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47
#646화
이대로면 대역죄인이 될 판이라, 나는 결국 대회의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야 했다.
물론 중간중간 들어오는 질문에 대한 답도 함께.
“절반이 넘는 부족장들의 인정을 받았다고요?”
“예, 포권도 하더라고요. 부족민들이랑 혈육을 구해 줘서 고맙다고.”
“세상에. 기다려도 안 오시길래 충분히 짐작은 했는데……. 외부인, 그것도 한족이 부족 대회의에 참석한 건 남만, 아니 무림 역사상 최초일 거예요.”
놀라는 주화란의 모습에, 옆에 있던 남호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암. 최초지. 부족 대회의에 외부인이 참석한 것도 최초고, 그 외부인이 백족 대족장이랑 한판 붙은 것도 최초지. 아암, 그렇고말고.”
“…….”
“…….”
“허허. 아주 자랑스럽고 기뻐서 웃음이 절로 나오는구나.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라.”
매우 신경 쓰였지만, 일단 계속했다.
“어쨌든 그렇게 대회의가 시작됐는데…….”
이어지는 내 설명을 듣고 있던 주화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혈승(血僧)이요?”
“네. 지금 귀주 땅을 휘젓고 있다더라고요. 벌써 기백 명을 쳐 죽이고 활개를 치고 있다던데 전 이번에 처음 들어 본 별호라서. 혹시 주 소저께서는 들어 본 적 있으세요?”
용봉표국의 본거지는 사천이고, 귀주는 사천의 남동쪽 방면과 맞닿아 있다.
더군다나 한동안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한때는 천하에서 손꼽히던 표국인 만큼 정보력도 상당하다.
‘그러니까 주 소저라면 알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런 기대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급격히 사그라졌다.
내게 혈승의 특징을 전해 들은 주화란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어렴풋이 떠오르는 별호가 몇 있기는 한데, 그들 전부 그 정도의 고수는 아니라서. 그렇다고 특정한 용모파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음. 그래요?”
약간 실망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주화란의 말마따나 용모파기도 없이 특징만으로 한 사람을 추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내가 알려 준 정보라고 해 봤자 고작 중년쯤 되는 나이에 초절정으로 예상되는 무공, 그리고 독문병기가 선장이라는 것 정도였다.
‘하긴, 무림이 얼마나 넓은데.’
넓은 건 땅덩어리뿐만이 아니다. 사람도 많다.
당장 잡철(雜鐵)로 만든 싸구려 칼 한 자루 차고 다니는 놈들도 비룡객이니, 검귀니 하는 별호를 지어 어깨에 힘주는 판국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에서 모래 한 알갱이를 찾는 셈이지.’
내가 입맛을 다시고 있던 그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주화란이 문득 생각났다는 입을 열었다.
“아, 하지만 그런 부분에 관해서는 저 대신 송 호위가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죠, 송 호위?”
어? 그러네?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한쪽을 향해 쏠린다.
언제나 그렇듯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송일섬이 중얼거렸다.
“흠, 글쎄.”
글쎄는 개뿔이. 캐릭터 파악을 모두 끝낸 나는, 녀석에게 은자 한 냥을 던져 주며 말했다.
“어이, 추혼객(抽魂客). 아는 것 있으면 시원하게 털어놔 보지?”
지금은 일개 호위를 자처하고 있지만, 광동진가의 핏줄을 이은 무공의 천재이자, 새파란 나이에 백번이 넘는 생사결(生死結)에서 승리하며 낭인 세계의 전설이 되었던 녀석이 바로 송일섬이다.
어떻게 보면 낭인들만큼 사람과 소문에 민감한 직업군도 몇 없다. 당장 오늘 내일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탁.
날아든 은자를 잡아챈 송일섬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를 돈에 환장한 놈으로 아는군.”
“응.”
“…….”
“그래서, 싫어?”
“싫진 않지.”
“여기서 돈 더 주면?”
“더 좋지.”
“옜다, 은자 더 가져가라. 돈에 미친놈.”
휘익. 탁.
“……뭔가 기분이 더럽군.”
