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42
#641화
간혹 그런 순간이 있다. 단지 어떤 것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처럼.
스아아.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희미한 달빛은 신화 속 한 장면처럼 신비로웠지만, 그 달빛이 비치고 있는 것은 평화로운 푸른 호수가 아니었다.
‘이건…….’
어둠과 스산함이 깃든 늪지. 그리고 마치 누에고치처럼 거미줄에 겹겹이 감싸인 수백여 개의 커다란 형체들과 그보다는 작지만 몇 배나 많은 새하얀 알들.
‘도대체 뭐지?’
답을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의문이 마음을 짓누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본능적으로 내뻗은 손은 이미 가장 가까운 곳에 매달린 정체불명의 누에고치를 건드리고 있었다.
툭.
손가락 끝을 통해 전해지는 불쾌한 촉감. 그와 동시에 시스템 알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삐빅. 띠링.
– [천년지주의 마비 독]에 중독되셨습니다!
– 신속하게 해독하지 않을 시 [전신 마비]와 [의식 불명]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 [만독지환]의 잠재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 [독]과 관련된 모든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잠깐 얼얼해지나 싶던 손가락 끝이 시원해진다.
만독지환은 무형지독 마저 흡수하는 신물(神物). 천년지주가 아무리 특별한 독물이라 하더라도 나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게 천년지주의 거미줄이라면…….’
문득 한 가지 짐작이 뇌리를 스친다. 나는 손에 한층 힘을 실어 거미줄을 좌우로 잡아 뜯었다.
콰득. 지지직.
수백 겹으로 뭉쳐져 있던 거미줄이 무시무시한 악력에 힘없이 찢겨 나간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무언가의 모습이 드러나자, 옆에서 지켜보던 야수묘왕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사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한 치의 미동도 없는 몸.
거미줄 안에서 나타난 이름 모를 사내의 완맥(緩脈)을 짚은 야수묘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아직 숨이 붙어 있다.”
나로서도 충분히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앞서 시스템이 알려 준 바에 의하면, 천년지주의 거미줄에는 대상을 절명(絶命)에 이르게까지 하는 독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겠지. 그래야 놈들이 원할 때 배를 채울 수 있을 테니까.’
비로소 알겠다.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 왜 나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는지.
‘도축장.’
이 늪지는 천년지주가 머물던 거처이기 이전에, 하나의 도축장이며 거대한 식량 저장고다.
그제야 사방에서 풍겨 오는 악취에 가려져 있던 짙은 혈향(血香)을 알아차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거미 새끼들. 오랫동안 많이도 해 처먹었네.”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과거 오독문이 독혈지를 만들었다는 남만야수궁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 세월 동안 이곳에서 죽어 간 이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천년지주의 습성 덕분에 오늘은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게 되었지만.
‘확실히 이상하긴 했지. 죽은 사람보다 사라진 이들이 더 많았으니까.’
애뇌산에 주둔하고 있던 정예들의 숫자는 총 삼백여 명이다.
다섯 마리의 천년지주는 그중 백여 명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적당히 허기를 채운 후 남은 이들을 독혈지로 끌고 온 것이 확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례대로 한 끼 식사가 됐을 그들을 지금 우리가 구하게 된 거고.
“이런 쳐 죽일 놈들을 봤나!”
나는 분노로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야수묘왕을 진정시켰다.
“그, 말씀 중에 죄송한데, 이미 쳐 죽이셨습니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다!”
“어…….”
그럼 또 내가 할 말이 없지. 하지만 당장은 분노하는 것보다 현재 상황을 수습하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다.
잠시 후 분노를 가라앉힌 야수묘왕은 참담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감히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다니.”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는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틀림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내가 궁주로 있는 동안은 아무 문제도 없었어.”
“그거참 희한하네요. 갑자기 이런 시기에 천년지주가 다섯 마리나 나타나서 전사들을 습격하다니.”
다분히 의도가 묻어나는 내 말에 잠시 침묵하던 야수묘왕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암천(暗天). 놈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손이 닿았는지는 몰라도 입김 정도는 불었을 겁니다. 독물인 천년지주가 사람을 습격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지금 같은 시기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정말 암천의 소행이라면, 네가 떠난 뒤에 시작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부족 대회의 마지막 날에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 놈들에게는 오히려 손해일 테니까.”
“그건…….”
나도 모르게 말꼬리가 흐려진다. 그만큼 야수묘왕이 내놓은 대답은 의외로 날카로웠고, 쉽게 부정할 수 없는 근거가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지. 만약 내가 남천마후, 그 썅년이었다면 굳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테니까.’
가만히 놔둬도 남만야수궁의 입맹(入盟)이 무산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던 상황. 암천으로서는 괜히 남만을 들쑤실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지금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애뇌산의 망령. 난데없이 살육을 벌인 다섯 마리의 천년지주와 암천과의 연관성.
한동안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깨운 것은 야수묘왕의 목소리였다.
“그보다 당장은 이들을 옮기는 것이 문제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다시 독혈지를 빠져나가는 건 다른 문제니까.”
상념을 멈춘 내가 대답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놔두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대로? 이곳에 계속 말이냐?”
