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49
#648화
마치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시에 뚝 끊긴 연주와 움직임을 멈춘 사람들.
그리고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 속에서, 지그시 나를 응시하던 백상의 냉담한 눈빛을 가로막은 것은 야수묘왕의 한 마디였다.
“아우, 이만 자리에 앉지.”
내게 못 박혀 있던 시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간다.
그사이 의복이라도 갈아입었는지, 백상은 눈처럼 새하얀 옷소매를 휘날리며 멈춰 있던 걸음을 옮겼다.
“그러지요.”
저벅. 저벅.
대전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단정한 복장과 담담한 목소리.
두 명의 대족장을 좌우로 두고 계단을 오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야수묘왕의 눈빛에 씁쓸함이 감도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하지.’
한 사람은 아우라 부르고, 한 사람은 궁주라 답한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의형제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백상이 야수묘왕을 형님이라 부르는 것을.
그와 동시에 문득 생각했다.
‘백상에게 야수묘왕은 어떤 존재일까.’
그래도 아직 마음속에 한 줄기의 정이 남아 있는 의형(義兄)?
혹은 단순히 상하 관계로 묶여 있는 남만야수궁의 궁주?
그것도 아니라면…….
‘정마대전에 참전하여 하나뿐인 아들을 잃게 만든 원수?’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이 좋은 방식으로든, 나쁜 방식으로든.
나로서는 가급적 전자이길 바랄 뿐이었고, 그건 야수묘왕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오랜만에 이 우형(愚兄)이 잔을 채워 주마.”
야수묘왕의 손에 들린 술병을 말없이 바라보던 백상이 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주색(酒色)을 멀리한 지 어언 수십 년입니다. 정중히 사양하지요.”
아무리 남만야수궁이 일종의 분할 통치제로 유지되는 부족 사회라 해도 궁주의 권위는 강력하다.
이는 그야말로 백상이라 가능한 거절이었다.
그는 백족의 대족장이기 이전에 야수묘왕의 의형제였으니까.
“넌 어릴 적부터 과실주를 좋아했지. 하지만 이제는 내가 따라 주는 술도 받지 않겠다는 말이냐? 아우를 위해 우형이 직접 담근 과실주다.”
“…….”
“백상.”
섭섭함과 씁쓸함이 담긴 나직한 부름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백상이 잔을 들었다.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잔만이라도 받겠습니다.”
그제야 표정이 밝아진 야수묘왕은 백상의 술잔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와 백상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두 사람 모두 대전에서의 일은 잊었으면 한다. 누구 하나를 탓하기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저질렀으니.”
내게 있어 백상은 여전히 수상쩍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엑셀을 밟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사실 제가 좀 심하긴 했죠.”
“…….”
뜻을 알 수 없는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백상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난 꼴을 보여 송구합니다, 궁주.”
그것은 뜻밖이라고 느낄 만큼 순순한 대답이었다.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띤 야수묘왕은 돌아서서 외쳤다.
“오늘은 남만의 모든 부족, 그리고 먼 길을 달려 중원에서 온 귀빈들이 함께하는 경사스러운 날이다. 모두 마음껏 먹고 마셔라!”
고요하던 연무장을 울리는 야수묘왕의 외침에, 잠시 멈췄던 연주가 시작되고 남녀가 뒤섞인 무희(舞戱)들이 춤사위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부드럽게 풀리는 분위기.
하지만 다음 순간 내 귓가를 파고드는 전음(傳音)은 더할 나위 없이 딱딱했다.
– 중원에서 온 귀빈이라. 재미있군.
아하.
‘어쩐지. 너무 쉽게 풀린다 했지.’
나는 콧잔등을 긁으며 야수묘왕을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장들과 그들이 데려온 전사들을 독려하는 중이었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 떠나라. 이 땅에 너희가 머무를 곳은 없다.
계속해서 귓가로 전해지는 전음에,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은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 우리 대족장님, 인심이 영 퍽퍽하시네. 아무리 한족이 미워도 그렇지. 내가 지난밤 애뇌산에서 구한 사람이 몇 명인데.
– 대가를 주마.
– 뭐?
– 무엇을 원하느냐? 황금? 은? 말하거라. 네놈의 몸뚱어리보다 무거운 금은보화를 내어줄 테니.
– ……흠.
달달하던 과실주의 향이 떫게 변한다. 마치 지금 내 기분처럼.
‘금은보화라.’
이거 참.
푸대접은 충분히 예상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기분이 더럽다. 나는 비어 있는 술잔을 채워 넣으며 재차 전음을 흘려보냈다.
– 딱히 그런 걸 노리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혹시 남만에서는 사람 목숨을 재물이랑 비교하나?
– 그럴 리가. 부족민의 목숨은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다. 하지만 상대가 한족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 어째서?
– 그건 네놈들이…….
이어지려던 전음이 흐릿해진다. 백상은 음울한 회색 눈동자로 가득 찬 술잔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 쓸데없는 말을 했군.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고 떠나라.
– 여기에서 끊어먹으면 나 오늘 잠 못 잘 것 같은데. 차라리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해결책을 찾는 방법은 없나?
– 해결책이라.
피식.
처음 봤다. 백상이 웃는 모습은.
그리고 그가 흘린 실소에 담긴 감정은 명백한 경멸과 비웃음이었다.
툭, 챙그랑!
비록 시끄러운 연회의 소음에 파묻혀 버렸지만 나는 똑똑히 듣고 볼 수 있었다.
자기(磁器)로 만든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나고, 그 안에 가득 담겨 있던 술이 사방으로 튀는 것을.
주르륵. 투둑.
