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5
#64화
‘천천히. 서두르지 말자.’
진위경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중요한 순간이다.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걸 망칠 수는 없다.
‘잘해 왔어.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식은땀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미끄러진다. 하지만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 중인 진위경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수축된 동공. 가늘게 떨려 나오던 호흡이 멈췄다.
‘지금!’
눈을 번쩍 뜬 진위경이 번개처럼 손을 뻗은 그 순간이었다.
쾅!
“주공!”
굉음과 함께 집무실로 난입한 위팽이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밖에 난리가…… 왜 그러십니까?”
진위경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의 다 끝났었는데.”
“예?”
“두 시진 동안 심혈을 기울였지.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였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
“중요해!”
절규하는 듯한 외침과 함께 그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중요했다고! 자네가 뭔데 그걸 판단해!”
부들부들.
그 모습이 어찌나 구슬프고 울분에 가득 차 있던지. 위팽은 다급한 상황도 잊고 자신의 주군을 바라봤다.
‘내가 너무 성급했구나.’
전쟁이 끝난 지 닷새째. 진위경은 사후 처리로 인해 유례없는 격무에 시달렸다. 예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평소에는 관대한 품성인 그를 이 정도로 분노하게끔 만든 건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급한 마음에 그만.”
위팽의 진심 어린 사과에 진위경의 마음도 누그러졌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주게.”
그러나 음성에 절절히 배어 나오는 슬픔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더더욱 미안해진 위팽이 말했다.
“제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됐네, 이미 엎질러진 물. 처음부터 다시 그리는 수밖에.”
“제가 대신 그려 드리겠…… 예?”
위팽이 떨리는 마음으로 진위경에게 다가갔다. 탁자를 꽉 채운 커다란 화선지가 보였다.
“이게 뭡니까.”
사막의 모래알보다 건조한 음성이었지만 진위경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닷새 전 전투를 화폭에 옮겨 봤네.”
“전투가 아니라 삼공자겠죠.”
“그게 그거지. 아무튼 이제 태경이의 눈만 그려 넣으면 모든 게 완벽해지는 거였는데…….”
“제가 들어와서 붓이 흐트러졌군요.”
“아닐세.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잘된 거야.”
진위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하찮은 실력으로 태경이를 표현하는 것을 하늘이 허락하지 않은 게지. 안 그런가?”
“…….”
위팽이 말없이 화선지를 집어 들었다.
촥! 촥촥촥!
“안 돼! 내 ‘영웅의 탄생’이!”
“……제목도 붙였습니까?”
애통한 비명을 들으며 위팽은 이마를 짚었다. 가끔, 아주 가끔씩 진위경이 이럴 때마다 낙향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 무관이라도 하나 차릴까.’
망연자실한 얼굴로 화선지 조각을 주워 담는 주군의 모습을 보니 은퇴 생각이 더더욱 절실해진다.
“개인 소장 하려고 했는데!”
“개인 소장이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나가 보셔야 합니다.”
“왜?”
“진 공자가 돌아왔습니다.”
진위경이 화선지를 줍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막내가 어딜 다녀왔나?”
“그 진 공자 말고요.”
설마, 하는 눈빛에 위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공자가 돌아왔습니다.”
“무경이가!”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삼 년 만에 돌아온 둘째 동생이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래, 지금 어디 있나?”
“삼공자 처소요.”
“무경이 녀석, 그렇게 막내를 싫어하던 놈이 오자마자 찾아가? 이제 형 노릇 좀 하려나 보군. 철들었어. 하하하.”
진위경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그때였다.
쿠구구궁.
난데없는 굉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건물이 무너지고 있다! 모두 피해라!
– 사람들 불러!
– 삼공차 처소가 무너진다아아악!
진위경이 눈을 깜빡였다.
“방금 막내 처소가 무너졌다고 들은 것 같은데.”
“원래 형제는 싸우면서 크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슨…… 설마?”
“별거 아닙니다. 그림이나 새로 그리십시오.”
위팽이 해탈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새로운 화선지를 집무용 탁자 위에 깔았다.
“이번 그림 제목은 ‘둘째 형에게 개처럼 두들겨 맞는 영웅’이 괜찮을 것 같은데요.”
쉬이이이익!
절정의 경신법을 발휘, 바람처럼 달려 나가는 진위경의 뒷모습을 보며 위팽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무관이라도 차릴까.’
고민만 깊어지는 요즘이다.
* * *
진무경.
나이는 스물셋. 별호는 진천검(振天劍).
불과 약관의 나이로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공의 천재.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몸, 진태경의 둘째 형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 나로서는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진무경, 아니 둘째 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기억상실증은 훌륭한 핑계였다.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진위경은 그에 관한 모든 걸 알려 주었다.
‘당장은 볼 수 없을 게다. 워낙 멀리 있거든.’
‘어디 있는데요?’
‘하남(河南)의 천무학관(天武學館). 삼 년째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매정한 녀석이지.’
말은 그렇게 해도 진위경의 표정은 뿌듯해 보였다.
마치 자녀를 하버드에 입학시킨 부모님의 얼굴 같았다.
‘성격은요?’
‘음. 착하지.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지만 분명히 착한 녀석이야.’
‘저랑 친했나요?’
‘……친했지. 친했을걸? 맞아, 친했어.’
‘아, 예.’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진무경이 있는 하남과 태원진가의 거리를 알고 난 후에는 아예 관심을 껐다.
‘뭐, 내가 설마 그때까지 무림에 남아 있겠어?’