추가 수당을 낭낭하게 확보한 송일섬이 찜찜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중년의 나이에, 선장을 사용한다고?”
“어, 듣기로는 강철로 만들어진 것 같다던데.”
“자세한 용모는?”
“그거까지는 몰라. 민머리에 수염이 없다는 것 빼고는. 남만까지 도망쳐 온 생존자도 거기까지만 알려 주고 죽어 버렸다고 들었고.”
“총체적 난국이군. 하지만 생각나는 인물이 셋 정도 있다. 선장을 독문 병기로 사용하는 무림인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오, 셋씩이나?”
“딱 한 가지 문제가 있긴 한데…….”
“괜찮아. 말해 봐.”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두의 기대 어린 시선 속, 송일섬이 입을 열었다.
“죽었다.”
“어?”
“정확히는 내가 죽였다고 해야겠지. 하필이면 의뢰를 받고 전장에서 마주쳤거든.”
“음……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나머지 둘은?”
“그게 무슨 소리지? 둘이라니?”
“방금 그랬잖아. 하나 죽였다고.”
“셋 다 죽였는데.”
“……?”
“둘은 전장에서, 하나는 생사결에서 죽였다. 마지막으로 만난 놈이 가장 강했지.”
“……!”
잠깐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남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미친 새끼가 하나 더 있었군.”
다른 미친 새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동감이다.
나는 멀뚱멀뚱 서 있는 송일섬을 노려보며 고민했다. 우선 은자부터 뺏고 때릴지. 때리고 은자를 뺏을지.
그러다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송일섬을 바라보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문득 입을 열었다.
“어이, 거기 사파 잡졸.”
“……사파 잡졸?”
“그래. 넌 뭐 아는 거 없냐?”
작금 천하에서 가장 강성한 사파 세력이자, 감숙의 패자를 자처하는 대 흑룡마문. 그곳의 소문주인 사마표가 미간을 찡그렸다.
“말하고 싶은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 나는 사파 잡졸이 아니고. 둘째, 감숙과 귀주는 일천 리 가까이 떨어져 있어 왕래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그걸 왜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한 거지?”
“네가 사파니까.”
“……?”
“원래 나쁜 놈들끼리는 서로 다 알고 지내는 법이잖아.”
“……!”
“뭐, 아니면 말고.”
석상처럼 굳어 버린 사마표를 향해 손을 내저은 나는, 그의 곁에 있는 또 다른 거대한 사파잡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우렁찬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꼬륵. 꾸르르륵.
“…….”
뭐여, 시벌.
무슨 월드컵 결승전도 아니고, 남만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힘찬 부부젤라 소리에 남호가 껄껄 웃었다.
“허허, 그놈 참. 내가 무공만 익혔어도 저 염병할 배때기를 갈라 버리는 건데. 으허허.”
아까부터 웃는 모습을 보니 정신이 반쯤 나간 모양이다. 그런 남호를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 혁무진이 입을 열었다.
“저기, 조장님.”
“대가리 박아.”
“예?”
“아, 습관적으로 그만. 미안하다. 근데 이 상황에서 다른 놈들처럼 헛소리하면 죽여 버릴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요. 혈승인지 뭔지 하는 그놈. 무림인치고는 정보가 너무 없는데요?”
그나마 지금까지 나온 말 중에서는 주화란 다음으로 정상적이다. 답답함에 뒤통수를 긁적인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렇긴 하지. 도대체 얼마나 나이를 처먹었는지, 어떻게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냐?”
살벌한 시선으로 태산을 노려보던 남호가 끼어들었다.
“나이를 처먹을 만큼 처먹은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가 알기로도 그런 놈은 없다. 과거 정마대전 때 살불(殺佛)이라는 마두가 있긴 했지만, 혈승이라는 놈의 특징과는 제법 차이가 있지. 당시에도 워낙 노괴였던지라 지금껏 살아 있을지조차 의문이고.”
단순한 이민족 늙은이라면 모를까, 남호는 은영각에서도 제법 중책을 맡았던 요원이었으니 그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도대체 정체가 뭐지? 이 정도면 은거기인 수준인데.’
