 수많은 움직임들이 느껴졌다.
‘이건.’
사사삭.
독혈지를 죽음의 땅으로 변모시킨 독무(毒霧)와 검게 물든 풀숲.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거목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들’의 모습에,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한 단어를 떠올렸다.
‘독물의 왕.’
천년지주를 가리키는 그 표현은 짧고 정확했다.
독혈지 곳곳에 웅크린 채 명령을 기다리던 독물들은 마침내 왕의 부름에 답했고, 무수한 숫자의 군세가 되어 나와 야수묘왕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스륵. 스스슥!
채찍처럼 길고 커다란 뱀과 지네. 사람의 머리만 한 거미와 두꺼비. 거목의 잎사귀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수백 마리의 벌떼까지.
도무지 종류를 알 수 없는,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은 흉측한 모습을 한 독물들이 서로를 향해 뭉치고 잇는다.
눈 깜짝할 새에 수십에서 수백이 되고, 수백은 수천으로 불어나 마침내 하나의 벽을 완성시켰다.
콰아아아!
오직 한 길로 이어진 독혈지를 가로막고, 거대한 삼각파도가 되어 덮쳐오는 무수한 독물들.
그리고 훨씬 낮아진 허공에서 거미줄을 밟은 채 우리를 내려다보는 천년지주.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왕처럼 지상을 굽어보는 놈의 모습에,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씨벌놈. 이제와서 멋있는 척은.”
처음부터 이것을 노린 것이 틀림없다.
남만은 확실히 염병할 땅이다. 무슨 놈의 짐승이며 거미가 이렇게 교활한지.
애뇌산의 망령이라는 흑호를 따라 독혈지에 진입했고, 그곳에서 만난 천년지주는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에 도달하자 마침내 모든 호위병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까지 직접 겪은 것만 해도 어지간한 인간에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지능이다.
‘특히 어떤 식충이 놈에 비하면 아인슈타인이지.’
문득 태산을 떠올린 나는 야수묘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만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그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인지, 얕은 침음성을 흘린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겁먹을 필요 없다. 나도, 너도 이곳에서 죽지 않을 테니.”
겁?
나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아마 저것보다 나와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먼 단어도 찾기 힘들 거다.
돌이켜 보면 나는 늘 겁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죽음의 위기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겁이 없어서 헌터가 됐고, 나중에는 겁이 많아서 무공을 익혔지.’
참 희한한 일이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던 주제에, 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장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난 죽지 않을 것 같다.
콰아아아아!
넘실거리며 가까워지는 독물들의 파도를 바라보며, 나는 불쑥 입을 열었다.
“저것들이 사라지면, 그 즉시 놈을 죽이십시오. 아니다. 딱 숨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만.”
“뭐?”
“명심하세요.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안 됩니다. 방심한 채 높이를 낮춘 지금 처리해야 해요.”
“그게 무슨…….”
지금.
나는 야수묘왕의 반문에 대답하는 대신 부드럽게 지면을 밟았다. 단전에서 솟구친 공력은 이미 발끝을 향해 치달리는 중이었다.
스륵. 쾅!
압축. 그리고 폭발.
발끝이라는 일점(一點)에서 터져나간 공력이 내 전신에 빛살과도 같은 속도를 선물한다. 동시에 일진광풍이 온몸을 휘감고 진녹색의 독무가 흩어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 수천 마리에 달하는 독물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콰아아아!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짙은 그늘.
가뜩이나 어두운 독혈지가 완전한 어둠에 잠긴 그 순간. 내 손에 들린 백염(白炎)의 창날로부터 휘황한 빛이 터져 나왔다.
우우웅.
흡사 벌떼가 우는 소리와 함께 하늘보다 푸르른 화염이 깃든다.
삼 갑자에 달하는 강대한 열양지기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잇고, 뭉치며 더욱 거대한 겁화(劫火)로 화한다.
그리고 그 끝에.
‘일섬(一殲).’
구구구구궁!
어둠을 찢고 땅과 하늘마저 떨어 울리는, 섬광과 굉음이 있었다.
* * *
야수묘왕 야율척은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야인(野人)이라고 생각했다.
예의범절과 고상한 태도과는 거리가 먼, 거칠기 짝이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사람.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살다 보니 앞장서서 책임져야 할 일도. 뭐 하나 볼 것 없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도 생겼다.
거침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그는 어느덧 백족의 대족장이 되었고,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남만야수궁의 궁주라는 막중한 자리에 올라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평생 무공만 수련했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엎질러진 물이었다. 돌이키기에는 늦었고, 주워 담기는 불가능했으니 그는 궁주의 책무에 최선을 다했다.
누군가를 두들겨 패는 일도 없어졌고, 숨 쉬는 것보다 자연스럽던 욕설도 줄였다.
말귀를 더럽게 못 알아 처먹는 부족장의 귓방망이를 후려친다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겠지만, 이제는 귀가 영영 안 들리게 될 그 부족장이 남만야수궁에 반기를 들 테니까.
하지만 오랜 궁주 생활로 훨씬 얌전해진 야수묘왕의 입술도,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목격한 순간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어, 저게 씨벌 뭐여. 어어어.”
구구구궁!
모든 것이 부서지고, 녹아내린다.
수천 마리로 이루어진 독물의 파도가, 그의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심심하면 곰을 사냥하는 쌍두각사(雙頭角蛇)도. 한 방울의 독으로 백 마리의 황소를 죽이는 흑와(黑蛙)도. 반 각이면 호랑이를 뼈만 남기고 발라먹는다는 금봉(金蜂)도.
화륵. 콰아아아아!
그 흉측함만큼이나 강한 힘을 지닌 수천 마리의 독물이, 어둠을 밝힌 푸른 화염와 굉음 앞에 잿더미로 화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정마대전 이후 장장 오십여 년만이었다. 이런 경악스러운 광경은.
그토록 강했던 마교의 검마(劍魔)가 죽기 직전 펼쳤던 최후의 절초도 눈앞의 광경에 비할 수는 없었고, 그런 검마의 마지막 일격을 손쉽게 피하고 죽기 직전까지 자근자근 짓밟은 화왕(火王) 적천강조차 이 정도의 파괴력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그. 야수묘왕 야율척조차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어떻게.’
숨길 수 없는 경악과 의문. 부릅뜬 눈으로 타오르는 겁화 앞에 우뚝 선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야수묘왕은,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한 마디를 떠올렸다.
‘저것들이 사라지면, 그 즉시 놈을 죽이십시오. 아니다. 딱 숨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만.’
“……!”
처음에는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나 싶었는데, 그 헛소리가 현실이 되어 버렸다.
동시에 야수묘왕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쾅!
굉음과 함께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신형. 비록 야수묘왕의 움직임은 반 박자 늦었지만, 그것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던 상황을 맞이한 천년지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 시, 시싯?
혼란스러운 듯,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던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눈동자가 야수묘왕을 발견하고 우뚝 멈춘 순간.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날아오른 그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맺혔다.
“드디어 잡았다. 이 찢어 죽일 놈.”
– ……!
천년지주가 저지른 결정적인 패착은 두 가지였다.
첫째. 젊은 인간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
둘째. 늙은 인간의 부족민들을 죽이고, 그가 평소 자랑스럽게 여기던 풍성한 머리카락을 밀어 버린 것.
촤아악!
마지막 저항으로 내뿜은 점액질은 허공을 갈랐고, 야수묘왕이 뻗은 손은 천년지주의 다리를 잡았다.
콰득!
– 시이이이잇!
천년지주는 다리가 뽑혀 나가는 통증과 함께, 비명을 내지르며 땅으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