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50
#649화
마법과 기계.
온갖 문명의 이기가 발달한 현대와 비교하자면, 무림은 확실히 생활하기 불편한 조건들로 가득하다.
마차에 앉아만 있어도 엉덩이와 허리를 박살 내는 천연 비포장도로.
당연히 스마트폰과 와이파이는 꿈도 꿀 수 없고 전기도 통하지 않는다.
그나마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직접 낙뢰를 맞는 것뿐인데, 전기와 목숨을 등가 교환해야 한다는 점에서 영 가성비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아니, 워낙 파리 목숨이었던지라 신경 쓸 틈도 없었다고 봐야 맞겠다.
그 후에도 뭐, 그럭저럭 괜찮았다.
누군가 말하길 의식주(衣食住)는 사람이 생활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라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태원진가의 삼공자라는 신분을 가진 나는 제법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딱 한 가지만 빼고.’
나는 심각한 눈빛으로 내궁(內宮)에 속한 이민족 하인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쳐줘도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린 녀석이다.
“한 가지만 묻자.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
“예?”
“지금 나 한족이라고 무시하냐?”
눈을 동그랗게 뜬 하인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런데 왜 이런 시궁창으로 날 데려왔지? 분명히 측간에 데려다 달라고 한 것 같은데.”
“이, 이곳이 측간인데요.”
“잘 생각한 뒤에 대답하라고 했을 텐데. 다시 한번 거짓말을 했다가는 네놈 집을 똥으로 가득 채워 주겠다. 중원의 문파 중에 개방이라고 들어 봤지?”
“예? 예. 그 왜, 걸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파 아닙니까?”
“잘 알고 있군. 내 말 한마디면 거지새끼 수천 명……까지는 아니고 백 명 정도는 데려올 수 있어. 특히 궁기방이라는 놈은 냄새가 무지막지하지. 그놈들이 네놈을 포함한 구족(九族)을 똥지처참할 거다. 그러니까 날 당장 제대로 된 측간으로 안내해!”
내 호통에 화들짝 놀란 하인이 울먹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한데 여기가 그나마 깨끗한 측간인데요.”
빌어먹을. 설마 했는데 이 시궁창이 측간이었다니.
마주하기 싫은 진실을 깨닫자 눈앞이 캄캄해진다. 중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런 야만인 새끼들…….”
“예?”
“됐다. 넌 이만 돌아가.”
죄 없는 하인을 돌려보낸 나는, 끔찍한 악취로 가득한 좁은 공간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끼이이익.
발밑에 놓인 판자가 비명을 질러 댔다. 문까지 닫자 일 인용 화생방에 들어온 기분이다. 나는 굳은 얼굴로 내심 중얼거렸다.
‘설마 백상이 파 놓은 함정인가.’
무협 소설에서 많이 봤다. 엄청난 고수가 측간에서 암살당하는 장면, 뭐 그런 거.
하지만 판자 틈 사이를 확인한 뒤에는 그런 의심마저 사라졌다. 아무리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살수라고 해도 여기에 숨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제발. 하느님. 부처님. 나무아미타불관세음아멘…….’
일 초가 십 년처럼 느껴지는 시간.
현실을 받아들인 내가 숨을 참으며 볼일을 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액, 퍽!
모든 것이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붙잡은 나는,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낡은 문을 파고든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살?’
그리고 인지와 동시에, 나는 번개처럼 신형을 날렸다.
쾅!
문이 박살 나고 신선한 밤공기가 나를 반겼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환호와 악기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하지만…….
‘남동쪽.’
나 정도의 무위라면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방향을 짐작한 나는 망설임 없이 지면을 박찼다.
쾅! 쉬쉭!
바람이 전신을 스쳤다.
담벼락을 밟고 솟구쳐 가장 높은 전각 위에 오르자, 내궁의 전경이 발아래에 펼쳐진다.
곳곳을 환하게 밝히는 횃불. 연무장에서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 도처에서 번을 서고 있는 전사들까지.
‘도대체 누구지?’
아무리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한계는 있다.
한눈에 파악하기에 내궁은 너무 넓었고, 그 안을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평소보다 몇 배나 많았다.
그리고 매우 유감스럽게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경계를 취하고 있던 남만야수궁의 전사들은 직업 정신이 투철한 축에 속했다.
“남서쪽! 전각 위!”
“웬 놈이냐!”
삐이이익!
날카로운 호각(號角)소리와 함께 내궁을 순찰하고 있던 전사들이 개미 떼처럼 밀려온다.
물론 사람보다 먼저 도착한 물건도 있었다.
쐐애애액! 쾅!
음, 일이 좀 꼬인 것 같은데.
발치에 처박힌 화살과 창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화살을 다시 확인했다.
지금 막 날아온 것들과 비교하면 크기도, 형태도 동일하다.
하지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가장 큰 차이점이 있었다.
‘이건…….’
화살 깃에 매달려 있는 작은 가죽 뭉치.
그리고 그것의 존재를 깨달은 그 순간, 내가 서 있는 전각 아래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타올랐다.
“네놈은 지금 포위되었다!”
“당장 정체를 밝히고 투항하라!”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힌다.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나는, 마음속으로 작게 명령어를 읊었다.
‘인벤토리 오픈. 수납.’
띠링.
시스템 특유의 맑은 종소리와 함께, 손아귀에 잡혀 있던 화살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내궁의 전사들이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마지막 권고다. 무장을 해제하고 투항하라!”
“당장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그렇지 않으면 네놈의 대갈통에 화살 구멍을 내 주마!”
“…….”
멘트 살벌한 것 보소. 이게 현지 패치인지 뭔지 하는 그거냐.