엎질러진 과실주가 돌계단을 적시며 방울방울 떨어지던 그때, 귓가로 백상의 전음이 이어졌다.
–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저것들처럼.
– 흠.
늦어? 정말 그럴까.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불쑥 손을 뻗었다.
솨아악!
손가락의 끝으로 흘려보낸 한 줄기의 공력이 주변의 바닥을 잔잔하게 휩쓸었다.
동시에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전 형태를 잃은 것들이 솟구쳐 활짝 펼쳐진 내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쉬익. 티틱!
수십 개의 파편이 자석처럼 서로를 향해 들러붙는다. 공력을 접착제 삼아 단면을 잇고, 뭉친 끝에 마침내 하나의 잔이 되었다.
“……!”
“……!”
순간 술렁이는 주위의 공기.
슬쩍 고개를 돌려 살피니, 아까부터 이곳을 주시하던 이들의 반응이 제법 가관이다.
남호와 흑웅은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있고, 사마표와 요희의 눈동자에는 이채가 스쳤으며, 태산은 고기를 씹는 것도 잊은 채 멍한 표정을 짓는 중이었다.
‘쓸 만한데. 확실히 중단전을 연 이후로 공력 제어가 더 세밀해졌어.’
다른 건 제외하고서라도 태산의 식사를 멈추게 했으니 만족스러운 성과다.
“음, 좋아. 이 정도 허공섭물(虛空攝物)이면 훌륭하지.”
자화자찬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백상이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공을 자랑하고 싶었나?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터무니없이 형편없는 잔이로군.”
“형편없다고?”
“그런 것으로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술을 담기도 전에 새어나가 버릴 테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무슨 신도 아니고, 시간을 완전히 되돌리지 않는 이상 완벽한 복구는 불가능하니까.
백상의 말처럼 미처 모든 파편을 찾지 못한 탓인지 잔은 실금투성이였고, 이미 바닥과 계단에 스며든 술을 건져 올리는 것은 나로서도 무리였다.
하지만…….
“거 더럽게 따지네. 그냥 마시면 되지.”
한 마디를 툭 내뱉은 나는, 망설임 없이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아니, 넘치도록 들이부었다.
그리고 술이 흘러나오는 빈틈을 손아귀 전체로 감싸 쥔 뒤, 그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꿀꺽.
불이라도 삼킨 것처럼 목이 화끈해진다. 입을 열자 과실주의 향긋한 주향과 함께 달아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별거 있나? 실금이 가고 깨져도 뭔가를 담아서 마실 수만 있다면 그게 잔인데.”
“……!”
순간 백상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 이미 오래전 바닥에 엎질러진 술은 어찌하겠느냐?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느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 백상과 전음을 주고받았던 내게는 다르게 들렸다.
‘잔은 믿음(信). 엎질러진 술은 사람(人).’
정마대전에서 남만야수궁은 무수한 부족민들을 잃어야만 했고, 그후 백상은 입에 담기도 싫어하는 모종의 사정으로 중원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었다.
해서 나는 산산조각 난 잔을 이어붙이는 것으로 뜻을 전해 보였다.
‘그가 이걸 다시 한번 믿어 달라는 부탁으로 받아들일지, 마지막 경고로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이것으로 뜻은 확실히 전했다.
나는 흥겨운 연회가 한창인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환호하는 수많은 이의 중심에 선 한 사람, 야수묘왕이 심유한 눈빛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깜짝이야. 하여간 눈치 하나는.’
왠지 모르게 사고 치다가 걸린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다.
야수묘왕을 향해 짐짓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는 것이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백상의 목소리.
나는 굵고 짧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오줌!”
과실주 그거, 의외로 독하더라.
* * *
“커……헉!”
곰 같은 사내였다. 하지만 팔척장신의 거구와 일 갑자가 넘는 공력도, 눈앞에 들이닥친 죽음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콰득!
“컥, 네, 네놈은. 누구냐.”
빈틈없이 목을 옥죄는 손길. 정수리에서 흐른 핏물과 호흡 곤란으로 시야는 온통 붉고 흐릿했다.
사내는 젖먹던 힘을 쥐어 짜내어 말을 이어 갔다.
“제, 제발 사, 살려…….”
살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러나 사내의 목을 붙잡고 있는 괴인(怪人)의 생각은 달랐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드러나는 흰자위.
생기가 빠져나간 사내의 신형이 축 늘어지자, 괴인은 손아귀에 들어가 있던 힘을 풀었다.
쿵!
육중한 몸뚱어리가 땅을 뒹굴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목숨을 거둔 괴인은 내심 중얼거렸다.
‘아. 방금 처리한 놈이 마지막이었나?’
불과 반 시진 전이었다. 갑작스럽게 협곡의 앞뒤에서 적들이 나타난 것은.
그러고는 대뜸 이렇게 외쳤다.
‘반드시 네놈을 찢어 죽여, 사형제들과 벗들의 원수를 갚겠다.’
‘놈을 죽여라!’
그렇게 일대 다수의 전투가 시작되었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놈들을 쉼 없이 죽이다 보니 숫자 세는 걸 잊었다.
‘한 이백 명쯤 되겠군.’
많이도 끌어모았다 싶었다. 어차피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시산혈해(屍山血海).
그것은 네 글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고, 귀주(貴州)의 어느 이름 모를 협곡에 다시 한번 자신의 족적을 새긴 괴인은 잠시 바위에 기대 두었던 자신의 무기를 집어 들었다.
쩔렁. 철그럭.
쇳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선장(禪杖).
피 웅덩이를 밟으며 나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남쪽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