“……아니, 제가 무슨 미친놈입니까? 당연히 남만야수궁으로 데려가야죠. 백호에게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했으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야호를 말하는 모양이군. 어지간한 사람보다 영특한 녀석이니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다.”
“…….”
“표정이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웃참 실패할 뻔.
무야호라니. 저 이름은 들으면 들을수록 적응이 안 되네. 무너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수습한 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거미줄은 뜯지 말고 그대로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독 때문이군.”
“예.”
오는 길도 어려웠지만, 돌아가는 길은 훨씬 힘들 거다.
지난 몇 시진 동안 전신 마비와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다가 겨우 깨어난 환자 이백여 명과 함께 독무(毒霧)를 헤쳐 가야 할 테니까.
‘만독지환의 공능이 어디까지 커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만독지환은 분명히 신비한 힘을 지닌 신물이지만, 이것 하나만 믿고 이백 명의 목숨을 확률 절반짜리 가챠를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이대로 거미줄에 감겨 있는 것이 안전하지.
“저 안에 있으면 최소한 독무의 영향은 안 받는 것 같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이미 여기까지 오는 길에 다 죽었을걸요.”
“그도 그렇군. 거미줄에 스며있는 천년지주의 독이 다른 잡독을 막아 주는 것일지도 모르지.”
어떤 의미로는 이독제독(以毒制毒)과 비슷한 맥락이다.
오는 길에는 거미줄로 이루어진 관짝이었겠지만, 지금부터는 독무로부터 목숨을 지켜 줄 냉동 캡슐이다.
일일이 한 사람씩 꺼내서 해독시켜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뚜렷한 편이고.
기껏해야 이런 대화 정도다.
‘자. 환자분. 천천히 눈 뜨세요. 지금 눈앞에서 흔들고 있는 제 손가락 보이세요? 보이시면 개수 말해 보세요.’
‘으으음. 하나, 하납니다.’
‘무슨 손가락인가요?’
‘중지요.’
‘네. 엿 먹으라는 뜻입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간단한 시험이었어요. 어쨌든 좋습니다. 이제 정확히 보고 들으시는군요. 시각과 청각 모두 회복됐어요.’
‘흑흑.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족 선생님.’
‘허허. 뭘요. 그나저나 해독했으니 마비가 풀렸을 텐데. 뭐 어떻게,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으신가요?’
‘물론입니다. 이제 충분히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럼 이제부터 손가락을 좀 쓸 일이 있는데. 그전에 혹시 성함이?’
‘저요? 장삼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이 단도를 드릴 테니까, 지금부터 이 목판에 제가 부르는 대로 써 보세요.’
‘예, 예.’
‘자. 지금부터 제가 부르는 대로 쓰시는 겁니다. 장삼.’
‘장. 삼.’
‘이곳에 잠들다.’
‘이곳에 잠들. 예?’
‘사실 당황하실까 봐 말씀을 안 드렸는데, 이제 곧 왔던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피독주가 없어요. 아, 물론 저는 만독지환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
‘저는 ‘무적’입니다. 만독지환은 ‘신’이고.’
으음.
만독지환을 차지하기 위한 이백 대 일의 혈투가 벌어지겠구만.
어쩌면 이백 대 이일지도 모른다. 야수묘왕도 크고 아름다운 최상급 피독주를 갖고 있으니까.
“……왜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거지?”
“별거 아닙니다.”
“혹시 암천이냐?”
“아뇨. 하늘 천인데요.”
내 대답에 야수묘왕이 정색했다.
“진짜 미친놈인가……?”
부장님이었으면 웃었을 텐데, 궁주님이라 안 먹히는 모양이다.
두 발로 걷는 천년지주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본 야수묘왕은 거미줄에 휘감긴 전사들을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곧게 편 수도(手刀)가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매달려 있던 이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 숫자가 무려 이백. 짐작대로 애뇌산에서 사라진 전사들의 숫자와 거의 비슷했다.
‘잠깐. 맹수들은?’
야수묘왕을 도와 생존자들을 옮기던 나는, 잠시 잊고 있던 생각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처음 애뇌산을 수색하며 느꼈던 의문 중 하나. 사라진 맹수들의 모습은 이곳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곧 그 사실을 알아차린 야수묘왕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일이군. 맹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혹시 맹수들이 겁이 많은 편입니까?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면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든지.”
“궁금해서 묻는 건데, 혹시 맹수 뜻을 모르나?”
알지. 사나울 맹. 짐승 수.
그래서 더 이상한 거다. 그토록 많은 맹수가 주인을 놔두고 어디로 도망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천년지주가 편식을 하는 것도 아닐 거고.’
이 부분은 내가 잘 안다. 7년 가까이 살았던 희망 고시원에는 희망보다 거미가 더 많았으니까.
나중에는 친밀감까지 느껴서 라면도 나눠 줬을 정도다.
‘그럼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독혈지를 좀 더 수색해 봐야 알겠지만, 천년지주가 종류별로 식품을 나눠 보관할 만큼 꼼꼼한 성격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나와 야수묘왕이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그 순간.
바스락.
작은 소음과 함께, 십여 장 밖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