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46
#645화
누가 먼저 선을 넘었을까.
나? 아니면 백상?
그리고 나와 그가 나누었던 말 중, 무엇이 진실이며 거짓일까.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의문들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런 건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말과 생각이 아니라 오직 힘으로 결과를 논하는, 순수한 무림인들의 시간이니까.
쉭!
귓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파공성.
소리를 듣기도 전에 고개를 꺾어 날아드는 지풍(指風)을 피해 낸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에 놓인 석탁(石卓)을 짚었다.
쿠웅!
거대한 암석을 깎아 만든 탁자가 진동한다.
동시에 튕겨지듯 허공으로 떠오르는 서른세 개의 술잔. 나는 부드럽게 손을 내뻗어 그중 일부를 밀어 냈다.
퉁.
오직 한 사람. 백상을 향해.
쉬쉬쉬쉭!
그것은 나무를 대충 다듬어 만든 투박한 술잔들에 불과했으나, 내가 흘려보낸 공력을 머금자 무시무시한 흉기로 돌변했다.
화살보다 빠른 속도. 그리고 바위도 부술 만큼의 파괴력.
하지만 상대는 침착했고, 침착하기 이전에 강했다.
후웅, 서걱!
곧게 편 수도(手刀)가 횡으로 휘둘려지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가 허공을 격하고 날아들던 술잔들을 갈랐다.
그리고 힘을 잃은 채 산산조각이 난 술잔의 파편이 지면에 떨어지기도 전, 솟구치듯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파팟!
대전에 내려앉은 어둠 너머에서 새하얀 옷자락이 유령처럼 흩날린다.
어느덧 석탁 위를 가로질러 오 장에 달하는 거리를 지워 버린 그가 앉아 있던 내 정수리를 향해 일권(一拳)을 내리찍으려던 그 순간.
“선을 넘으시네, 또.”
나는 낮은 뇌까림과 함께 손바닥을 쳐올리듯 내뻗었다.
화륵.
화염신장(火焰神掌).
어둠을 살라 먹으며 타오른 화염이, 눈부신 강기가 서린 백상의 일권과 맞닿는다.
각각 희고 푸른 기운이 뒤섞이며 터져 나온 섬광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콰앙! 구구궁!
내리꽂히는 일권과 쳐올리는 일장. 노인과 청년. 원초적이며 순수한 힘의 충돌.
거센 진동과 굉음이 대전을 뒤흔들었고,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화아아악!
맞닿은 일점(一點)을 중심으로 폭발하듯 흘러나온 광휘 너머, 크게 뜨인 한 쌍의 눈동자를.
“……!”
언제나 서늘한 빛을 발하던 백상의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낯익은 감정. 익숙한 눈빛이다.
지금까지 나와 마주친 이들 중 대부분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들은 내 이름과 별호가 무림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간혹 그 사실을 망각한 듯 때 이른 과소평가를 내리고는 했다.
나이가 어려서. 출신 가문이 한미해서. 혹은 전란(戰亂)을 겪어 보지 못한 애송이라서.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말이 아닌 힘으로.
‘바로 지금처럼.’
입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은 뇌까림과 함께, 나는 전신에 충만한 기운을 한층 더 강하게 끌어올렸다.
콰아아아!
자그마치 삼 갑자에 달하는 강대한 공력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다.
열양지기가 뿜어내는 끔찍한 열기에 주위의 수분이 증발하고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츠츠츠츠!
활짝 펼친 손바닥에 가로막혀 있던 주먹이 서서히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는 백상의 눈동자에, 타들어 가는 그의 새하얀 옷자락과 담담한 내 얼굴이 차례대로 스친다.
열기에 쩍쩍 갈라진 백상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놈…….”
대단한 평정심이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내가 들었던 말 중 대부분은 씨발놈, 개새끼, 미친놈이었으니까.
그러나 백전(百戰)을 치르며 단련된 것일까. 아니면 수만의 부족민을 이끄는 대족장이기 때문일까.
백상의 감정은 출렁일지언정 흘러넘치지 않았고, 그의 무위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뛰어났다.
스슥!
까맣게 타들어 간 옷깃이 팔뚝을 스친다. 어느새 굳게 말아쥐고 있던 주먹이, 매의 발톱처럼 펼쳐져 섬광 같은 속도로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니, 아마도 틀림없이 움켜쥐었을 것이다.