까마득한 과거의 인물인 남호도, 현세대에 속한 화룡각 대원들도 모른다면 그야말로 괴인(怪人)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혈승의 진짜 정체가 아니라, 놈의 배후와 목적이었다.
무릎을 툭툭 두드린 남호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혈승의 배후에는 암천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동감입니다. 대회의에서도 그렇게 말했고요.”
“야수묘왕과 다른 부족장들은 어찌 생각하더냐?”
“우선은 일부 척후대와 전사들 일부를 귀주 방면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이 났는데…… 그전에 백상이 보였던 반응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중원의 일이니 더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겠군.”
“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그리 놀랄 것 없다. 정마대전 이후 백상은 중원의 일이라면 치를 떨었으니. 그나마 있던 남만의 교역로도 백족을 위시한 여러 부족들의 반발로 폐쇄되었지. 다만 지금 드는 의문은…….”
남호가 낮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런 백상의 행보가 한족들의 전쟁에 휘말려 하나뿐인 자식을 잃은 슬픔 때문인지, 그 과정에서 정파 무림에 대한 어떤 원한을 품었는지다.”
“음.”
“만약 전자라면 자식 잃은 아비의 반발심으로 끝나겠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조용히 흘러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화란이 작게 뇌까렸다.
“배반(背叛)이겠죠. 남만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 만한.”
“그래, 맞다. 그가 암천과 손을 잡았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외부의 적보다 위험한 것이 바로 내부의 적이다.
제아무리 단단한 철옹성이라 할지라도, 내부에서부터 무너진다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과 진배없다.
하물며 그 내통자가 야수묘왕과 함께 남만을 양분하는 대족장이라면.
‘말 그대로 끝장이지.’
어떻게든 밝혀 내고, 막아야 한다.
내부에서 벌어지는 흉계(凶計)의 정체도. 지금쯤 머나먼 귀주 땅에서 또다시 어딘가로 향하고 있을 혈승의 목적지도.
하지만 F급 헌터였던 나를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만들어 준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하나뿐인 몸뚱어리를 두 개로 나누어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의 사람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들의 무공과 특징, 성격을 하나씩 떠올리고 고민했다. 누가 가장 적임자인지. 누가 알 수 없는 위험으로부터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그 순간. 한 사람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제가 갈게요.”
“……!”
“보내 주세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올 테니.”
나는 놀랐다.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음에도 내 마음을 읽었다는 것에 한 번.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주화란이라는 것에 다시 한번.
그리고 내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처럼 튀어나왔다.
“안 됩니다.”
“왜요? 제가 혈승이라는 노괴(老怪)에게 해를 입을 것 같나요?”
“그건…….”
“비록 각주님께 비하면 일천한 무공이겠지만, 제 한 몸 지킬 정도의 수준은 된다고 생각해요.”
“주 소저.”
“걱정하시는 바를 알아요. 물론 혈승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겠죠. 하지만 남만야수궁이 가려 뽑은 전사들이 함께할 것이고, 여기 있는 대원들 중 일부도 함께할 거예요. 제 말이 틀렸다면 말씀해 주세요.”
나는 대답 대신 굳게 입을 다물었다. 주화란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화룡각 대원 중 일부를 선발하여 곧 출발할 척후조에 끼워 넣고, 그들로 하여금 혈승의 정체와 목표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최악의 경우 벌어질 전투도 감안해서.
다만 한 가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주화란의 지원이었다.
“각주님. 아니, 은인.”
은인. 몇 달 전 사천에서 용봉표국의 일이 끝난 직후, 그녀가 처음 나를 불렀던 호칭이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걸었던 화원(火院)의 꽃내음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달빛 아래에서 촉촉하게 젖어있던 한 사람의 눈동자는, 지금 굳은 결의로 빛나고 있다.
“보내 주세요. 저를.”
“……!”
“할 수 있어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눈. 저 목소리로 하는 부탁을 앞으로도 영원히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후우.
바람은 덥고, 입맛은 썼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환하게 밝아지는 주화란의 얼굴. 어느덧 저 멀리에서는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연주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