남만식 NYPD의 윽박지름에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신 나는, 일단 그들이 시키는 대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어차피 내 신분을 알게 되면 오해야 금방 풀릴 테고, 적당한 변명 몇 마디면 끝날 일이다.
여기서 더 문제를 일으키면 나만 더 곤란…… 그런데 이놈들 표정이 왜 이러지?
‘어째 하나같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들인데.’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깨달았다.
휘이잉.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오늘따라 유난히도 하반신이 시원하다는 것을.
화륵.
“아, 아앗……!”
“허어……!”
스포트라이트처럼 나를 비추는 수십 개의 횃불.
그리고 잠시 본분을 잊은 전사들의 탄성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진짜 좆 됐네.’
바지 추스르는 걸 깜빡했다.
* * *
“이건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약 반 시진 만에 마주한 남호는 차분한 얼굴로 침착하게 입을 뗐다.
“너 이 새끼, 암천이지?”
“…….”
“암천이라서 자꾸 이러는 거지? 응?”
“…….”
“그렇지. 암천이 아닐 리가 없지. 아니면 무림맹 각주라는 놈이 남만까지 와서 왜 대족장 명치를 때리고, 달밤에 전각 위에 올라가서 하반신을 훤히 드러내고 있겠어. 애초에 입맹 조지려고 작정을 한 거지, 어? 내 말이 틀렸나?”
탁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뭔가를 씹고 있던 태산이 번쩍 손을 들었다.
“남호, 암천이 뭔가? 태산이 궁금하다.”
심유한 시선으로 태산을 응시하던 남호가 사마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건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묻는 건데, 저 쳐 죽일 놈의 아가리에 자물통을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음.”
잠시 생각하던 사마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을 걸 좀 더 가져오겠소.”
“좋은 생각이군. 하지만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은영각 요원으로서 한마디를 보태자면, 음식을 가져오지 말고 저놈을 음식 앞으로 데려다 놓게. 한마디라도 더 개소리를 들으면 미칠 것 같아서 그래.”
“…….”
“…….”
평소에도 제법 괴팍한 성격의 남호지만, 오늘의 그는 괴팍하다 못해 첨예하다.
오죽하면 눈치 없는 태산조차 겁먹은 얼굴로 사과할 정도였다.
“태산이…… 잘못했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태산을 노려본 남호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차례가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오해가 좀 있었습니다.”
“오해? 무슨 개 같은 놈의 오해?”
“아니, 말을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제 말을 좀…….”
“다 들었어! 다 들었다고! 심지어 본 사람도 있어! 그걸 본 사람이 이백 명이 넘어! 이러려고 주화란을 보낸 거냐? 그런 취향이야?”
“와, 그러고 보니까 주 소저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진짜 없어서 천만다행…….”
“네 이노오오오옴!”
쾅! 우직!
팔순 넘은 노인네가 힘도 좋다. 저 단단한 탁자를 때려 부수다니.
나는 본능적으로 박수를 칠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 상황에서 한 번만 더 건드렸다가는 남호가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아서였다.
“남 노인. 진정하시오, 진정.”
“후욱. 훅.”
“숨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좋소. 바로 그거요.”
사파에 어울리지 않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호를 다독인 사마표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쨌든 각주, 지금 한 말이 사실인가?”
“그래, 인마. 다른 사람한테는 말 못 할 아주 약간의 오해가 있었…….”
“정말 이러려고 주 소저를 보낸 건가?”
“이 시벌 놈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나. 이러다가 내 별호가 노출신룡으로 바뀔 판이다.
천장을 우러러보며 한탄한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그 전에 습격을 받았어.”
“뭐?”
“습격?”
“오, 태산이. 습격 뭔지 안다.”
순식간에 집중되는 세 명의 시선.
눈을 크게 뜬 남호가 황급히 물었다.
“언제? 어디서 말이냐?”
“측간에서요. 볼일 보고 있었는데 밖에서 화살이 날아오더라고요. 바로 나와서 흉수를 찾으려다 보니 이렇게 된 겁니다. 바지춤 추스를 틈도 없었어요.”
“그렇다면 흉수! 흉수는 잡았느냐?”
“잡았겠습니까? 멀리서 쏜 데다가 내궁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실패했습니다.”
차라리 비수나 독침 같은 암기가 날아왔다면 쉬웠을 거다. 그런 종류의 무기는 거리가 훨씬 한정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활은 제법 먼 거리에서도 공격이 가능한 원거리 무기였고 그만큼 범인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느냐? 습격이었다면 바로 궁주에게 고하여 흉수를 색출할 수 있었을 텐데.”
남호의 말도 일리가 있다. 아니, 차라리 사실대로 말할까 고민한 것도 사실이었다.
야밤에 바지 벗고 돌아다니는 변태 취급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하지만…….
“습격은 습격인데, 습격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지?”
“태산이. 습격은 아는데 습격이 아닌 습격은 모르겠다. 이해시켜 달라.”
“죽어. 제발 죽어.”
단번에 태산을 진압한 남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습격이 아니었다?”
“네.”
“숨겨진 게 있었군. 더 자세히 말해 봐라.”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화살에 희한한 게 달려 있더라고요.”
나는 대답과 함께 기감을 널리 퍼트렸다.
그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마음속으로 작게 읊조렸다.
‘인벤토리 오픈. 소환.’
띠링.
맑은 종소리와 함께 손아귀에 잡히는 감촉.
나는 품에 넣어 두었던 손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그리고 측간을 향해 날아온 화살 한 자루와, 그 끝에 매달려 있던 작은 가죽 주머니를 풀었다.
돌돌 말려 있던 가죽이 탁자 위로 펼쳐진다.
어린아이의 손바닥보다 작은 그것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금일(今日). 인시(寅時). 서문(西門).]그것은 전서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내게 보내는 초대장이었다.