내 움직임이 그보다 더 빠르고, 강하지 않았다면.
콰득!
이미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힘.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손목을 조이자, 고통을 느낀 백상의 눈썹이 움찔 떨리며 짧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흡!”
그리고 나는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백상의 손목을 옆으로 틀어 다른 한 손을 봉함과 동시에 중심을 흐트린 다음, 남은 한 손으로 옆구리를 향해 일장(一掌).
퍼엉!
나는 둔중한 파공음이 들리기도 전에 그의 손목을 놔주었다.
수십여 쌍의 시선이 지켜보는 앞에서, 옆구리를 후려친 장력에 의해 튕겨 나간 백상이 허공에서 몸을 틀어 석탁 위에 내려앉았다.
슥.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가벼운 몸놀림이었지만 표정은 정반대다.
그리고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백상이 재차 움직이려던 그때.
“그만.”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깊은 울림과 위엄이 담겨 있었다.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난 야수묘왕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물러서라. 두 사람 모두.”
백상의 신형이 흔들렸고,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전 안 움직였는데요.”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록 의자를 좀 뒤로 빼긴 했지만, 먼저 쇄도한 것은 백상이었고 나는 앉은 채로 수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뭐.
귀신에 홀린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다른 부족장들의 눈빛이 그 증거고 결과다.
“진태경.”
하지만 최소한의 처신 정도는 해야 했다. 이곳은 내 홈그라운드가 아닌 남만이고, 상대는 백족의 대족장이었으니까.
야수묘왕의 질책 어린 부름에 나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던 상황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물론 그래도 짚고 넘어가긴 해야지.
백번 양보해서 문제의 발단은 나였을지 몰라도, 백상이 펼친 수는 자칫하면 절명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공격이었다.
“……후우.”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나직한 한숨을 내쉰 야수묘왕의 시선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움직였다.
“백상,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차가운 눈동자에 갈등이 스친다.
등 뒤에서 들려온 야수묘왕의 부름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나를 응시하던 백상이 문득 주위를 둘러봤다.
서른 명이 넘는 부족장들.
그들의 반응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는 이도 있었고, 웃음을 참는 듯 입가를 씰룩이는 자도 있었으며, 내 무위를 목격하고 반쯤 넋이 나간 이들도 있었다.
이건 남만야수궁 내에서 파벌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백상의 위상과 명성에는 쉽게 지울 수 없는 흠집이 새겨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중원에서 온 한족 애송이에 의해서.
“…….”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백상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는 야수묘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억눌린 목소리와 함께.
“분란을 일으켜 송구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시 뵙지요.”
그리고는 곧장 까맣게 그을린 옷자락을 펄럭이며 대전을 빠져나갔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일어난 요희가 그 뒤를 따랐고, 허둥지둥 움직이는 흑웅과 절반에 달하는 부족장들 역시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주님, 송구하지만 그럼…….”
“가, 같이 갑시다.”
저들이 친(親) 백상파로 분류되는 이들일 것이다. 평범한 온건파와는 달리 무림맹 입맹을 결사반대하는 자들.
서른두 명의 부족장 중 대략 절반에 달하는 이들이 그렇게 자리를 비우자, 야율목은 분노로 미간을 찌푸렸고 야수묘왕은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이 사달이 났군.”
내가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벌어진 일 같네요.”
“후우,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언제고 터질 문제였지.”
“아하, 그럼 다행이고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습니다.”
“…….”
그 순간. 아직 남아 있던 부족장들은 물론이고 야율목과 야수묘왕까지 짜게 식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 너 때문인 거 맞아. 이 새끼야.
뭐지, 환청인가? 분명히 전음은 아닌데.
희한한 현상에 고개를 갸웃거린 내가 재차 입을 열었다.
“혹시 대회의가 이대로 끝난 건 아니죠?”
“대회의는 축제와 더불어 사흘간 진행된다. 참석 전에 이미 들었을 텐데?”
“듣긴 했는데 혹시나 해서.”
내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야수묘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
“그래도 지나치기에는 너무 찜찜했습니다. 진짜 반응도 궁금했고요.”