꼬박 몇 주 동안 쉴 새 없이 말을 달려야 하는 거리.
그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진무경이 코빼기 한 번 안 비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날 줄이야.’
예상치 못한 등장이다.
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야, 형.”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형’이 손을 맞잡았다.
“그래, 오랜만에 보는구나.”
이놈 생각보다 착한 것 같은데?
진위경의 말대로 눈매가 매서워서 사람들이 오해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이 풀려 더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잘 지냈어?”
진무경이 희미하게 마주 웃었다.
“그럭저럭. 그런데 막내야.”
“응?”
“말이 짧아졌다?”
후웅!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진무경이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던진 것이다.
‘이게 뭔.’
황당함을 느끼며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사뿐히 벽을 밟으며 지면에 착지한 나를 보며 진무경이 피식 웃었다.
“어쭈.”
아, 이런 전개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우리 친한 사이 아니었나?”
“친했지. 내 주먹하고 네 몸하고.”
“아하.”
진위경 말을 믿은 내가 미친놈이다. 애초에 동생이라면 껌뻑 죽는 인간 아닌가.
‘시바, 말을 제대로 해 줬어야지.’
진무경이 주먹을 내밀었다.
“네 죽마고우다. 인사해라.”
“안녕하세요.”
불길하게도 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우리 막내, 많이 컸네. 형님 앞에서 까불고.”
쉬이이익!
번개처럼 쇄도한 진무경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 끝에서 바람이 찢어졌다.
‘이건 진심인데?’
공력은 실려 있지 않지만 엄청난 힘이 담긴 일권(一拳).
나는 기겁하며 다급히 고개를 비틀었다.
쾅!
나무로 만든 벽면이 박살 났다. 공중에 흩어지는 나무 파편 사이로 주먹이 쏟아졌다.
퍼버버벙!
얼굴, 가슴, 어깨, 배.
마구잡이로 내뻗는 것 같지만 동작은 매끄럽고 공격 범위는 그물처럼 촘촘했다.
“권법?”
“갱생권(更生拳)은 오랜만이지?”
시발, 권법 이름이 뭐 그따위냐.
내심 욕을 퍼붓던 순간, 갱생권의 일초가 복부를 후려쳤다.
뻑!
“헙.”
“아직 안 끝났다.”
숨이 턱 막히는 고통을 참으며 날아오는 주먹을 팔뚝으로 막았다. 둔중한 소리와 함께 뼈가 욱신거린다.
“막아?”
퍼버버벅!
아프다. 더럽게 아프다.
진무경은 힘과 속도,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위였다.
그런데 뭐랄까…….
‘생각보다 버틸 만한데?’
공력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가?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그의 공격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쉭!
진무경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정확한 예측. 깔끔한 회피.
그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제법 늘긴 했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씩 웃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붙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제법이 아니라 많이 늘었지. 소문 못 들었어?”
“들었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진무경이 피식 웃었다.
“어디까지 사실인지 지금부터 증명해 봐.”
쐐애애액!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그의 손이 내 손목을 낚아채 왔다.
‘어딜!’
눈을 부릅뜨고 날아드는 손을 쳐 냈다.
아니, 쳐 내려고 했다.
탁, 타타탁!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다섯 번의 공격과 방어가 오고 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승패가 갈렸다.
콱!
“뭐냐, 이 허접한 금나수(禁拿囚)는?”
기이한 동작으로 끝내 내 손목을 틀어쥔 진무경이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잡힌 것만으로도 속이 부글거리는데, 바로 이어진 그의 말이 가슴에 불을 질렀다.
“한 번 더.”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헛소문인 건 진작 알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동생 버릇을 고쳐 줘야지.”
내 손목을 놔준 진무경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들어와. 이제는 봐주는 거 없다.”
나는 그를 말없이 응시했다.
진무경은 분명 나보다 고수다. 절정이라는 벽은 너무 높아서,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넘어설 수 없다.
안다. 다 아는데.
‘열받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소문이 자자한 진무경이라는 천재가 대체 어느 정도일지.
그건 헌터가 아닌, 무림인으로서의 호승심이었다.
‘해보자.’
내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진무경이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구나, 너.”
“이게 원래 내 표정이야.”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래. 다 좋은데…… 아직도 혀가 짧다?”
그 순간 진무경의 주먹이 흐릿해졌다.
쉭, 퍽!
눈앞이 번쩍했다.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음에도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것이다.
진무경이 자신의 주먹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주먹이 노렸던 곳은 관자놀이였다. 정확하게 타격했다면 지금의 한 방이 마지막 공격이 됐을 거다.
비록 공력을 사용하지 않았다지만, 절정 고수가 전력을 기울인 일격을 어느 정도 피해 낸 것이다.
“많이 늘었지?”
“인정한다. 소문의 반의반도 안 되지만.”
“걱정 마. 지금부터 조금씩 따라잡을 테니까.”
“네가 날 따라잡아? 어느 세월에?”
내가 대답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일각이라도 버텨 봐라. 그럼 네가 내 형이다.”
다시 한번 진무경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한발 빨랐다.
‘민첩에 10포인트 부여.’
전쟁을 통해 얻은 열 번의 레벨 업. 그리고 상태창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던 100포인트. 그중 일부가 내 명령에 응답했다.
쏴아아악!
변화는 순식간이었다. 동시에 확신이 들었다.
안면을 향해 날아오는 진무경의 주먹을 완벽하게 피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쉭!
‘느려.’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틀었다.
퍽!
……젠장, 10포인트 더 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