“그 호기심 때문에 넌 일만이 넘는 백족을 적으로 만들었다. 백상을 따르는 요희와 흑웅. 두 대족장과 다른 이들까지 합하면 남만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음. 남만의 절반이라.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네요.”
“뭐라?”
“한 이틀 전만 해도 남만 전체가 제 적이었거든요. 대회의는 뭐, 시작도 전에 쫓겨날 판이었고.”
“……허. 참.”
헛웃음을 흘린 야수묘왕이 남아 있던 부족장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장 족장. 그리고 고 족장.”
“예.”
“이번에는 그대들이 도와줘야겠다. 우선은 발 빠른 전사들로 척후대를 꾸리고, 귀주 방면 쪽을 감시하도록.”
“혈승(血僧)이라는 자 때문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야수묘왕이 재차 입을 열었다.
“백상과 진태경의 의견 모두 일리가 있다. 놈이 구태여 남만으로 향할 이유도 없지만, 암천의 인물이라면 그에 따른 대비를 해야 옳겠지.”
“궁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존명.”
앞서 떠난 부족장들이 백상에게 속해 있다면, 남은 이들 중 대부분은 야수묘왕에게 충성을 바치거나 상당히 호의적인 중도파다.
중견 부족을 이끄는 두 족장이 묵묵히 명령을 따르자 야수묘왕의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오늘 밤.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고 그들을 위한 연회를 열 것이다. 대회의는 그 후에 속행할 테니 지금은 이만 물러가도록.”
* * *
“어떻게 됐나?”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온 남호가 물었다.
“혹시 또 사고를 친 건 아니겠지?”
의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 내가 뭐라 대답하려던 그때, 혁무진이 버럭 역정을 냈다.
“이보시오. 남 노인! 감히 우리 조장님을 뭘로 보고!”
“뭘로 보긴 뭘로 봐. 미친놈으로 보지.”
“어허. 아무리 조장님이 미친놈이어도 그건 아니지! 다른 자리도 아니고 그토록 중요한 자리에서 사고를 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양심이 찔린다면 정상인가.
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적어도 주화란이 참전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남 노야(老爺). 말이 너무 심하세요. 각주님이 미친놈이라니요.”
남호의 급격한 노화 원인이 태산이라면, 유일한 약점은 바로 주화란이다.
그녀의 등장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당하던 남호가 듬성듬성한 정수리를 긁적였다.
“아니, 뭐. 그게.”
“우리 각주님은 무림맹을 대표하셔서 오신 분이에요. 물론 조금 거친 면이 있을 수는 있어도. 입맹을 성사시켜도 모자랄 판에 대회의처럼 중요한 자리에서 분란을 일으키실 분이 아니라고요.”
“…….”
제발 죽여 줘.
이제는 찔리다 못해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그사이 주화란은 열렬한 선거 지지자처럼 다른 이들에게까지 동의 표를 구하고 있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왜 대답이 없으시죠?”
언제나처럼 조용하던 송일섬이 입맛을 다셨다.
“음. 소국주. 아무래도 그건 당사자의 대답을 들어본 후에…….”
“특별 수당 추가.”
“다시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소. 각주가 그럴 리 없지.”
돈에 미친 새끼 컷.
“다른 두 분은 왜 말이 없으시죠?”
“태산이. 배고프…….”
“저녁에 연회가 열린다던데.”
“태산이. 주 소저 말씀에 매우 동의한다.”
“……나도 동의하오.”
식충이 컷.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전 약혼자 컷.
지지 서명 운동은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었고, 주화란은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각주님도 뭐라고 한 말씀 해 보세요. 그래서, 입맹하기로 한 건가요?”
일 초가 한 시간 같다.
나는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기. 여러분. 음. 그게. 그…… 사소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화란은 얼어붙었고, 남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봐. 미친 각주놈.”
“…….”
“죽였나?”
“아뇨.”
“그럼 때렸군.”
“…….”
“누구야? 멋모르고 덤빈 어느 부족장? 아니면 거슬리는 말을 한 다른 누군가? 설마하니 백족의 대족장은 아니겠지.”
“아.”
“각주님?”
“…….”
“……각주님?”
조금씩 흐려지는 주화란의 목소리에 나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먼 산을 바라봤고, 남호가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봐. 미친 새끼 맞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